하나님의 사랑과 샬롬 안에 있는 과학기술을 향해

 

기독교와 과학의 충돌

인류의 신앙적 다양성만큼 종교와 과학은 끊임없는 분리와 통합과 투쟁의 대상이었다. 기독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기독교와 과학이 애초부터 긴장관계였던 것은 아니었다. 근대과학의 역사는 유대-기독교적인 <성서적 자연관>과 헬라적 <합리적 자연관>이 만나며 발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과학혁명기를 지나며 과학에서 종교는 서서히 열외 되기 시작했다. 종교에 대한 냉소주의자들은 과학의 성장을 통해 종교는 어떤 식으로든 소멸의 길을 갈 것이라 보았다. 과학은 우주의 모든 신비에 대답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인류의 행복과 직결된다. 종교는 인간 진화의 단계에 있어 무지와 두려움과 감정적 오류(affective fallacy)의 소산이므로 종교는 불필요하게 된다.

이럴 경우 종교와 과학 간에는 필연적으로 불필요한 긴장과 충돌의 가능성을 가진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다원주의 시대에 여러 종교의 하나로 전락(?)한 기독교는 하등학문인 과학 앞에서 수모를 당하는 처지에 이르게 된 것이다.

남북 전쟁의 상흔이 가시지 않은 1869년 12월 17일 뉴욕의 쿠퍼 유니온 대학에서 당시 코넬 대학 총장이었던 37살의 화이트(Andrew Dickson White)는 당시까지 학생과 교직원의 선발과정에서 부여되었던 신앙적 검증 절차를 파기하고 코넬 대학을 과학을 위한 도피처(asylum)로 만들 것이라 선언했다.

반면 화이트헤드(Whitehead)는 앞으로의 역사는 현세대가 종교와 과학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주장했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종교와 과학 간의 적대 관계는 아주 사소한 것이며 기독교는 과학의 발달을 저지하기보다는 오히려 부추겼다고 보았다.

1967년 과학자로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왈드(George Wald)박사는 사람들이 진화론을 과학적 사실로 널리 인정하는 이유는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단지 또 다른 오직 하나의 대안인 창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 주장했다.

창조를 피해가려는 이론은 진화론을 천체로 옮겨 놓기도 한다. DNA의 2중 나선 구조를 밝혀 노벨상을 공동수상한 크릭(F. Crick)은 생명체는 지구에서 직접 생겨난 것이 아니라 먼 옛날 언젠가 지구 밖 외계에서 유입(directed panspermia)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종교와 과학의 양립 가능에 대해 긍정적인 주장도 있다. 과학과 종교의 역사적 충돌을 상호 모순과 배타성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아인시타인은 종교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요 과학 없는 종교는 눈먼 장님이라 했다. 아인시타인은 과거 양진영의 충돌은 자기 영역의 한계를 정확히 인식하지 못했던 결과 때문이라 했다.

신에 대해 관심을 버린 세속주의는 현대물리학이나 기계문명시대의 도래 이전인 고대 희랍의 철학자들 때부터 이미 있었다. 하지만 물리학적 세계상과 인과율적 세계관의 발견자요 수립자들인 케플러나 갈릴레이, 데카르트, 뉴텀, 라이프니츠 등은 자신들이 발견한 인과 법칙으로 인해 창조 신앙에 대해 동요한 적이 결코 없다. 성서 해석에 있어 과학과 기독교의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은 없는 것이다. 다만 불필요한 충돌을 해왔을 뿐이다.

창조 신앙과 과학 기술: 과학 기술은 가치중립적인가?

로런스(William. W. Lowrance)는 현대 과학과 가치에 대한 논의에서 (1) 사회적 가치는 과학에서만 유도될 수 없으며 (2) 지식은 선과 악에 다 쓰일 수 있으나 가치중립(value free)적이지 못하며 (3) 새로운 지식이 나타나면 그것의 쓰임새에 주목해야 하고 (4) 기술 활동이 기술자들의 활동에 영향을 미치고 대중의 삶에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가치 의존적이며 (5) 기술 전문가들은 대중의 입장에서 대중을 위해 결정을 내려야 하고 (6) 과학이 문화적 전망을 바꾸거나 인간의 마음과 육체와, 우주, 인간 사회의 관념을 바꾸어버리거나 서로 다른 대안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한다는 점에서 우리 인류의 세계관적 판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

로런스의 언급은 과학이 필연적으로 가치의 문제와 부딪히게 마련임을 간파한 것이다. 여기서 윤리적 논쟁이 반드시 싹트게 된다. 특별히 종교와의 긴장은 당연히 대두 된다. 종교든 윤리든 그 기조에는 정의가 있기 때문이다.

핵연구가 핵무기 개발과 대형 핵 발전 참사로 이어진 점, 독성 연구가 테러용 독침개발 기술로 이용된 점, 좋은 육질의 고기를 제공하기 위한 육류가 포함된 사료 개발이 광우병 사태로 이어진 점, 장기 이식 수술의 등장이 멀쩡한 장기를 사고파는 장기 밀매매로 이어진 점, 많은 과학기술의 성과가 범죄에 악용된 점, 과학기술이 세상에 편리함은 가져다주었으나 새로운 인간 소외, 빈부 격차, 환경생태오염과 파괴, 자동 기술로 인한 대량 실직 사태, 과거에 없던 크고 작은 여러 안전사고로 인한 다수의 사망자와 중도 장애자를 발생 시킨 점 등등 과학발전의 부산물들은 결코 가치중립적이 않음을 알 수 있고 이들 문제는 늘 종교의 관심 사항이다. 하나님의 세상 창조를 믿는 기독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레스닉(David Resnik)은 자신의 12 가지 과학 윤리 강령에서 과학자들이 자신들의 연구의 사회적 결과를 판단하고 대중에게 그 결과를 알리고 이 결과가 해롭다고 판단될 때에는 연구를 중단해야 하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세속 학자들에게도 과학의 윤리 문제는 가치중립적일 수 없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기독교와 현대과학 기술의 관계, 조화와 공존인가 갈등과 긴장인가

그럼 과학 기술은 지금까지 어떤 사회적 역할을 해왔을까? 오늘날 과학 기술의 발달이 질병을 극복하고 소통의 거리를 단축 시켰으며 새로운 기회 창출을 가져왔다고 긍정적 측면을 더 크게 보는 학자들이 있는 반면, 과학 기술이 인간관계의 비인간화, 귀중한 자원의 고갈, 환경오염, 대량 학살 무기의 등장으로 인해 인간 존재에 대한 위협을 초래하였다고 비난하는 학자도 있다.

기독교학자들도 양편으로 나뉜다. 현대과학기술이 기독교적 이해와 긴장 관계에 있다고 보는 자크 엘룰(Jacques Ellul)같은 학자와 기독교와 조화와 공존이 가능하다고 보는 하비 콕스(Harvey Cox)와 프리드리히 드사우어(Friedrich Dessauer)같은 학자들도 있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과학기술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 그저 한숨만 쉬며 방치하거나 과학기술을 철저히 외면해야 할까? 과학기술 문명을 대단히 경계하고 부정적으로 바라보며 거부하거나 의심을 거두지 않는 재세례파 계열의 아미쉬나 메노나이트 같은 교파들이 있다. 오늘날 복음주의 기독교에서도 여러 반성의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다. 과학기술이 인간의 죄성으로 인해 많은 경우 선용보다는 악용되어 왔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조건 방치하고 외면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속한 자는 아니나 그리스도인들도 세상 안에서 세상 가운데 살아가야 할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세상의 학문과 문화는 철저히 세속화 되어 창조주 하나님을 무시하고 외면해버렸다. 성경은 모든 것의 주인은 주님이며 하나님보다 높아진 것들을 파하고 그리스도의 주권 앞에 복종 시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다(골 3:17; 고후 11:5). 과학기술도 당연히 이 명령에 따라야 한다. 즉 과학 활동도 인간 문화 활동의 한 형태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수행되어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과학발전에 따른 윤리적 의사결정 문제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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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를 밟혀내도 여전히 통제가 쉽지 않은 코로나19 바이러스의 모습

 

따뜻하고 착한 과학기술은 가능한가- 하나님의 사랑과 샬롬 안에 있는 과학기술을 향해

코비드(코로나19) 시대는 인류의 많은 것을 바꾸어놓았다. 코로나19 이전과 이후의 엄청난 변화는 이미 다양한 영역에서 시작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외형적 패러다임의 변화 못지않게 인류는 삶과 생명과 과학기술과 지구 공동체에 대해 내면에서부터 무언가 명료하게 정리되지 않는 깊은 성찰을 함께 고민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DNA를 기반한 생명체와 다르게 겨우 단일한 RNA를 지닌 바이러스, 그것도 단지 1종류의 코로나 바이러스 앞에 인류가 이렇게 속절없이 흔들릴 수 있다니. 인류가 겨우 마스크와 격리와 백신에 목을 매고 있다니. 그나마 과학기술의 발전이 없었다면 어떤 결과들이 있었을까?

코비드는 역설적이게도 바이러스가 인간의 음흉한 행태나 과학기술과 만난 결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코비드를 대응하는 것도 결국은 과학기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그 코비드 앞에 인류 공동체는 헌신과 배려를 목격하고 사랑과 샬롬의 중요성도 절실하게 체험하게 되었으니 아이러니하기만 하다.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스도인들은 코로나19를 체험하며 기독교 공동체의 정체성인 창조, 창조신학, 과학·기술, 사랑, 자유, 샬롬 등에 대해 성찰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공동체 속, 성경적인 착하고 따뜻한 과학기술도 과연 있을까? 그렇 가능성을 열어놓아야 한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샬롬과 사랑이 과학기술 발전 속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도록 해야 한다. 이 하나님의 사랑과 샬롬은 원론적으로 하나님과의 정당하고 조화로운 관계로부터 오며, 다른 사람과의 조화로운 관계를 통한 성경적 공동체의 회복,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에 대한 바르고 정당한 조화를 통한 전면적 샬롬과 사랑에서 나온다. 따라서 이 같은 샬롬과 사랑을 향해 그리스도인들은 과학발전에 따른 바른 이해와 적용을 통해 늘 무엇이 합당한 길인지 항상 고민하고 지혜를 구해야 한다고 본다.

하나님의 창조는 본래 사랑과 평화의 질서였다. 이 사랑과 평화는 인간이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하면서 와해(瓦解)되었다. 기독교는 기독론적 사랑과 샬롬을 창조와 구속에 모두 적용해야 한다. 창조자로서의 하나님의 말씀과 구속자로서의 하나님의 말씀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 평화는 모든 과정에서의 인간다움의 부분으로 공동체의 완전함, 건강함, 흠이 없음을 추구한다. 과학기술이 주도하는 이 시대 안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의 질서와 성경에 그 뿌리를 둔 하나님의 샬롬의 과학, 하나님의 과학으로서의 샬롬, 즉 하나님의 선하신 질서 안에서의 사랑과 샬롬이 필요하다.

기독교는 과학발전이 가져다준 인간 소외와 상실감을 어떻게 사랑과 샬롬 안에서 따뜻하게 회복시킬 것인지 늘 고민해야 한다. 과학발전이라는 미래의 세속적 상황 안에서 어떻게 기독교는 초월적 사랑과 내재적 사랑을 동시에 만족하는 기독교적 사랑과 샬롬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을까?

결론적으로 착한 과학기술이란 그리 쉽지 않다. 과학기술이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본성이 탐욕적이고 타락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복된 신앙적 양심은 과학기술의 중립성조차 초월한다. 테크놀로지가 장애인들이나 약자들을 위한 배려(점자 책 개발, 무료 개안 수술, 저개발국 지원, 장애인용 전동차 개발 등등)로 나타나는 것 등은 초월적 사랑을 휴먼 테크놀로지로 승화하는 작은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고 보여 진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한 삶을 살며 과학발전도 그리스도의 사랑과 샬롬을 충만케 하는 도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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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신학자다. 강남대, 개신대학원, 건양대, 명지대, 서울신(예장 합동), 서울기독대학원, 백석대와 백석대학원, 피어선총신, 한세대신대원에서 가르쳤고, 안양대 겸임교수, 에일린신학연구원 신대원장을 역임했다. <과학으로 푸는 창조의 비밀>’(전 한동대총장 김영길 박사 공저), <기독교와 과학> 등 30여 권의 역저서를 발행했고, 다양한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한다.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을 비축하고 있는 인터넷 신학연구소'(www.kictnet.net)을 운영하며, 현재 참기쁜교회의 담임목사이며 김천대, 평택대의 겸임교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