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옥 전도사가 하나님께서 자신을 죄인들에게 명확하게 계시하신 특별계시를 접할 수 없었던 과거의 자연적 인간들에 대한 구원의 가능성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등장한 이후로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여부로 구원이 결정되는 것은 타당하나, 그 이전에는 인간 본성에 존재하는 하나님 감정, 즉 신의식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었던 사람들에게 구원이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불공평한 분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아직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또는 갑자기 다른 영의 미혹을 받음으로 나타나는 주장이라고 생각됩니다. 김주옥 전도사님의 글을 계속 계시하고 방치하면 <바른믿음>이 혼탁하여 지고, 어떤 분들이 미혹될 수 있다는 우려를 전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김주옥 전도사님의 글을 내리기로 결정했습니다. 대신 김주옥 전도사님의 글의 문제가 되는 부분들에 대한 저의 입장을 첨가한 글로 대신합니다. 호로 처리된 파란색 글들이 정이철 목사의 입장입니다.

-------------------------------

기독교는 오직 예수를 믿고 죄의 용서를 받아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예수가 전해지지않은 시대와 공간을 살았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성경은 이에 대해서 분명히 말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모릅니다. 구원에 관한 문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므로 오직 하나님만 아시지만, 그러나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패턴을 발견할 수는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을 온전히 준행하는 의인들은 구원을 얻습니다.

(이론상으로 율법을 100% 완전하게 지키는 사람이 나올지라도 그것으로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아담 안에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반역한 죄는 완전한 율법 준수로 없어지지 않습니니다. 하나님께 반역한 죄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사형을 당하는 것이고, 사형을 당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자기의 죄값으로 사형을 당하면 그것으로 끝이지 다시 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론상으로 완벽한 율법준수를 할지라도 그것으로 구원을 얻는 길은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의인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율법의 기능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20)

그러나 의인이 아니지만 하나님에 의해 의인으로 인정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윗과 같은 사람들은 온전히 율법을 지키는데는 실패했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경외하며 겸비함으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최선으로 율법을 지키려고 애썼고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 회개하며 속죄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직 율법이 없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로 노아나 아브라함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도 하나님을 본 적이 없지만 그분의 존재를 믿고 경외함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실 때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노아도 아브라함도 온전히 거룩하지 못했고 실수와 실패가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의인이라고 칭해 주셨습니다.

(구약의 성도들도 예수님 믿고 구원 받았습니다. 구약 성도들에게 나타나시어 자기를 계시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복음은 이사야 선지자가 만난 여호와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합니다 (요 12:41).

여호와 하나님을 계시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믿음으로 구원 받은 구약의 성도들은 자신들이 정확하게 알았건 몰랐건 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시어 자기의 피로 속죄할 작정 안에서 그들을 받으시고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구약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로를 소급 적용받음으로 구원 받았습니다. 구약의 구원 받은 성도들의 동물의 피 제사는 자신들이 다 알았건 몰랐건 간에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받은 구원에 대한 감사와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성경도 없고 예수님을 들어본 적도 없는 세상에 살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심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창조하실 때 사람 안에 심어주신 하나님 형상과 신의식은 타락으로 심히 훼손되어 제 구실을 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비록 어느 정도 작동하여 어렴풋하게 하나님 생각을 할 수 있을지라도, 그렇게 불분명한 것으로 하나님을 섬겨 구원에 이른 사람은 없습니다. )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롬1:19-20)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타락 후에도 인간 속에 남아있는 하나님 형상과 신의식을 기반으로 인간이 하나님을 믿고 섬기지 않았므로 하나님이 그들을 정당하게 심판하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타락한 인간 속에 그런 것이 남았다면, 왜 하나님께서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피 흘리면서 하나님이 주신 특별계시를 전하게 하셨을까요?

타락한 인간과 우주와 자연 속에 남은 무엇으로 사람이 구원을 위해 하나님 섬김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반역한 모든 죄인들을 영원히 심판하실 때, 그들이 반역한 죄로 저주받은 죄인으로서 사는 동안 스스로 행한 죄악된 행위들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고 할 말이 없어지게 될 것이라는 의미일 뿐입니다.

타락한 인간과 우주와 자연 속에 남아 있는 훼손된 일반계시와 하나님 형상과 신의식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역사한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때 자기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합당한 심판의 타당성을 조금이라도 인정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생명의 신비함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또 인생의 고통과 기쁨과 두려움 등을 경험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창조주와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찾고 그의 이름을 부르며 탄식하고 감탄합니다. 하나님을 만나 본 적이 없지만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마음 속에 깊은 경외심과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남이 보지 않아도 선을 행하고 싶어하고 선을 행하면서 마음이 기뻐집니다. 남이 보지 않아도 죄 짓지 않으려 하고 죄 지으면 괴로워집니다. 양심이 율법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리라”(롬 2:14-15)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원시인이든 문명인이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두려워하며 비록 완전하지는 않을지라도 양심에 따라 최선을 다해 사는 사람들을 하나님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것은 곧 구원을 주신다는 것인데, 아담과 아담 안에서 함께 하나님께 반역하여 영원히 저주받은 우리 죄인들이 그리스도 속죄의 피 밖에서 구원을 얻는 길이 있다는 것은 기독교의 복음이 아닙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을 알 수 없으니 하나님의 존재를 인지하고 두려워하면서 양심을 따라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양심을 따라 최선을 다하는 삶이라는 것도 전혀 객관적이지 못합니다. 모든 사람의 양심이 이미 부패하고 타락하여 바로 그 양심을 따라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다른 사람에 대한 범죄를 나름 떳떳하게 저지르는 것이 타락한 인간의 실상입니다.)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행10:35)

그럼 지금도 양심을 따라서 최선을 다해서 살면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절대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죄의 댓가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로써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부인한다는 것입니다.

(죽으신 그리스도의 인성이 스스로 부활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반역죄와 자범죄들을 대속하기 위해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죽으신 그리스도의 인성은 스스로 살아나실 능력이 전무하십니다. 우리의 반역죄에 대해 진노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죗값으로 자기의 생명과 피를 제물로 바치신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해 완전히 만족하시고, 우리의 죄에 대한 용서의 선언으로서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의 인성을 살리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인성의 부활은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더 이상 묻지 않으신다는 선포였습니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1:4)

예수님을 부인하는 자들은 어쩌면 자신이 충분히 의롭게 살고 있다고 착각하는 교만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충분히 선하게 살지 못하며 항상 죄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도 않고 고민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보시고 아시고 심판하신다는 사실에 대해서 전혀 관심도 두려움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이 전혀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죽음 이후에 하나님 앞에서 서서 모든 삶에 대해서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사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기 전에 우리가 죄를 직고하면서 스스로 심판하게 될 것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롬14:11-12)

일생 동안 했던 모든 말과 행동과 생각이 비디오로 보여질 때 우리는 차마 고개도 쳐들지 못하고 눈과 귀를 막으려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물론이요 자신에게도 당당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듯이 착하게 살았던 사람들이 구원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인류 역사에서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하는 가장 근본적인 죄는 아담 안에서 하나님께 반역한 죄입니다. 태어난 후 살면서 범한 죄들은 아담 안에서 함께 반역한 죄로 인해 부득이 생겨나는 2차적인 죄입니다. 김주옥 전도사님의 이 글에서 우리의 죄의 근본이 무엇인지 저자가 인식하고 있는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또한 세상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듯이, 단지 기독교라는 종교를 택해 믿었는데 하나님이 그것을 예쁘게 여겨 예수 믿는 자들에게만 구원을 허락하신다는 것도 절대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의 본질은 간단히 말해 자기 일생 전체를 찍은 비디오를 하나님과 함께 심지어 자기 혼자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도저히 볼 수 없다는 것을 겸손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 겸손한 자들만이 예수님을 필요로 하며 그런 자들만을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5:5)

하나님을 볼 수 없지만 그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은 겸손하게 됩니다. 최선을 다해 살면서도 언제나 죄에 대한 갈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는 겁니다!! 성경을 통해서 그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완전한 자유함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완전한 은혜입니다. 이런 은혜를 아는 그리스도인들은 생명까지도 바치고 싶어 합니다.

박진호 목사는 이렇게 정리해 줍니다.

“기독교를 몰라 예수 믿지 못했다고 심판 받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지만 그 가운데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들만 구원받습니다. 그러나 무조건 아무나 택해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십자가의 원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들만 구원하십니다. 자신의 무능, 불완전함, 죄악을 철저히 깨달아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만을 소원하는 자들입니다. 자신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기를 완전히 포기하고 오직 그분의 보호와 인도에 따라 그분의 거룩한 뜻을 이 땅에 실현시키기를 소원하는 자들입니다…

만약 예수가 구원의 수단이라면 예수가 전해지지 않은 시대와 장소의 사람들이 구원받을 길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이라면 기독교 전파에 관계없이 언제 어디서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 이전부터 영원 이후까지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반역한 죄인들이 구원을 받는 길은 오직 반역한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무죄하신 그리스도가 자기의 피로 우리의 죗값을 대신 지불하신 공로를 덧입는 것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전파되지 않은 시대의 모든 선인들과 악인들에게는 구원의 가능성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구원을 주시므로 기독교의 복음의 전파와 관계없이 어디에서나 구원을 받는 사람이 나타날 수 있다는 주장은 이단사상입니다.)

예수님을 몰랐던 이순신 장군이 천국을 갔는가 하는 질문은 두 가지 전제가 해결이 되어야 답이 나옵니다. 그가 하나님을 알았는가? 그가 하나님 앞에 부끄러워 숨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고 고백했는가?”

(이순신이 구원은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에 대한 문제는 그가 아담 안에서 하나님께 반역한 죄인으로서 자기를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혜택을 입었는가 못 입었는가의 문제입니다. 살면서 단 하나의 죄도 짓지 않았을지라도,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막연한 신의식을 따라 하나님에 대한 신비한 감정과 겸비한 자세를 가지고 살고, 양심대로 바르게 살았을지라도 이순신이 아담 안에서 하나님께 반역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가 없으면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조선시대의 이순신이 아담 안에서 하나님께 반역한 죄를 용서 받는 길은 오직 훗날 성육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것 뿐이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사는 동안 스스로 지은 죄들에 대해 부끄러워했을지라도 아담 안에서 범한 반역죄 문제가 해결되어야 구원받습니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바른믿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