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모 목사의 '김동수 교수의 거짓 방언'(1회)

언제나 무지하게 거짓 방언을 옹호하는 평택대학교의 신학과 교수 김동수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움을 금하지 못하고 있다. 그가 부채도사 유형의 영성을 드러내는 온누리교회의 김하중 장로 등에게서 나타나는 일들이 사도행전 성령의 역사라고 극찬하는 등의 내용을 보고서 어떤 사람들은 그를 '박사급 박수무당'이라고 한다. 김동수 목사는 아무 의미가 없는 사이비 소리현상이 기독교의 신령한 영의 언어이고, 그것이야 말로 원래의 기독교의 방언이라고 우기는 항상 안타까운 행동을 계속 일삼는다. 최근 김동수는 이창모 목사의 저서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 2014)에 대해서도 훼방하는 어리석은 글을 써서 또 많은 신실한 신자들의 눈살을 찌뿌리게 만들었다. 이에 이창모 목사는 아무런 바른 지식이 없으면서도 단지 신학대학의 교수라는 타이틀로 부끄러운 줄도 그릇된 글을 남발하는 김동수 목사의 글로 인해 또 신자들에게 악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부득이 반박하고 교정하는 글을 작성하여 바른믿음에 보내왔다. 아래의 푸른 색 내용은 김동수가 이창목 목사의 책의 내용에 관하여 반박한 내용이다. - 바른믿음 -   

대표적 거짓방언자 옹호자 김동수 교수

"바울이 말한 방언은 외국어였다고? 이들의 주장은 바울이 말한 방언의 은사가 외국어를 말하는 은사였다는 것이다. 그 근거는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에서 “방언을 말하다”라는 어구가 똑 같이 나오는데 성경에서 같은 어구는 같은 뜻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성서주석의 abc를 모르는 말이다. 성경에서는 같은 어구가 반듯이 같은 뜻이 아님은 같은 저자에게서도 나타난다. 세상이라는 단어가 같은 요한복음 본문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인 피조물이 되기고 하고(요3:16), 교회를 핍박하는 하나님의 반대 세력이 되기도 한다(요16:19). 더구나 동일 저자가 아닌 경우에 같은 어구를 사용하더라도 다른 뜻으로, 또 다른 신학적 입장에서 기록할 수 있는 것이다."(김동수)

성경에서 같은 어구라도 다른 뜻, 다른 신학적 입장일 수 있다는 김동수의 말은 옳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혹 드물게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지 항상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같은 어구가 다른 뜻, 다른 신학적 의미를 가지는 경우보다는 같은 뜻, 같은 신학적 의미를 가지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그럼에도 김동수는 성경 본문을 해석할 때, 자신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기 위해, 같은 어구라도 다른 뜻과 다른 신학적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을 독자들에게 슬쩍 흘린다. 그리고 헬라어를 잘 모르는 일반 독자들의 기를 죽이려는지 너무도 자명한 분명한 뜻을 결코 흔하지 않는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되는 뜻으로 슬쩍 바꾸면서 자신의 그릇된 주장을 정당화시키는 치졸한 야바위 수법을 자주 쓰고 있다(이 야바위 수법은 다른 곳에서도 불리하면 의례히 자주 사용되는 김동수의 특기이다).

이런 논리는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행2:17)를 김동수 식으로 해석한다면, ‘말세에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짐승들에게도, 다시 말하면 개에게도 성령을 부어주시겠다’는 약속이 되고 마는 것과 같다.

한글 성경에서 “육체”(또는 육, 육신)로 번역된 헬라어 ‘사르크스’(sa,rx)의 의미는 일반적으로 ‘사람’이라는 의미(요1:14)와 함께 ‘죄에 종속된, 즉 인간의 부패한 죄의 본성’(롬7:18,25;8:5 등)이나 또 ‘사람을 포함한 모든 짐승의 육체’를 의미(고전15:39)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육체”도 ‘사람’뿐 아니라 ‘짐승’이라는 의미도 있기 때문에 김동수식대로 사도행전 2장 17절을 해석한다면, ‘말세에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짐승들에게도, 다시 말하면 개에게도 성령을 부어주시겠다’는 이상한 해석이 합리적으로 도출된다.

그러나 다른 저저라 할지라도(원 저자는 한 분 성령이시다), 같은 사항(방언)에 대하여 동일한 동사(말하다)를 예외 없이 쓴다는 것은, 오히려 “방언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것”임을 나타내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된다. 이것이 성경주석의 abc이다.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에서 ‘방언’은, 동사와 함께 쓰일 때는 예외 없이 ‘말하다’와 함께 쓰인다(다른 모든 성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외가 있다면,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고전14:14)와 “~내가 영으로 기도하면”(고전14:15) 밖에 없는데, 이것은 바울의 예외적인 표현이 아니라 바울의 의도된 표현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여기서(고전14:14,15)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인 ‘사람들에게 말하는 방언’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가 만들어낸 (즉 사도바울이 지적한 궤휼의 역군들에 의해 뿌려진) 거짓 방언인 ‘하나님께 기도하는 방언’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방언은 외국어로 표출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나 바울이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는 이것이 기본적으로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기에, 또 이성이 아니라 영으로 하는 말이었기에(14:2), 이것을 실제 외국어로 보기는 어렵다. 그것이 실제 외국어였다면 성령의 나타남에 의한 통역의 은사가 따로 필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배 시간에 방언을 할 때 외국어를 잘하는 통역인을 쓰면 되는 것이다. 방언이 외국어라면 방언하는 사람이 통역하기를 기도한다는 말은(14:13) 말이 되지 않는다. 즉 통역의 은사를 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외국어를 배우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간의 이성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었기에 성령의 나타남에 의한 통역이 또 필요했던 것이다."(김동수)

고린도전서 14장 2절로 설명되는 옹알거림의 방언이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기 때문에 외국어로 보기 어렵다는 김동수 교수의 주장은 옳다. 왜냐하면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은 외국어인데 반해 고린도전서 14장 2절의 방언은 외국어가 아닌 거짓 방언이기 때문이다.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은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서나 고린도 교회에서나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인간의 언어이다. 그러나 오순절주의의 옹알거림의 영음 방언은 인간의 언어가 아니다. 그러므로 오순절주의의 영음 방언은, 성령이 초대 교회에 주셨던 방언의 은사와는 다른 것이다.

고린도전서 12장 10절의 은사 목록에 방언의 은사와 함께 통역의 은사가 있다는 것은, 방언이 외국인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는 언어라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1) 뿐만 아니라 고린도전서 14장 27절에서 방언을 말하고 그것을 통역하도록 바울이 명령하고 있는 것도, 방언이 언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분명한 증거다.

그러나 김동수는 “만약 실제 외국어였다면 방언을 하는 사람은 방언 통역하기를 기도하라는 바울의 권면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바울은 그 언어를 배우라고 하든지 그 언어를 쓰는 사람을 초빙해서 방언 통역을 하라고 권면했을 것이다.”2) 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고린도 교회의 사정을 잘 모르는 무지에서 나온 말이다. 어쩌다가 고린도 교회의 예배에 들어오는 외국인들의 국적을, 고린도 교회가 어떻게 미리 알고 이들의 언어를 배울 수 있겠는가? 또 외국인들이 언제 올지 어떻게 알고, 이들의 언어를 통역할 수 있는 자를 미리 준비할 수 있겠는가?

김동수 교수는 “방언이 만약 실제 외국어였다면 실제 그 언어를 아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통역이 필요 없다. 통역의 은사를 통해서 통역되려면 실제 인간이 쓰는 언어가 아니어야 한다.”3) 라고 말한다. 그러나 외국어 방언을 말할 때 거기에 그 언어를 아는 사람이 있다고 어떻게 단정할 수 있는가? 아마 그는 방언의 은사가 예배에서 현지인 신자들이 아니라 현지어가 통하지 않는 외국인들을 위한 은사임을 몰랐기 때문에 이런 무모한 상상을 한 것 같다.

고린도 교회에서 방언이 행해질 때 외국인들은 통역 없이 방언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 방언은 자신들이 사용하는 언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함께 예배에 참석한 현지인 신자들은 그 방언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방언을 알아들을 수 없는 현지인 신자들이 외국어 방언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고린도 교회에 통역의 은사를 주신 것이다.

성령이 고린도 교회에 주신 방언의 은사는 예배에서 현지어를 모르는 외국인들을 위한 것이며, 통역의 은사는 외국어 방언을 모르는 현지인 신자들을 위한 것이다. 만약 김동수의 말대로 고린도 교회의 방언이 오순절주의의 방언처럼 영음이기 때문에 통역이 필요하다면, 영음 방언을 하는 이유가 ‘인간의 언어로 표현 불가능한 내용을 하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며, 또한 마귀에게 비밀을 들키지 않기 위함’이라는 자신들의 주장과 모순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어서 하늘 언어로 하나님께 말한 것을 다시 인간의 언어로 통역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또한 영음 방언을 하는 이유가 마귀에게 비밀을 들키지 않기 위함이라면, 그 영음 방언을 통역하는 것은 마귀에게 비밀을 알려주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은 성령이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서 주의 제자들에게 주신 방언, 즉 외국인에게 하나님의 큰 일을 전할 수 있는 외국어 방언 외에는 없다. 그러므로 성령이 고린도 교회에 주신 방언의 은사도 어쩌다가 고린도 교회의 예배에 참석한 외국인에게 하나님의 큰 일을 전할 수 있게 하는 외국어 방언이었다.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이 외국어인 이유를 문법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에서 ‘방언을 말하다’(lale,w, 랄레오 + glw,ssaij, 글롯사이스)와 바울이 기록한 고린도전서에서 ‘방언을 말하다’(lale,w, 랄레오 + glw,ssh|, 글롯세)의 헬라어 문구는 거의 정확하게 일치하기 때문이다.4) 헬라어에서 어구가 같은 표현은 같은 의미를 가진다.5) 그러므로 성령이 고린도 교회에 주신 방언의 은사도 사도행전에서와 마찬가지로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언어 능력이었다.6)

둘째, 방언을 뜻하는 헬라어 ‘글롯사’(glw/ssa)라는 명사는 성경에서 단 두 가지의 의미, 즉 입 안에 있는 혀(tongue)와 언어(language) 외에 다른 의미로 사용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7) 따라서 예언이 모든 교회에서 필요한 보편적인 은사라면8) 방언은 특수한 상황, 즉 오순절 날 예루살렘의 상황이나 고린도 교회와 같이 외국인들이 예배에 들어온 상황에서만 필요한 특별한 외국어 은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각주>

1)본문에서 ‘통역함’으로 번역한 헬라어 ‘에르메네이아’(e`rmhnei,a)의 동사 ‘디에르메뉴오’(diermhneu,w)는 언어를 번역하는 것을 의미한다. 존 R. W. 스토트, 오늘날의 성령의 사역, 조병수 옮김(서울: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83), p.135.
2)김동수, 방언은 고귀한 하늘의 언어(서울: 이레서원, 2008), p.116.
3)앞의 책, p.116>
4)김동수, 신약이 말하는 방언(서울: 킹덤북스, 2009), p.135; 존 R. W. 스토트, 오늘날의 성령의 사역, 조병수 옮김(서울: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83), p.135; 김동수, 방언은 하늘의 고귀한 언어(서울: 이레서원, 2008), p.61.
5)존 스토트, 오늘날의 성령의 사역, 조병수 옮김(서울: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83), p.135. 
6)그러나 김동수 교수는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영음이라는 자신의 생각을 기준으로, 오히려 사도행전의 방언이 외국어라는 것까지 의문을 제기하며 영음일 수 있다는 억지 주장을 한다. 김동수, 신약이 말하는 방언(서울: 킹덤북스, 2009), p.135)>
7)존 스토트, 오늘날의 성령의 사역, 조병수 옮김(서울: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83), p.135>
8)롬12:6; 고전11:4,5; 살전5:20; 딤전1:18; 4:14; 벧후1:19-21; 계1:3; 10:11; 11:3,6 등을 살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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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