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자 칼빈이 율법을 통한 구원의 가능성을 이론상으로 인정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칼빈도 자신들이 믿는 율법주의 구원론을 이론상으로 믿었다는 것이다.

원래 하나님이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기로 했다고 한다. 처음의 사람 아담과 이후의 모든 사람들이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지 못하므로 율법준수로 영생을 얻은 사례가 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을 통해 영생의 자격(의)을 얻어주기 위해 성육신하셨다고 한다.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자 예수 그리스도가 1)십자가로는 단지 지옥에 떨어지지 않게 했고, 2)완전하게 모세의 율법을 실천하여 천국 영생의 자격(의)을 얻으시어 우리에게 전가했다고 한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때, 1)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지옥에서 건져내고, 2)예수님의 모세 율법에 대한 완전한 실천의 공로로 우리를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고 한다. 이런 사상을 이름하여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교리라고 한다. 능동순종 교리는 이미 합동이 2021년 106회 총회에서 성경적 근거가 없다고 결론 내린 것처럼, 쓸모없는 사변적인 주장이다.

성경적 근거가 없는 이론을 신학자들이 떼지어 주장한다고 하여 그것이 하나님의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신학의 사명은 오직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말하신 것을 간추리고 요약하고 설명하여 적용하여 오늘 날의 교회가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목적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절대로 하나님이 말하지 않은 것을 진리가 되게 조작하거나, 하나님이 말한 것과 다른 내용을 진리로 선포하는 것이 신학(자)의 기능이 아니다. 그런 일을 하는 신학(자)에게 성경은 다음과 같이 저주를 선포하고 있다.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8,19)

성경은 다음과 같이 순종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으로 우리의 죄가 사하여짐이 칭의라고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다. 결코 그리스도가 모세 율법에 대한 완벽한 실천으로 얻으신 의의 전가로 우리를 의롭다 하셨다고 말씀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 5:9)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고전 1:30)

성경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의 대속으로 우리를 의롭게 만들었다고 선언한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죄를 없었던 것처럼 만들어 우리를 의롭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1)그리스도는 처음부터 죄가 없었고,
2)그리스도는 처음부터 율법의 정신과 모든 지시가 이루어진 인격(인간)으로 오셨고,
3)그리스도는 내내 하나님께 순종하여 늘 하나님께 만족을 드리셨기 때문
이다.

그리스도의 순종의 삶이 아무리 아름다울지라도 그것으로 그리스도의 피를 지우고 청소하는 신학(자)은 영원히 저주를 받는다. 하나님은 기독교를 그리스도의 피 위에 세우셨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모세의 모든 율법에 순종했다는 것을 믿으라고 가르치지 않고, 모든 율법에 순종하신 그리스도의 삶에서 우리의 의가 비롯되었다고 가르치지도 않는다.

성경은 언제나 하나님께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죗값으로 자기의 피를 하나님께 드리심으로 우리의 죄가 없었던 것으로 간주되어 의로움을 얻었다고 가르친다.

그리스도가 율법을 완전하게 지켜서 천국 영생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의)을 얻었다는 사상은 종교개혁을 허무는 이단사상이다. 능동순종은 로마교회의 행위구원론의 변종이다. 로마교회는 사람이 자유의지의 결정으로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이 시작되지만, 구원의 완성은 우리들의 선행과 성화에 달렸다고 한다. 선행과 성화를 요약하면 율법준수이다. 그리스도를 믿고 완전하게 율법준수하면 구원이 완성된다는 것이 로마교회의 구원론이다.

청교도 신학의 능동순종은 ‘우리’를 ‘그리스도’로 변형한 것에 불과하다. 우리가 완전한 율법준수를 하지 못하므로 그리스도가 우리 대신 완전한 율법준수를 하게하는 것이다. 가마우지의 모가지 속의 물고기를 어부가 차지하듯이 그리스도가 모세의 율법을 완전하게 실천하여 얻은 율법의 의를 우리가 차지하게 하는 것이다. 결국 능동순종은 천국 영생의 복이 율법준수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이단사상이다.

이것을 모르고 여지껏 그리스도의 능동순종이 옳다 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까운 일이다. 더 나아가 자신들의 이단성이 칼빈에게 먼저 있었다고 하니 기가 막힐 일이다. 그래서 필자는 칼빈의 신학을 율법에서 의가 나온다는 율법주의로 볼 수 없다는 더 많은 증거를 제시하고자 한다. 
 

1>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근친상간, 짐승섹스, 동성섹스 등의 죄악을 경고하는 율법을 제대로 지키라고 하는 레위기 18:5절의 내용에 대한 주석에서 칼빈이 이론적으로 율법적 구원이 가능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는 그때 칼빈이 무슨 말을 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레위기 18: 5절 전후 내용은 영혼의 구원에 대한 내용이 아니다. 이전 가나안 원주민들의 죄악을 답습하지 않으면 그들처럼 그 땅에서 저주의 심판으로 멸망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그 본문에서 왜 칼빈이 영혼의 구원에 대한 말을 하겠는가? 했다면 그게 이상한 것이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10:5절에서 레위기 18:5절을 인용했다. 그러나 완전한 율법준수로 구원을 얻을 가능성에 대해 일체 말하지 않았다. 바울은 단지 행위로 얻는 칭의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칭의가 가능하다는 진리를 강조하기 위해 레위기 18:5절을 인용했다. 다시 읽어보기 바란다. 

칼빈이 레위기 18:5절 주석에서 이론적으로 율법준수로 구원을 얻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는 것은 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다. 애매한 말 하나를 가지고 칼빈에게도 자신들과 같은 동일한 이단성이 있었다고 주장한다는 것은 억지이다. 

만일 칼빈의 그런 애매한 말이 정말 칼빈의 신학적 주장이었다면 (고)박윤선 박사와 서철원 박사가 이단으로 전락한다. 박윤선, 서철원 박사는 다음과 같이 율법준수로 얻어지는 구원과 칭의의 가능성을 완전하게 부정했다. 
 

“율법은 본래 인간에게 의를 주기 위하여 제정된 것이 아님(소제목). 갈 3장 10-12절에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고 하였는데, 이 말씀은 율법이 제정된 것이 인간에게 의를 주기 위함이 아님을 잘 밝혀준다. 구약 자체가 인간이 율법으로 의를 얻을 소망이 없음에 대하여 역설하는 동시에, 믿음으로만 영생을 얻는 사실을 고조한다. 바울은 여기서도 합 2:4절을 인용하였으니, 곧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한 말씀이다.” (박윤선 2015, 124)

“후대에 들어온 율법은 성질상 은혜 언약과 고체하려는 것이 아니었고 다만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다. 여기서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함은 인생들로 하여금 그 범죄한 것이 많음을 알도록 하기 위하여 율법을 주셨다는 뜻이다(롬 4:15, 5:20). 그러면 율법의 목적은 새로운 구원 방법을 제시함이 아니고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함에만 있다.” (박윤선 2015, 26)
 

“율법의 기능은 죄를 알게 해주는 것이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 준다. 율법은 이러이러한 것을 행하면 범죄하고 지적하고 교훈한다. 그러므로 내 죄가 얼마나 크고 무서운 것인지를 율법이 알려준다. 내 양심에 가책을 일으켜서 죄를 알도록 하고,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알게 한다 ... 율법은 살리고 구원하는 기능은 없고 정죄하고 죽이는 기능을 갖는다.” (서철원 2019, 48)
 

2>
칼빈의 전체적인 가르침은 율법에게 의로움을 주는 기능이 없고 단지 하나님과 화목해질 수 있는 방법, 즉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것이 율법의 임무라는 것이다. 
 

“율법은 앞으로 이 주제에 대해 논하게 될 때 더 명백하게 볼 수 있겠지만 그 유용성이 다양할지라도 특별히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화목의 방법을 가르치기 위해서 모세와 모든 선지자에게 맡겨진 것이었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율법의 마침’(롬 10:4)이라고 부른 것은 여기서 기인된 것이다.” (존 칼빈, 기독교강요, 1.6.2.)
 

칼빈은 그리스도의 순종은 우리를 대신하여 영생의 의를 획득하기 위한 순종이 아니라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방법이었다고 설명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하기 위한 두 번째로 요구되는 조건이 있었다. 즉, 불복종으로 멸망한 사람을 바로 고쳐서 불복종을 순종으로 하나님의 심판대로 이행하며, 죄에 대한 형벌을 받는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 주께서는 참 사람으로 나타나시며 아담의 몸과 이름을 취하셔서 아담 대신에 아버지께 순종하며,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대로 이행하는 값으로서 우리의 육신을 바치시며, 같은 육신으로 우리가 받을 벌을 받으셨다.” (칼빈, 기독교강요 2.12.3)
 

칼빈은 우리가 얻은 칭의의 원인은 그리스도의 율법준수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피의 대속으로 인한 죄용서라고 가르쳤다.

“사도행전 13장에 있는 바울의 설교에 이런 말이 있다.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8-39). 여기에 보면 죄의 용서를 말한 후에, 그에 대한 해석으로 의롭다고 인정한다는 말을 한다. 의롭다고 인정하는 것을 분명히 죄의 사면으로 해석하며, 의롭다함을 율법의 행위에서 분리시키고 있다.” (칼빈, 기독교강요, 3.11.3)

“이것은 바울이 다른 곳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고 한 것과 똑같은 뜻이다. 그뿐 아니라, 로마서 4장에서 그는 처음으로 칭의를 ‘의의 전가’라고 부르며 칭의를 죄의 용서에 포함시키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사함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6-7, 시 32:1)고 말하였다.” (칼빈, 기독교강요, 3.11.4)

“만일 하나님께서 무죄 방면과 사죄로 우리를 의롭다 하지 않으신다면 바울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라고 말한 것은(고후 5:19) 무슨 뜻인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21절). 우선 나는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들이 의롭다고 인정된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에는 하나님께서 용서하심으로써 의롭다 하신다는 뜻이 포함되었다.” (칼빈, 기독교강요, 3:11.11)

“믿음의 의는 하나님과의 화해이며, 이 화해는 곧 죄의 용서라고 정의한 말이 얼마나 옳은가를 이제 검토해야 하겠다.” (칼빈, 기독교강요, 3.11.21)

“주께서 받아들여 자신과 하나가 되게 하신 사람은 주께서 의롭다 하신다고 한다. 왜냐하면 주께서는 죄인을 의인으로 만드시지 않고는 자신의 은혜 가운데 받아들이거나 자신과 결합시키실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일이 죄의 용서로써 이루어진다고 부언한다 ... 그러므로 하나님이 포용하시는 사람들은 죄의 용서로써 오점이 씻길 때에 정결하게 된다는 사실에 의해서만 의롭게 되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런 의는 한 마디로 ‘죄의 용서’라고 부를 수 있다.” (칼빈, 기독교강요, 3.11.21)

“이 의를 얻는 방법은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는 것이라고 그는 가르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으심으로써 우리를 자신과 화목케 하신다는 말씀을 들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가를 더 의심하지 않아야 한다.” (칼빈, 기독교강요, 3.11.22)

“누가가 보고한 것을 보면, 바울은 설교를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8-39)는 말로 끝맺는다. 바울은 죄의 용서와 의를 연결하여, 둘이 똑같다는 것을 보여 준다.” (칼빈, 기독교강요, 3.11.22)

“죄인은 행위에 의하지 않고 거저 용납해주시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고 하는 말을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은 성경에서 아주 빈번하게 나타나며, 고대 저술가들도 간혹 그렇게 말하였기 때문이다. 어거스틴도 그렇게 말한다. ‘이 세상에 있는 성도들의 의는 완전한 덕성에 있지 않고 죄의 용서에 있다.’ 베르나르드의 유명한 말도 이와 부합한다.” (칼빈, 기독교강요, 3.11.22)
 

칼빈은 우리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는 율법을 지켜서 얻은 의가 아니고 성육신하실 때부터 가지고 오신 그리스도의 본래의 의라고 가르쳤다.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고 진술한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충족시키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의를 제공하셨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의가 그리스도 안에 하나의 속성으로 존재하며, '본래 그리스도께 속한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동시에 그는 그리스도의 의를 '순종'이라고 부름으로써 '그 의의 특성을 설명'한다." (칼빈, 롬 5:18절 주석)

 

Works Cited

서철원. 2019.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 쿰란출판사: 서울
박윤선. 2015. 계시의존 사색. 영음사: 서울
존 칼빈. 로마서주석
존 칼빈. 기독교강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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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