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감리교는 죽었다

세계교회협의회(WCC) 따라가면 교회가 죽는다. 진보계 에큐메니칼 운동의 포용주의 신앙무차별주의 다원주의를 수용하면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최근의 영국감리교회(Methodist Church in Britain)의 죽음이 이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WCC 회원교회인 영국감리교회는 존 웨슬리가 전개한 복음운동에서 태동했다. 영국국교회(성공회)에서 분리하여 독립했다. 세계 감리교회들의 모체이다. 세계 감리교는 장로교보다 훨씬 더 많은 신도수를 지니고 있다. 감리교(Methodism) 운동은 근대 기독교의 중요한 움직임이다.

영국 <크리스턴투데이>는 2021년 7월 5일자 보도에서 영국감리교가 죽었다고 대서특필했다. “감리교는 죽었다”(Methodism? Dead)라고 보도했다. “영국국교회는 어떤가?” 하고 묻고서, “아직 숨이 끊어지지는 않았다”(Anglicanism? not yet)고 한다. 

영국감리교회가 죽었다는 것은 조직체가 없어졌다는 뜻이 아니다. 기독교 고유의 정체성과 영적인 생명력을 완전히 상실했다는 의미이다. 영국감리교회는 출범한지 237년 만에 신앙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영국감리교회는 1784년에 영국국교회(성공회)에서 분리 독립했다. 왜 한 시대를 풍미한 영국감리교회가 죽음을 맞게 되었는가?

교회의 죽음에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작용하기 마련이다. 핵심 요인은 무엇인가? 성경이 제시하는 복음을 포기하고 자유주의 신학 또는 진보주의 일변도로 달려갔기 때문이다. 교회의 중심축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과 감리교가 강조해 온 복음적 신앙에서 이성적이고 사변적인 사상으로 이동한 결과이다. 교회가 기독교 신앙의 규범인 성경과 교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역행하는 자유주의 신학과 도덕적 낙관주의로 기울어졌기 때문이다. 진보계 WCC 에큐메니칼 운동과 궤를 같이 하여 활동해 온 탓이다.

영국감리교회의 죽음의 과정은 최근에 동성결혼을 승인한 것에서 확인되었다. 구성원들은 혼란스러워 하고 그 교회를 떠나거나 조직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좌충우돌하고 있다. 영국감리교회는 구약성경, 신약성경, 예수께서도 금하는 것을 결행하고, 드디어 남자 사위 여자 며느리를 맞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신도들은 드디어 영국감리교회의 죽음이 현실이라는 것을 확실히 인식하고 있다.


2. 웨슬리의 복음적 신앙과 고교회주의

존 웨슬리(1708-1791)는 야외설교(field preaching)를 하면서부터 영국국교회와 갈등과 불화 관계에 들어갔다. 영국국교회는 “방법론자들”(Methodists)의 야외전도운동이 성공적으로 확대되고 추종자들이 증가하자 이를 못 마땅하게 여겼다. 웨슬리와 웨슬리 추종자들을 향하여 교회를 허문 광신주의자, 교회 규칙을 파괴한 분리주의자라고 비난했다.

웨슬리 추종자들은 독립교회 구성을 희망했다. 우여곡절 끝에 “방법론자들”은 1784년에 감리회(Methodist Society) 총회를 조직하고 법원에 등록하여 독립적인 법적 지위를 얻었다. 웨슬리는 영국국교회의 반대와 비난을 무릅쓰고 추종자들을 세례와 성찬을 행하는 성직자로 안수했다. 처음에는 5명에게 감리사(Superintendent)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는 감독(bishop)이라는 용어를 피할 목적이었다.

웨슬리는 자신과 같은 성직자에게 새로운 인물을 성직자로 안수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했다. 성경이 이를 금지하지 않는다고 했다. 웨슬리의 개인적인 성직안수는 영국국교회에서 분리를 확고히 했다. 그가 88세에 세상을 떠날 무렵, 감리회는 115개 구역, 300명의 순회목회자, 1,000명의 평신도 설교자들, 약 8만 명의 신도를 지니고 있었다. 당시 영국의 인구는 약 1천만 명이었다. 영국인 125명의 가운데 1명이 감리회 신자였다.

영국감리교회는 성경을 최종적인 권위로 여기는 신앙고백 위에 세워졌다. 웨슬리가 “세계는 나의 교구다”라고 한 1739년의 그의 편지는 성경을 근거로 자신의 행동을 다음과 같이 변호한다.

“나는 신앙이나 실천에서 성경이 말하는 법칙 이상 다른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 없다. 성경의 하나님이 나에게 무지한 자들을 가르치고 악한 자들을 개혁하고 덕 있는 자들을 격려하도록 명령한다. 사람이 이런 일들을 남의 교구에서 못하게 금지하지만, 나는 나의 교구가 없다. 그러므로 나는 온 세계를 나의 교구로 바라본다.”

웨슬리의 이 고백적 선언에는 교회조직에 충성하기 보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신념 그리고 자신의 내면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른다는 원칙이 담겨 있다. 이것은 그에게 절대적인 사안이었다. 영국국교회의 규칙은 상대적인 것이며, 따라서 이를 어기더라도 절대적인 것에 충성하겠다고 했다.

웨슬리는 복음의 본질적인 사역에 중대하고 긴급하다고 판단되는 사안에는 교회의 규칙보다 성경의 권위에 복종했다. 당시의 영국교회는 복음의 본질적 사역 수행에 실패하고 있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감리교인들은 영국국교회의 복음사명 실패가 감리교회 탄생을 불가피하게 만든 원인이었다고 본다.

웨슬리는 항상 자신을 고교회(high church) 구성원으로 간주했다. 감리교를 분리주의 집단이라고 하는 비판에 대하여, “우리는 분리주의자들이 아니다, 우리는 국교회에 충실하다”는 주장을 되풀이 했다. 그러나 웨슬리의 야외집회와 속회운동 그리고 감리회 조직은 교회의 외형적 분리의 씨앗이었다. 영국국교회는 로마가톨릭교회 형태로 예배를 드리는 영국국교회를 “고교회”(high church), 설교 중심으로 예배를 드리는 프로테스탄트교회를 “저교회”(low church)라고 한다.

웨슬리는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1789년에 영국국교회 “초대교회 다음으로 우리의 영국 국교회가 세계에서 가장 잘 만들어진 성경적인 교회라고 믿고 있는다”고 말했다. 자신은 “국교회의 모든 교리에 동의하고 예전과 성례전의 전통을 따른다”고 했다. 웨슬리의 고교회주의는 영국감리교회의 죽음 시점에 이 교회와 영국국교회의 통합을 모색하는 방향설정의 표지가 되고 있다.


3. 영국감리교회의 분열과 사회선교

웨슬리 사후, 영국감리교회는 독립 자유교회(free church)로 남아 사회의 도덕 개혁에 영향을 미치고, 남녀가 평등한 형제단으로 남고자 했다. 평신도 중심의 선교지향적인 교회와 복음주의적이며 성령의 은사공동체적 특성을 지닌 교회로 존재하다가 교회 분열시대를 맞이했다.

웨슬리 추종자들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분리했다. 웨슬리 시대의 부흥에 향수를 느끼면서 감리교 복음주의의 회복을 희망하는 그룹, “감리교는 아직도 살아 있다”(Methodism is still alive)라고 외치면서 부흥사들과 협력하여 천막부흥집회운동을 전개하는 그룹이 분리했다. 철야기도, 금식기도, 종일기도, 천막부흥회, 성령의 초월적인 역사와 개인의 회심과 중생을 강조하는 그룹, 신비주의 경향 때문에 나중에 감리교회 총회로부터 파문을 당한 그룹이 독자적인 교단을 설립했다.그 밖에도 많은 수의 감리교회들이 있었다. 단일신론을 고백하는 감리교회, 아르미니우스주의 감리교회 등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웨슬리가 시작한 감리회 총회는 웨슬리안감리교회(Wesleyan Methodist Chruch)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통계에 의하면 1850년의 신도 수는 약 40만 명이었다. 이 교회는 초기 감리교회처럼 강력한 복음주의 교회 모습을 유지했다. 산업화된 도시와 공장지대에서 부흥했다. 감리교 신자들은 가는 곳마다 복음전도와 사회선교를 조화롭게 실천했다. 아프리카, 아시아의 나라들에 교육, 의료, 박애운동에 집중하는 선교를 했다.

영국감리교회는 복음주의 전통과 사회활동을 병행하고 있었다. 그런다가 교회는 서서히 가난한 자들의 교회,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교회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구빈원(Poor House, Workhouse), 어린이 집, 박애운동, 노동운동, 구제운동, 고아원, 감리교학교, 감리교가정(Methodist Home), 사회사업과 봉사학교, 유대인 피난민 어린이를 돕기 위한 고아원, 어린이와 청소년 돕기 등의 활동이 번져갔다.

영국감리교회는 도덕개혁운동에 이바지했다. 산업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좋은 이웃이었다. 노동자의 노동환경, 고용조건, 인간대우 개혁을 이루었다. 노동조합운동, 동무들의 모임(Friendly Society), 절제회(Temperance Society), 성인교육운동, 노동조합(trade union)을 이끌었다. 그래서 19세기 영국감리교회의 여러 가지 사회운동들은 나중에 등장한 영국 노동당 형성과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영국감리교회는 20세기에 들어서서 가난한 노동자에서 중산층의 교회로 변모했다. 지도자들은 엘리뜨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교회는 대규모 교회당들을 건축했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감리교의 사회정치적 사상과 활동은 점차 웨슬리의 보수주의, 복음주의 노선에서 이탈했다. 진보주의, 자유주의 신학 노선으로 옮겼다. 말을 바꿔 탄 것이다.


4. 호사다마

교회의 초점이 바뀌면서 감리교의 속회운동은 점차 쇠퇴했다. 1900년 전후, 감리교 영성생활에 이상이 생기고, 규율이 약회되었다. 완전성화, 성결운동은 진행되고 있었지만 점차 성경과 전통적 신앙에 회의를 갖고 신도들 사이에는 웨슬리가 강조한 감리교 경건을 거부하는 움직임이 팽배해졌다.

영국감리교의 여러 그룹들은 1850년경부터 통합을 시작했다. 영국감리교회 신도는 약 10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되었다. 영국감리교회의 교세는 이 시기에 가장 강했다. 그리고 1932년경에도 나머지 감리교 그룹들이 추가로 통합에 가담했다. 신도수는 훨씬 더 증가했다. 영국감리교회는 큰 힘을 과시할 수 있었다. 런던의 웨스트민스터교회당과 마주보는 감리교중앙회관은 감리교의 위상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건물이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마귀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과 에큐메니컬 사상이 교회 안에서 진입하면서 영국감리교회의 과거의 복음적 감격이 사라지고 옛날의 위대한 선교정신은 약화되었다. 영국국교회와 맞서려는 긴장과 영혼구원의 열심을 잃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교인수는 급감했다. 약 100만 명이 훨씬 넘던 신도 수는 2000년경에 약 40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선교통계 보고서(Statistics for Mission)에 따르면 영국감리교회의 신도 수는 2014년에 약 20만 명이었다. 2018년의 신도 수는 17만 3천 19명이고 성직자는 3천 459명이다. 빈사상태에 빠진 이 교회 소유의 아름다운 감리교 채플(Chapel)들은 텅텅 비었다. 백발의 소수 노인들이 그 예배실을 지키고 있는 지경이다. 

한국의 예장 고신의 2015년 신도 수는 47만 2천 명이었다. 영국감리교회의 신도수는 예장 고신 구성원 수의 3분의 1 정도에 해당한다. 왜 100만 명 이상의 신도 수를 가졌던 영국감리교회가 급격히 퇴락했는가?

1960년대 이후 영국감리교회의 교인 수는 더욱 감소했다. WCC 에큐메니칼운동에 적극성을 보이던 시기였다. 교세약화와 함께 감리교의 정체성 문제가 대두되었다. 감리교회 신앙과 교리가 영국국교회의 그것들과 무엇이 다르며, 무엇이 달라야 하느냐 하는 질문이 제기되었다. 감리교 신학자들과 지도자들은 존 웨슬리의 고교회주의 정신을 상기시키면서 감리교의 독특한 사명은 18세기에 다 끝났다고 판단했다. 20세기에 감리교회가 독립적으로 존재해야 할 근본적 이유가 없음을 강조했다. 

감리교 신학자들은 교회를 감리교적 특징과 전통보다는 자유주의 신학과 궤를 같이 하는 WCC 에큐메니칼 신학으로 강화시켰다. 그 결과로 감리교의 복음주의적 특징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옛날의 뜨거운 복음주의 교회 전통을 상실했다. 성령의 은사운동이나 복음주의적 성향의 신자들은 침례교회나 오순절교회나 홀리네스교회 등으로 옮겨갔다.

WCC 에큐메니칼 정신 아래서 영국감리교회는 영국국교회와 통합을 추진했다. 1969년과 1972년에 통합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영국국교회의 감독들이 감리교회와 통합을 반대했다. 외형적으로는 모든 감리교회 목사들의 성직 안수를 인정할 수 없으며, 모두 다시 국교회 감독에게 안수를 받으라고 했다. 

교회통합을 반대한 진짜 이유는 감리교의 신학적 관용성이었다. 영국국교회 감독들은 감리교회의 자유주의 신학 또는 진보주의 신학 때문에 영국국교회조차 함께 추락할 것을 두려워했다.

영국감리교회의 교세가 급격하게 약화된 원인 가운데는 시대적이고 사회문화적 영향이 없지 않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원인은 교회 지도층이 너무 쉽게 그리고 신속히 진보주의 신학, 자유주의 신학, 에큐메니칼 신학 일변도로 나아갔기 때문이었다.


5. 성경으로 돌아가라

김진두 박사는 서울의 감리교신학대학교 총장으로 봉사하다가 현재는 목회를 하고 있다. 그는 “영국감리교회의 역사”라는 글에서 영국감리교회의 쇠락은 감리교 본래의 전통을 너무 쉽게 버린 것이 원인이었다고 지적한다(<한국감리교회와 역사>, 윤춘병 감독 팔순.성역 40주년기념논총, 서울: 감리교출판사, 1998).

김진두는 영국감리교회의 쇠락은 웨슬리의 고교회 정신에 기울어지면서 뜨거운 복음전도 정신과 복음적 사랑 실천의 열정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이 보다 더 중요한 까닭이 있다고 한다. “감리교 신학이 계시와 경험 중심에서 이성적 이해 중심으로 이동했으며, 감리교 메시지도 그 핵심적 주제라고 할 수 있는 ‘값없이 주시는 은혜’(free grace)에 대한 웨슬리안의 복음주의적 강조를 거의 다 상실”한 탓이라고 한다. 도덕적 낙관주의로 기울어지고, 웨슬리적 조화와 균형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영국감리교회는 20세기 후반부에 이르러 에큐메니칼 운동에 발맞추어 선교를 지나치게 사회적, 정치적, 인간화 일변도로 추진했다. 교회는 단순한 보통사람들의 영적인 관심을 소홀히 여기고 필요를 채워주지 못했다. 

20세기의 감리교 사회선교는 하나의 신학적 이데올로기로 변했다. 패러다임이 바뀌자 사회선교의 원동력인 복음적 신앙과 복음주의적 사랑이 사라졌다. 영국감리교회는 WCC 에큐메니칼 운동에 걸맞게 복음이 아니라 사회와 세상에만 관심을 가졌다. 웨슬리안들의 고유한 복음과 사회봉사의 균형과 조화를 잃었다.

그 결과는 불행한 것이었다.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영적인 관심과 복음적 배려 없이는 개인구원만 아니라 사회구원조차 어렵다. 교인이 없는 마당에 누가 개인구원과 사회구원 활동을 할 것인가? 거미줄처진 탄광처럼 썰렁한 교회당, 교인이 떠나가고 텅 빈 교회가 어떻게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가? 영적인 힘이 없고 사랑과 열심이 없는 기독인이 어떻게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는가?

김진두는 앞에서 인용한 글에서 “현재 영국감리교회의 희망은 영국교회와 통합하는 것 뿐인 것 같다”고 한다. 그리고 영국국교회와 “통합이 되든지 안 되든지 사는 길이 하나 있다. 그 길은 성서로 돌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읽고, 신앙을 재건축하고, 감리교회 처음으로 돌아가서 감리교의 신학과 예배와 선교 전체를 반성하고, 다시 존 웨슬리 같은 신앙체험과 뜨거운 복음적 사랑을 가지면, 하나님이 영국감리교회를 다시 그분의 도구로 쓰시리라 믿는다”고 한다.

앞에서 언급한 영국의 <크리스천투데이>(Christian Today)의 특종보도는 “감리교는 죽었다. 영국국교회는 아직까지는 목숨이 붙어 있다”(Methodism? Dead. Anglicanism? Not yet)는 영국감리교회가 동성 간의 결혼을 허용한 사안을 다룬 글이다.  2021년 6월 30일 버밍엄에서 모인 영국감리교회 총회는 신도들의 동성결혼을 허용하는 결정을 했다. 남자 며느리 여자 사위를 얻을 수 있도록 했다. 찬성 254, 반대 46으로 결정했다.

“감리교 안에서 [결혼]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해된다. 한 가지는 남자와 여자 사이의 결혼, 그리고 다른 한 가지의 결혼은 어떤 두 사람 사이의 결혼이다. 감리교는 두 가지 이해를 모두 확인한다.”

영국감리교회는 자신이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고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가진 교회라고 말하면서도 탈기독교적인 것을 허용했다. 영국감리교회 소속 캐롤린 로렌스 목사는 “오늘은 우리가 믿는 교리를 떠난 날이자 그 기준선을 그은 날이다” 하고 탄식했다. 

영국감리교회의 동성결혼 승인은 영국이 2013년부터 동성결혼을 합법화 한 것을 수용한 것이다. 영국감리교회는 국가의 정책을 따라 세속화의 수렁에 빠져들어 죽음을 맞이했다.


6. 방향감각의 상실

<크리스천투데이>의 위 글은 주필 데이비드 베이커가 쓴 것이다. 인셉션(Inception)이라는 영화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 영화에는 현실 전체가 우리 눈앞에서 휘어지고 무너지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 있다. 영국 감리교회가 결혼에 관한 새로운 성명서를 승인한 글을 읽었을 때 모든 것이 뒤틀리고 녹아내리는 것처럼 느꼈다. 당신도 이 글을 읽으면 나처럼 어지러움과 방향 감각 상실을 경험할 것이라고 한다.

베이커는 세상의 광기에 문제를 제기해야 할 교회가 오히려 그들과 결합하여 웨슬리가 상상하지 못한 상태에 이르렀다고 지적한다. 그는 웨슬리가 “사악함이 아무리 인기를 끌고 유행해도 여전히 그 특성을 잃지 않는다“(Vice does not lose its character by becoming fashionable)라고 한 말을 인용한다.

영국의 감리교회는 정말로 죽었는가? 베이커는 슬프지만 한마디로 그렇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교회가 결혼과 같은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주제에 대해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를 믿을 때, 그 교회는 성장은 고사하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스스로 분쟁하여 집이 설 수 없는 상태에 빠진다(마 12:25). 예수를 그리스도와 주로 고백하면서도 그 분이 가르친 것과 반대되는 것을 결정하고 따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베이커는 영국감리교회의 부활을 위해 기도하자고 제한하면서 웨슬리의 기도문을 인용한다. “하나님, 제가 결코 쓸모없게 살지 않게 하소서!”(God, grant that I may never live to be useless!). 영국감리교회는 부활할 수 있을까?

영국감리교회 안의 복음주의자들은 위 결정에 충격을 받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리고 있다. 교리적 유연성을 가진 감리교회 안의 복음주의자들은 영국국교회로부터 독립한 그룹(Anglican Mission in England)과 결합 가능성을 예측하고 있다.

한국의 WCC 회원교회들은 아직 동성결혼을 허용하는 결정을 하지는 않았지만 서서히 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듯하다. 장로회신학대학교 안에도 동성애에 관련된 학생들이 지탄을 받고 교회의 의심을 자아내는 교수들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예장 통합의 자매 교회인 미합중국장로교회(PCUSA)는 동성애자를 목사와 장로로 안수해 왔고, 2015년에 교회법으로 동성결혼을 허용했다. 게이와 레즈비언 등 동성애자들의 결혼을 인정하는 법안을 확정했다. 결혼에 대한 교회법의 “한 남성과 한 여성 간의 결합”이라는 정의를 “두 사람의 결합”으로 수정했다. 이 교회도 구성원들이 여자 사위, 남자 며느리를 맞이할 수 있다.

유럽의 여러 교회들이 동성결혼을 허용한다. 영국국교회는 아직 이를 통과시키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 교회의 성직자들은 동성결혼에 대한 관용을 촉구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미국의 여러 교회들도 동성결혼을 허락한다. 미국연합감리교회는 이 사안 때문에 보수교단과 진보교단으로 분리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 선교사들을 파송한 미합중국장로교회, 캐나다교회, 오스트레일리아연합교회도 결혼을 남녀의 결합이 아니라 ‘사람의 결합’으로 규정하여 동성결혼을 허용한다. 이 교회들은 모두 WCC의 회원교회들이다.


맺음말

왜 유럽과 북미의 교회들이 시류를 따라가는 강한 세속화 현상을 보이는가? 교회가 현대 진보적 기독교계를 풍미한 WCC 에큐메니칼 운동의 영향 아래서 포용주의, 신앙무차별주의, 다원주의를 수용했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도 일컬어지는 탈구조주의, 해체주의, 문화 마르크스주의라는 시류에 편승한 세속화의 결과이다. 이러한 시류의 중심에는 프랑스인 자크 데리다와 미셀 푸고의 해체주의 사상이 자리 잡고 있다.

성경은 남녀의 결혼(창 2:24)만을 허용한다. 동성애를 지탄한다. 영국감리교회는 공중의 권세 잡은 영과 이교에 굴복했다. 독일 카를스루에에서 모이는 WCC 제11차 총회는 2013년 부산에서 모인 제10차 총회가 장시간의 논란 끝에 극적으로 통과시키지 못한 동성애 지지 안을 받아들일 것으로 보인다.

자유주의 신학, 진보계 에큐메니칼 신학은 교회를 죽음으로 몰고 간다. 역사적 기독교에서 진보계 신학 또는 에큐메니칼 신학으로 신학패러다임을 바꾸면 교회는 죽음을 맞게 된다. 이것은 근거 없는 말이 아니다. 반골기질을 가진 자가 쏟아내는 선동 구호가 아니다.

한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세운 주님의 몸이다. “너희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WCC 따라가면 교회가 죽는다. 이 외침은 교회를 보호하려는 한 신학자의 애절한 권면이다. WCC와 진보계 에큐메니칼 운동을 받아들임은 죽음을 향한 행진이다.

 

최덕성 박사/ 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의학 교수

이 글은 BREADTV(빵티비)의 시리즈 영상강의 "WCC 바로알기 3"의 원고이고, 최덕성 박사의 리포르만다(크릭)에서 발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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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덕성 교수는 고신대학교, 리폼드신학교(M.Div, M.C.ED), 예일대학교(STM), 에모리대학교(Ph.D)에서 연구하였고, 고려신학대학원의 교수였고 하버드대학교의 객원교수였으며, 현재는 브니엘신학교의 총장이다. ‘신학자대상작’으로 선정된「한국교회 친일파 전통」과 「개혁주의 신학의 활력」,「에큐메니칼 운동과 다원주의」을 비롯한 약 20여권의 귀중한 신학 작품들을 저술하였다. 신학-복음전문방송 <빵티비>(BREADTV)의 대표이며, 온라인 신학저널 <리포르만다>(REFORMANDA)를 운영하며 한국 교회에 개혁신학을 공급하기 위해 정열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신학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