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바른 믿음을 매일 주목하고 있고 많은 신학적인 유익을 얻고 있는 중국 천진에서 소망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조춘선 목사입니다. 귀한 글들 많이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더 귀하게 사용하시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웨스트민스터가 능동을 키운다고요? 어데 있는데요?>라는 목사님의 글에 감리훈이라는 분이 댓글을 다셨던데, 그 분의 다음의 말에서 좀 헷갈리도 합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담이 영생으로 창조되었다면 아담은 영생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아담을 영생으로 창조한 하나님의 예정은 불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담의 선택에 의해 아담을 영생으로 창조한 하나님의 예정이 변경 된다면 이것은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요 또한 칼빈의 예정교리와 부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알미니안주의‘와는 부합합니다. 알미니안주의는 하나님의 예정 보다는 인간의 선택 (자유의지)에 우선권을 두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영생으로 창조되었다 하더라도 아담이 거부했기 때문에 아담은 영생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은 영생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담을 긍휼히 여기시어 영생의 기회를 주시고자 ‘선악과 명령’인 ‘행위언약’을 아담과 체결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선악과 명령을 어겼으며, 아담은 영생에서 탈락했습니다. 결국 아담에게 영생을 주지 않으시려고 작정한 하나님의 예정 때문에 아담은 영생에서 탈락한 것입니다. 선악과 명령을 통해 피조물인 아담은 선악과 명령을 지킬 수 없는 존재임을 하나님은 나타낸 것이고 인격적 피조물인 아담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에게 영생을 주시려고 하나님은 창세전에 작정하신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죄인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고자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속죄의 제사를 통해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행위언약을 능동순종과 연결시켜서는 안 됩니다. 아담이 영생으로 창조되었다면 아담에게 선악과 명령이 주어지지 않았으며 선악과 명령이 주어졌을지라도 아담은 선악과 명령을 지켜야만 합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필요 없고 기독론조차 존재할 수 없었겠지요.”

물론 저는 목사님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고신에서 신학을 하고 안수받았지만 능동적, 수동적 순종에 대해 명확한 정의가 안 되네요. 해답을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답변>
그 분의 주장의 성경적 타당성을 확인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이신칭의를 성경대로 깔끔하게 인정하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지금 당장 영원하고 완전한 구원이 영구하게 확증된다는 사실에 기꺼이 동의를 하지 않으십니다. “구원파처럼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단정하지 말고 바르게 살면서(율법준수도 하면서) 끝까지 가야지 구원이 확증된다”라는 생각을 가진 분입니다.

하나님이 믿음을 선물하여 주시면, 그 즉시 영원한 구원을 얻고 동시에 삶이 변하기를 시작합니다. 변화된 삶은 그 사람의 노력과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속을 적용하는 성령이 내주하심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변화가 동반되지 않는 구원은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얻는다”

“구원은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얻는다”

이 두 가지는 매우 유사해 보이지만, 하나는 성경적 구원신앙이고 또 하나는 로마교회, 웨슬리안 등의 행위구원론입니다. 행함은 참된 구원과 함께 나타나기를 시작하는 구원의 열매입니다. 열매없는 구원은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얻는다”라고 말하는 분들은 믿음과 행위의 합작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사고를 가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구원은 반드시 삶의 변화라는 열매를 동반하지만, 행함이 있어서 그 믿음이 구원에 합당하다고 인정 받아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의 강도와 같이 아무 행함이 나타나기 전에 죽는 사람도 하나님이 선물하신 믿음으로 확실하게 구원을 받습니다. 

행함과 믿음이 함께 역사하여 구원을 얻는다는 의미 안에서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신학을 가진 분들은 아담과 하나님 사이의 행위언약을 지지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담이 구원을 위해 행함으로 자격을 보였어야 했는데, 그리하지 못하여 구원을 얻지 못했다는 신학 구도를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창조 당시 아담이 하나님의 자녀도 아니었고, 영생과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누리는 상태가 아니었다는 주장은 다음과 같은 면에서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1>
영생도 주시지 않고 자기 자녀(백성)도 아닌 사람에게, 즉 장래가 어찌될지 모르는 지나가는 나그네 같은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자기의 왕국을 건설하고 발전시키라는 사명을 주셨을까요?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

자기 백성도 아니고 영생도 없는 곧 죽을 사람에게 무슨 복을 주셨다는 것인가요? 하나님 백성도 아닌 사람에게 왜 하나님을 대리하여 하나님의 피조 세계를 다스리라고 하셨을까요?


2>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자기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7)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 지난 세월 동안 신학자들이 논의했으나 속시원한 결론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격이 하나님의 형상과 가장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일반적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인격을 닮은 사람으로 아담을 지었는데, 거기에 영생이나 하나님 백성(자녀)의 특권은 빠졌을까요? 스스로 노력하여 영생과 하나님 백성의 신분을 얻어야 할 불쌍하고 위태로운 사람을 만드시고 나서 자기의 형상으로 존귀한 자기 백성을 창조하셨다고 성경에 쓰셨을까요?
 

3>
하나님께서 아담을 아들로 창조하신 후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그의 하나님이 되시고 아담도 영원히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으로 살자는 언약을 맺지 않았다면, 무슨 이유로 범죄하여 죽은 아담을 버리고 다시 흙으로 다른 사람을 만드시지 않고 기어이 아담을 살려서 자기 백성으로 회복하시려고 하셨을까요? 아담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다면 성자 하나님이 성육신하시어 아담 대신 죽으시고 그를 살리시는 이유가 설명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즐거이 창조하신 자기 백성과 영원한 언약을 맺으시지 않았다면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비록 아담은 배반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인격을 걸고 언약하신 것을 스스로 이루어 내신 것입니다.

 

4>
하나님이 아담에게 처음부터 영생을 주셨다면 아담이 그대로 영생을 이어갔어야만 칼빈의 예정사상에 맞다는 것은 억지스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자유의지와 함께 창조하실 때 이미 그가 얼마 못 가서 하나님을 배반하여 저주받을 것임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찬송하는 백성 가지시기 위해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 사람이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무대가 되도록 자연과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자기의 창조 목적을 스스로 이루시려고 이미 창조전부터 작정하신 것입니다. 아담이 타락할 것을 아담을 지으실 때 이미 아셨으므로 그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인 아담의 타락은 하나님이 작정하신 것이 아니고 그의 자유의지의 결과로서의 범죄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처음부터 아셨으므로 그리스도를 통해 그를 살려 기어이 자기 백성으로 삼아 창조의 목적을 끝내 이루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5>
누가복음 3장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족보상의 아버지와 조상들을 예수님으로부터 위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맨 나중에 아담이 나오는데 하나님이 아담의 아버지로 나옵니다. 아담은 자기를 찬송하는 백성 가지시기 원하신 하나님께서 자기의 아들(백성)로 창조하신 사람입니다.


6>
하나님 자녀로,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으로 창조된 아담에게 처음부터 영생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에덴동산의 생명나무는 왜 있었을까요? 생명나무를 뽑아서 고아 먹으면 영생이 생기는 것이었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 백성인 아담이 하나님 섬김을 즐거워하며 살면 그 영생의 상태가 영원할 것임을 약속하는 언약의 담보물이었습니다. 반대로 선악과는 아담이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언약을 파기하면 멸망당할 것임을 경고하는 언약의 상징이었습니다.     

 

행위언약은 이러한 진리를 들을 부정하므로 결과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파괴하는 능동순종, 회심준비 등의 거짓 복음을 낳았습니다. 행위언약 사상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으로 창조한 아담에게 영원히 하나님으로 남고, 아담도 영원히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으로 살겠다는 언약으로, 즉 성경대로 ‘옛 언약’으로 고쳐야 합니다. 아담의 범죄로 파기된 옛 언약을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다시 복구하였습니다. 그것을 성경은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렘 31:31)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 22:20)

청교도들에게서 시작된 행위언약-은혜언약은 성경을 바르게 설명하는 언약 신학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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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