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학 포럼’의 이희수 목사(총신 신대원 졸업)가 합동교단에서 진행한 WEA 공청회를 보고 쓴 소감문이다)

진리가 우선이냐, 하나됨이 우선이냐(WEA와 교류)의 문제인거 같습니다. 하나 됨이 우선이라고 하는 쪽에서는 지금까지 하나 되기 위해서 교회가 노력했던 많은 과거, 현재의 사례를 언급하며, 심지어는 신학적 선배들의 발언들까지 거론합니다. 그러면서 지금도 교류, 협력, 대화, 타협하고 하나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진리가 우선이라고 하는 쪽에서는, 이들도 물론 과거, 현재 사례와 신학적 선배들의 발언들을 인용하며, 그동안 진리 안에서 하나 되려고 노력했던 수많은 주체들이 지금은 얼마나 진리로부터 멀어져 갔는지를 피력하며 이제는 더 이상 이들과 하나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진리와 교회의 거룩성과 순수성을 부르짖습니다.

저는 후자 쪽에 서 있는 사람으로서 진리는 도외시하고 하나 됨을 강조하는 쪽의 허구와 문제점을 간단 간단하게 요약 정리하겠습니다.

첫째, 이들은 세상(일반은총의 세계)과 세상(죄와 악의 세계)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이 깃들고, 충분히 정제하고 걸러내면 수용하고 활용할 수 있는 세상과 아무리 백번 양보해도 결탁할 수 없는 세상은 엄연히 존재하고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런 균형과 조화를 가진다고 해서 우리가 이들의 평가처럼 신근본주의자나 분리주의자는 아닙니다.

둘째, 이들은 교리와 윤리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합니다. 교리와 윤리는 엄연히 다른 것입니다. 윤리에 흠결이 있다고 해서 교회는 이를 바로 내치지 않습니다. 모두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교리는 다릅니다. 진리를 부인하고 본질에 벗어난 교리를 가르치는 자를 성경은 ‘미혹하는 자’, ‘적그리스도’라고 명백히 정죄하고 있습니다 (요2:7~11).

셋째, 교회의 본질이 ‘진리 안에 하나 됨’이라는 인식의 부재입니다. 이는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합니다. 사랑에 대한 개념이 왜곡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흐트러집니다. 신론, 구원론, 기독론, 교회론, 선교론 등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됩니다.

넷째, 사람과 사상을 엄연히 구분해야 하는데, 이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사상을 부정한다고 사람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잘못된 사상과는 같이 할 수 없다고 하니까 이들은 마치 사람마저 부정하고 정죄하는 매정하고 사랑이 없는 자로 매도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다섯째, 종교개혁과 교회사 속에 나타난 신학적 논쟁은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신학적 논쟁으로 세워진 교리가 우리의 죄성과 불신에 대항하여 역사 속에서 하나씩 하나씩 진리를 보수하고 세워나간 교회의 점진적 산물이라면, 종교개혁은 역사 속에서 오랜 동안 축척된 악의 세력으로부터의 전면적이고 총체적인 지각변동이요 개혁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이 정죄한 로마가톨릭은 한마디로 악의 총합이요 악의 결정체입니다. 어찌되었든 로마가톨릭과의 직간접적 연합은 언어도단입니다.

여섯째, 흙탕물(알미니안, 은사주의 등)로 들어가려는 동생(감리회,성결교,순복음 등)을 그마나 긍휼한 마음으로 부여잡고(한교총 등으로) 있는 형(우리교단)에게, 동생이 더 큰 흙탕물(WCC, WEA)로 들어가려고 하니 형도 같이 들어가서 뒹굴어야하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는 식의 이들의 주장과 논리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며 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동생을 부여잡고 있는 것이지 흙탕물에 들어갈 생각은 추호도 아닙니다.

일곱째,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통해 진리를 더욱 강조하시던 때와 진리를 기반으로 교회와 사회와 국가 간의 연합을 허용하시던 때를 두셨습니다. 이러한 교회사적 교훈을 통해 우리는 이 시대를 분간할 수 있어야 하는데 오늘날 교회는 향방 없는 것같이 하고 허공을 치는 것처럼 합니다. ,리는 두 도성(두 시민권)에서 살아갑니다. 하늘의 도성과 세상의 도성. 이 두 도성이 가까워질 때와 멀어질 때가 있습니다. 멀어질 때는 더욱 진리로 무장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멀어질 때 연합을 말하는 사람이나 단체는 조금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여덟째, 진리 사수가 마치 분리주의자로 매도되고 있습니다. 유럽과 북미의 교회사를 볼 때 진리 사수를 위해 파생되었던 소수의 교단들에 의해 진리는 더욱 순수하게 보존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수 될 수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아홉째, 하나 됨을 강조하는 이들은 성경을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을 합니다. 이들이 자주 인용하는 고전 5:9-13의 방점은 10절,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13절,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쫓으라”에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 됨(소통, 대화, 교류)을 강조한 말씀이 아니라 진리의 거룩성을 담보하지 않는 교회는 있을 수 없다는 말씀으로 해석되는 것이 옳습니다.

열 번째, 이들의 결정적인 문제는 이들에게는 이런 문제가 문제로 보이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문구 하나, 표현 하나에도 문제의 심각성을 감지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와 같은 수많은 문제에도 이들의 눈에는 문제가 문제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보다 넓은 길을 걸어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는 WEA를 변호하는 목회자나 신학자들의 발언을 조금이라도 들어보거나 읽어보면 금방이라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들은 교회가 하나 되는 교리와 본질(공통분모)을 매우 협소하게 봅니다. 그저 몇 가지 교리만 충족하면 된다고 봅니다. 그리고 많은 부분을 아디아포라로 봅니다. 이러니 주요한 교리가 줄줄 세어 나가도 그 중요성과 위험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두서가 없었습니다만,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세상은 점점 다원주의, 해체주의, 진리상대주의로 치닫는 이때, 교회의 많은 이들이 교회의 선교와 사회운동을 걱정을 하며 교류와 연합을 통해 교회의 토착화, 상황화를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럴 때 일수록 교회는 이들의 모호성과 애매성을 잘 분간하여, 분별력 없고 회색분자 같은 목회자나 신학자를 통해 교회를 어지럽히려고 하는 사단의 궤계를 잘 구분해야겠습니다. 이럴 때 일수록 교회는 진리와 본질(일반은총과 영역주권을 포함)을 더욱 사수하는 일에 전심전력해야겠습니다. 그러할 때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진정한 (이들이 그토록 우려하는) 선교와 사회개혁이 이 땅 가운데 실현될 것이라 사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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