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죄와 죄책감의 문제로 늘 고통받아 왔다. 예수 하나님은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시고 죄인을 대신해서 심판받으셨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실재를 인정하지 않거나 또는 성경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을 만들어내어 죄와 죄책감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들이 있다. 그들이 뭐라고 말하는지 들어보자.
 

 

칼 G. 융

무신론자들이 ‘신의 죽음’을 선포하고 사르트르나 까뮈 등의 무신론적 실존주의자들이 인기를 끌고 있을 때 융과 같은 유신론적 실존주의자들은 신의 존재를 인정했다. 그는 "우리가 부르든지 부르지 않든지 신은 거기 계시다", “우리가 내면에서 하나님을 찾을 때 직접 체험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마치 기독교 편에 선 듯 보였다.

융이 신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그의 심리학이 신학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하는 신학자들이 있지만, 그러나 융이 언급하는 하나님은 성경 속의 하나님이 전혀 아니다. 융은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하나님 자신이 계시하신 성경을 읽은 것이 아니라 각종 신화와 종교를 연구하며 그 안에서 발견한 것을 하나님(신)이라고 이름했다.

융은 이집트, 인도, 중국의 신화들을 연구하며 인간이 본성적으로 종교적 존재로서 무의식 저변에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갈망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기독교 영지주의나 연금술 등을 연구하며 정신의 깊은 곳에서 종교적 기반을 찾아내고 그것이 구체적인 종교사상이나 제의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조사했다.

그의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종교적 본능 때문에 창조된 신이었다.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신이라면 완전함이나 경외심이나 절대순종이라는 것은 당연히 있을 수 없다.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낸 ‘사위일체의 하나님’에 대한 그의 주장을 들어보자 그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 만족할 수 없다고 보았다.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는 남성적 이미지로만 가득해서 그의 신성에 온전함이 없다는 주장이었다. 그래서 네번째 요소에 여성상을 개입하며 사위일체의 하나님이 만들어졌다. 로마가톨릭은 성경과 상반되게 마리아를 성모라고 칭하며 신적 권위에 올려두고 있는데, 융에 의하면 이것은 인간 본성의 요구에 의한 것이었다.

융은 심지어 하나님과 사탄을 동전의 양면처럼 보기도 했다. 그에 의하면 모든 인간에게는 남에게 안보이고 싶은 어두운 모습이 있는데 그것이 억압되면 무의식에 어두운 그림자가 되어 삶을 방해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림자와 말을 건네고 끌어안아 인식의 품으로 다가오도록 통합해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융은 인간의 이런 본성을 하나님에게까지 적용시켰다. 그는 하나님에게도 어두운 그림자가 있는데 그것이 사탄이나 악마라는 것이다. 융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인간보다 선이 조금 많으신 분일 뿐이다.

융의 아버지는 개신교 목사였는데 이런 궤변이 어떻게 나왔을까 질문해 볼 때, 유령과 대화를 하는 등 정신병과 신비주의를 오갔던 어머니에게서 영향받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융은 어린 시절부터 지하세계의 신에 대한 꿈을 꾸며 지냈다. 예수회 신부를 만나면서 신에 대한 개념은 더욱 어둡고 왜곡되었다. 그는 하나님이라는 용어 대신 ‘성스러운 존재’(numen)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그와의 개인적이고 신비적이고 직접적인 관계를 추구했다.

융의 심리학은 현대 신학과 교회에 크고 악한 영향을 미쳤다. 성경을 실존론적으로 해석하려는 불트만이나, 문화의 신학을 내세운 틸리히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면서 성경에서 벗어난 현대 신학들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또 기독교 심리학은 성경과 융의 심리학을 혼합해 가르치며 ‘영성’이라고 이름하기도 한다. 기독교 심리학의 변상규 교수는 융의 추종자로서 “기독교는 사람이 만들었기에 불완전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님이 만드셨기에 완전하다. 그 삶을 살아가는 기독교인이 불완전할 뿐이다.
 

 

헤르만 K. 헤세

소설가 헤르만 헤세는 동일한 시대와 공간을 살았던 융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특히 그의 걸작으로 알려진 소설 <데미안>에서는 선과 악에 대한 융의 사상을 읽을 수 있다.

주인공 싱클레어는 선을 추구하고 악을 버리는 것이 당연하다는 기독교적 환경에서 살아왔으나 사춘기에 들어가면서 선과 악에 대한 문제로 고민하며 갈등을 겪게 된다. 그때 신비로운 인물인 데미안이 나타나 그에게 벗어나야 할 세계, 파괴해야할 것에 대해 이야기해 준다. 그가 벗어나고 파괴해야 할 것은 선과 악을 흑백으로 구분하는 고정관념이었다. 그것은 고리타분한 기독교의 가르침으로서 그것에 머물고 있는 한 아직 부화되지 못한 알 속의 새끼와도 같은 것이다.

“새는 알에서 빠져나오려고 노력한다. 그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의 곁으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헤세는 선을 추구하면서도 악에 대한 욕망을 억제할 수 없으면서 선과 악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시달렸다. 그는 상호모순된 양가적 감정으로 인한 내적갈등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아프락사스라고 이름하는 신을 창조해 냈다. 아프락사스는 선과 악,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 하나님과 악마를 결합하는 상징적 의미의 신이다. 이것은 절대 선과 절대 악이라는 이분법으로 나누어 하나의 세계에 속해야 한다는 생각을 거부하는 그의 생각을 담고 있다. 악마를 하나님의 그림자라고 말했던 융의 사상과도 아주 닮아있다.

융과 헤세는 성경 속의 고리타분한(?) 하나님은 거부하고 새로운 신을 만들어 그들만의 천국을 꿈꾸며 새로이 도래할 신 시대에 희망을 걸었다. 그들의 염원은 살아 생전에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사후에 히피사회를 중심으로 뉴에이지 운동을 일으켰다.

융과 헤세는 인간이 선과 악의 양면을 갖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도 그렇게 파악했다. 그들의 사상을 동조하는 사람들은 절대 선과 절대 악, 하나님과 악마를 확고하게 구분하는 기독교를 폭력적이라고 비난한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나의 종교만 옳고 나의 세계관만 정당하다는 잘못된 사고는 선으로 악을 깨부수어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져서 수많은 전쟁이라는 폭력을 불러 일으켰다. 반기독교는 이런 논리를 지지하면서 절대 선과 절대 악의 존재를 부정한다. 하나님도 사탄도 없다는 것이다.
 


성철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지독한 극기수련으로 인해 유명한 성철은 한국불교 뿐만 아니라 세계불교에서 가장 존경받는 스님 중의 하나다. 그는 평상 시에 하나님과 악마를 하나로 보는 설법을 해서 많은 사람들을 의아하게 했는데, 융이나 헤세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 같이 꼭 닮아 있다. 조계종의 <큰빛총서>와 조선일보에 기록된 그의 설법 일부를 들어보자.

“사탄이여! 어서 오십시요. 나는 당신을 존경하며 예배합니다. 당신은 본래 거룩한 부처님입니다. 사탄과 부처란 허망한 거짓 이름일 뿐 본 모습은 추호도 다름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당신을 미워하고 싫어하지만 그것은 당신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부처인줄 알 때 착한 생각 악한 생각 미운 마음 고운 마음은 모두 사라지고 거룩한 부처의 모습만 뚜렷이 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악마와 성인을 다같이 부처로, 스승으로, 부모로 섬기게 됩니다…”

부처가 사탄이라는 그의 설법에 대한 어떤 불교인의 해석을 들어보자.

“선과 악으로 모든 것을 상대할 때 거기에서 지옥이 불타게 됩니다. 선과 악의 대립이 사라지고 선과 악이 융화상통할 때 시방세계에 가득히 피어있는 연꽃을 바라보게 됩니다. 연꽃마다 부처요 극락세계 아님이 없으니 이는 사탄의 거룩한 본 모습을 바로 볼 때입니다… 이 얼마나 거룩한 진리입니까?”

그러나 성철은 임종 즈음에 자신이 평생 거짓말로 수많은 사람들을 잘못 인도했다는 고백을 했다. 그는 거짓말을 최상의 진리인 줄 알고 평생을 속아서 살아왔다. 자신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을 거짓말로 인도하며 지옥에 떨어지게 했다. 속고 속이는 거짓말이 한없이 이어질 것이니 그 엄청난 죄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어느 날 푸른 산에 걸려 곧 떨어질 붉게 불타는 석양을 바라보며 자신이 가야 할 불지옥을 생각했다. 회한으로 몸부림치던 그는 천추의 한을 이렇게 토로했다.

“내 죄는 수미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데 내 어찌 감당하랴. 내가 80년 동안 포교한 것이 헛것이로다. 우리에게는 구원이 없다. 죄 값을 해결할 자가 없기 때문이다. 필히(54년을 단절하고 살다가 임종 시에야 찾게 된 외동딸)야, 내가 잘못했다. 내 인생을 잘못 선택했다. 나는 지옥에 간다.”

운명하기 직전에는 영안이 열려서 지옥에 있는 석가를 보며 이런 시를 읊었다.

“석가는 원래 큰 도적이요, 달마는 작은 도적이다. 서천에 속이고 동토에 기만하였네. 도적이여 도적이여! 저 한없이 어리석은 남녀를 속이고, 눈을 뜨고 당당하게 지옥으로 들어가네. 한마디 말이 끊어지니 일천성의 소리가 사라지고, 한칼을 휘두르니 만리에 송장이 즐비하다. 알든지 모르든지 상신실명을 면치 못하리니, 말해보라 이 무슨 도리인가. 작약꽃에 보살의 얼굴이 열리고, 종녀잎에 야차의 머리가 나타난다. 목위의 무쇠간은 무게가 일곱근이요, 발밑의 지옥은 괴로움이 끝없도다. 석가와 미타는 뜨거운 구리 쇳물을 마시고, 가섬과 아난은 무쇠를 먹는다. 몸을 날려 백옥 난간을 쳐부수고, 손을 휘둘러 황금 줄을 끊어버린다. 산이 우뚝우뚝 솟음이여 물은 느릿느릿 흐르며, 잣나무 빽빽함이여 바람이 씽씽 분다. 사나운 용이 힘차게 나니 푸른 바다가 넓고, 사자가 고함지르니 조각 달이 높이 솟았네. 알겠느냐? 1 2 3 4 5 6 7 이여. 두견새 우는 곳에 꽃이 어지럽게 흩어졌네… 억! ”

성철의 고백을 들으며 불교의 가르침에 회의적이었던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떠나 기독교로 개종했지만, 여전히 불교에 머물러 성철의 유언을 거짓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들은 성철이 단지 “참선 잘 하거라”는 유언을 했을 뿐이며 위의 모든 말은 기독교가 악의적으로 꾸민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는 성철이 이렇게 유언한 것은 사실이지만 기독교가 잘못 해석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오직 구원받고 천국에 가기 위해 목 매달고 있으므로, 불보살들이 지옥에 가는 이유를 죽었다가 깨어나도 깨닫지 못한다고 조롱한다. 불보살들은 곧바로 성불(부처가 됨)할 수 있지만, 지옥에 있는 중생들을 한명도 남김 없이 구제할 때까지 지옥을 떠나지 않겠다고 발원했다는 것이다.

중생을 구원하기 위해서 지옥까지 갔다고 하니, 그야말로 구원주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히 모방하고 있다. 자신의 죄 때문에 지옥에 가서 상상할 수도 없고 감당할 수도 없는 형벌과 고통을 받고 있는 불교 지도자들이, 무슨 능력으로 지옥의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겠다는 것인지 상상력과 착각이 대단하다.

성철의 명백한 교훈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교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은 차마 사실을 바로 보고 인정할 용기가 없는 사람들이다. 여지껏 인생을 바쳤던 것이 거짓말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지옥을 선택하겠다는 것이다.

지인인 윤선교사님은 티벳에서 서열2위인 고승을 만나 전도할 기회가 있었다. 그가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자 고승은 불교에는 진리도 구원도 없음을 진작 알았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평생동안 불교를 가르치면서 수많은 추종자들이 따르고 있는데 이제와서 저들을 배신할 수 없다며 고개를 푹 떨구고 돌아섰다고 한다. 진실을 알고도 돌이키지 않았다니, 한없이 어리석고 가장 저주스런 인생이 아닐 수 없다.

가상화폐의 사기극으로 한 가정이 10억원을 손실당한 사례가 기사화되었다. 가상화폐를 소개하는 설명회가 열리는 자리에 어떤 피해자가 전단문을 가져와 설명회에 들어가려는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사기에 속지말라고 하소연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의 경고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저들은 재산이 사기당할꺼라는 ‘듣기싫은’ 소리보다는, 앉은 자리에서 당장 3배의 이익을 보게 해준다는 ‘듣기좋은’ 소리가 진실이라고 선택했다. 그들은 결국 사기당하고 경고를 듣지 않았던 것에 땅을 치며 후회했다.

복음

하나님은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고 말씀하신다. 모든 인간은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죄를 지으면서 불행이 시작되었다. 인간은 사탄에 미혹되어 죄를 짓지만, 그러나 예수 하나님은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처벌을 받으셨다.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모든 죄가 용서받으며 죄책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다고 말씀한다.

한편 반기독교는 인간이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기독교가 마음대로 인간을 죄인이라고 정죄해놓고 예수가 아니면 죄를 용서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며 기독교를 강요한다고 비난한다. 죄책감은 기독교의 가장 강력한 무기 중의 하나가 되었으며, 죄책감이 미흡하다고 생각되면 비난, 훈계, 주입 등을 통해서라도 죄책감을 조장하고 두려움으로 몰아붙여 강압한다는 비난이다.

사람들은 의식적으로는 죄인임을 부정하면서도 무의식 속에서 늘 죄의 무거운 짐을 지며 살고 있다. 융이나 헤세는 선과 악, 하나님과 악마를 하나로 묶은 제3의 신을 창조해 내면서 이런 갈등과 고통을 해결해 주려고 했다. 그렇게 하면서 그들은 스스로 알지 못한 채 사탄의 편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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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옥 선교사는 서강대에서 신문방송학, 산호제바이블컬리지에서 신학, 산호제주립대대학원에서 소셜웤을 전공했다. 서울과 산호제에서 다년간 직장을 다녔고 산호제에서는 교회에서 전도사로도 일했다. 현재는 예수님과 성경과 기독교에 대해 세상이 갖는 수많은 오해들에 대해 답변하며 인터넷을 통해 전도하고 있다.
저서 <예수신화?예수실화!>는 성경은 신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안목에서 기록된 역사서며, 예수님은 성인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변증한다. <시대읽기>는 기독교를 왜곡하거나 혼합해서 파괴하려는 반기독교적 세상의 정체와 그것의 반인륜적인 역사를 폭로한다. 이들 내용을 요약하고 추가해서 <예수는 실화다>와 <성경적 시대읽기>를 다시 출간했다. 최근 출간된 <다시살다>에서는 그리스도인이 된 개인 이야기를 간증한다. 번역서로는 <당신은 괜찮습니까?>와 <회복프라소>가 있는데 성경적 회개와 용서와 예수 안에서의 치유와 회복을 주제로 한다. joookkim@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