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당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킨 로마교회는 자신들의 교리를 확증시키기 위해 성경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그리고 상황적으로 적용시켰다. 이에 칼빈은 이들의 가증스러운 행위들을 미친개들, 아니면 협잡꾼들로 비난하였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 신학의 현장에서 같은 행위들이 자행되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순종을 능.수동적으로 나눈 것이 마치 성경적이며, 전통적 개혁주의신학처럼 주장하는 것이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능.수동적인 순종이 (성경에서 말하는) 개혁주의 전통의 가르침인가?

최근에 온라인에서 강의한 교수들의 아주 미련하고 어리석은 주장을 볼 때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수동적 순종이 언제 나타났는지? 그들에게 묻고 싶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도 없는, 다시 말해 장로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능.수동적 순종을 마치 전통적 개혁교회가 가르친 것처럼 말하는 자들은 개혁교회의 역사를 전혀 모르고 하는 주장임이 분명하다.

1658년 영국의 사보이 궁에서 만들어진 사보이 선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능.수동적 순종이 언급되었다. 웨신서가 만들어진 과정에서 장로교회파 청교도들과 회중교회파 청교도들 사이에 어떤 종류의 협상과 양보가 있었던 것을 중요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회중교회파 청교도들은 장로교회파들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대한 불만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만족스럽게 인정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아주 어리석은 질문을 하나 던진다. 왜 웨민고백서를 작성하고 이후에 다시 사보이 선언이라는 자신들만의 신앙고백서를 만들었는가? 그들이 웨신서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코틀랜드 장로교에서는 사보이 선언에 참여한 회중파를 분파주의자들로 정죄하였다.

칼빈은 분파주의자들을 악한 자들이라고 말하였다. 사실 프랑스 개혁교회는 로마교회로부터 엄청난 핍박과 박해를 받고 있을 때 회중정치를 주장하는 자들이 나타나자 단번에 그들을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회중교회가 많아지고 회중교회 목사들의 세력이 커지면서 장로교회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회중파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수동적 순종은 장로교의 가르침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장로교 목사들이 능.수동적 순종을 주장한다면 자신들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필자는 장로교 목사로서 당연히 회중파의 가르침을 받지 않는다. 장로교의 표준문서로 제정된 3개의 문서만으로도 성도들을 바르게 가르칠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대.소요리 문답서)

백번 양보하여 회중파의 능.수동적 순종을 인정한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의 모든 조항에 순종하여 율법의 의를 획득하고 자신도 의로워지고 영생의 권리를 가지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자는 분명 이단이 아니고 무엇인가?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의를 얻기 위해 율법에 순종하였다고 가르친 적이 없다. 오히려 성경은 율법이 요구하는 저주를 자신의 몸으로 다 이루었다고 가르친다.

합동 이대위가 능동순종을 주제로 세미나하는 모습(강사, 서철원 박사)
합동 이대위가 능동순종을 주제로 세미나하는 모습(강사, 서철원 박사)

 

뿐만 아니라, 율법으로는 의를 얻지 못한다고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증거하고 있다. 바울은 율법이 능히 살게 하지 못한다고 증거한다. 만약 살게 하는 율법을 주었다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고 증거한다. 다시 말하면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성경 말씀에서 확연하게 증언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에 순종하여 의를 이루었다고 하는 것을 주장한다면 이것은 분명 마귀의 역사가 아니고 무엇인가?

어리석고 무지한 자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역사적 개혁교회의 가르침을 보면 더 쉽게 알 수 있다. 칼빈의 친구였던 파렐은 자신의 제네바 신앙고백서에서 7항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첫째로, 본시 하나님의 원수로 그의 진노와 심판을 받아 마땅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로 그와 화목하고 그의 은혜로 용납되는 것을 인정하는 바 이는 그의 의와 순결함 안에서 우리가 우리 불의의 사함을 얻고 그의 피 흘림으로 우리가 우리의 모든 흠에서 정화되고 깨끗해지기 때문이다.”(칼뱅작품선집2. 박건택 저. 397p).

(능.수동적 순종을 주장하는 자들은 “그의 의”라고 하는 부분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지킨 의라고 할 것이다.)

개혁주의 신학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는 다름 아닌 그분 자체가 의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분이 인간으로 오셨지만 죄가 없고 의롭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예수 그리스도가 의 자체이시면서 율법의 의를 획득하였다고 그렇게 주장할 것인가?

최근에 어떤 신학자는(능.수동적 순종을 주장하며 계약신학대학원에서 가르치는 교수) 웨슬리가 칭의론에서 칼빈은 죄용서에 대한 것을 말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글을 읽고 너무나 황당하였다. 왜냐하면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어지는 의를 칭의라고 하며 죄사함이 또한 칭의라고 기독교강요 3권에서 아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죄사함이 칭의이다. 죄인이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의이다. 그리고 죄를 사함 받는다. 율법을 지켜 완전한 죄를 사함 받는다고 성경에서 가르친 곳이 단 한 곳도 없다. 구약에서 불완전한 제사제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에 드린 제사로 완전하게 되었다. 어린양의 피 제사로 완전히 죄가 사함을 받는다. 이것을 믿어 의롭게 되는 것이다.

계속해서 자신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역사적 개혁교회의 가르침에서 능.수동적 순종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는 스위스 일치신조 (헬베틱신조1675) 제15조와 제16조를 보길 바란다. 물론 그들은 이 신조일치 제15조를 능동적 순종의 가르침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이들은 마구잡이 식이다.

“제15조 :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예정하신 대신에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 속죄에서 의로움과 순종에 대한 성부 하나님의 평가 기준을 만족시키셨고, 그리스도께서 온 생애동안 율법의 기준에 맞추어 종과 같이 행하신 모든 일과 고통은 순종으로 부르기에 마땅한 것이었다. 사도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생애는 순종, 겸손, 끊임없는 자기 비움,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스스로 낮아지심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빌 2:8).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편에 서셔서 그의 지극히 거룩하신 삶을 통해 율법의 요구와 하나님의 정의를 충족시키시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희생뿐만 아니라 율법에 대한 그리스도의 모든 삶을 대가로 우리를 구속하셨다는 점을 성령께서는 분명히 선언하셨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오직 고난을 통하여 완성하실 수 있었던 죽으심 또는 보혈이 우리를 구속하셨음도 밝히셨지만, 그리스도의 삶을 그 명칭에서 표현되는 최후의 확정적이고 복되지 않은 죽으심의 과정과 구분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능.수동적 순종주의를 주장하는 자들은 이 부분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에 순종하여 구원을 주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아주 무식한 주장이다. 율법의 기준과 율법의 요구, 그리고 율법에 대한 그리스도의 모든 삶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율법 아래에서 나시고 율법의 저주와 요구를 다 이루셨다고 하는 것, 즉 그리스도의 비하의 절정을 의미하는 총체적인 의미인 것이다. 그렇다면 바로 다음에 나오는 제16조에서 언급하고 있는 능,수동적 순종의 견해가 얼마나 해악적인지를 지적하는 것에 대해서는 왜 침묵하고 있는가?

분명히 말하자면, 율법에 순종하였다고 언급하지만 예수님께서 율법의 의를 획득하여 자신도 의롭게 되었다고 하는 가르침은 그 어디에서 찾아 볼 수 없다.

“제16조 : 이 모든 전체적인 맥락을 볼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를 보내신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이 그리스도께서 믿음이라는 조건을 갖춘 개인과 그들 모두를 위하여 죽으시는 것이었다는 (우리와) 반대되는 신조를 승인할 수 없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모두를 위하여 구원을 획득하셨지만 모두에게 적용되지 않을 뿐이고, 그리스도의 죽음은 구원과 믿음을 개인에게 획득하게끔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에 접근하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제거하였을 뿐이며,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 아버지께 다다를 수 있는 은혜의 새 언약으로 들어갈 자유를 얻게 하셨다는 가르침도 승인할 수 없다.

그들은 마침내 그리스도의 능동적이고 수동적인 의를 구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능동적인 의를 그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시는 반면 택하신 자들에게는 수동적인 의를 제공하고 전가하신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 모든 견해들 및 이와 유사한 견해들은 성경이 분명히 제시하고 있는 바와, 우리 믿음과 구원을 시작하시고 완성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에 배치된다. 그 견해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효과 없는 것으로 만들며, 그리스도의 공로에 대한 찬양을 실제로 약화시킨다.”

이 신조에서 능.수동적인 순종의 구분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사역의 효과를 무력화시키는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맞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속죄사역을 다 이루었는데 왜 율법을 지켜 의를 획득하여 얻은 의를 백성들에게 준단 말인가?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능.수동적인 순종을 통해 성도가 구원 받는다고 하는 것을 가르치는 자들을 우리는 용납해서는 안 된다. 대한 예수교 장로회 합동 교단의 이단대책위원회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휩쓸리면 안 된다. 오직 성경만이 그 기준이고 판단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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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남 목사는 임진남 목사는 총신신대원(M.Div)에서 공부한 합동교단 소속 목회자이다. 2012년에 김제예본교회를 개척하여 담임하고 있고, 칼빈주의 개혁교회를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와 종교개혁의 위대한 유산인 신앙고백서들 가지고 성도들을 온전하게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개혁신학 연구에 특별한 관심과 소명이 있어 서철원 박사와 함께 신학연구 모임을 진행하는 ‘한국개혁신학연구원’의 총무로 섬기고 있고, 저서로는 설교집 <다니엘이 증거한 복음>, <엘리야가 증거한 복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