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04 03:25 (목)
청교도운동의 결론은 이단 회중파에 의한 장로교회 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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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운동의 결론은 이단 회중파에 의한 장로교회 말살
  • 정이철
  • 승인 2021.02.17 10: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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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이전에 청교도들은 회중교회를 세웠는데, 회중교회는 이단 정죄를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왜 회중교회는 이단인가요? 언제 개혁교회가 회중교회 사상을 이단으로 정죄했습니까? 그런 내용의 정확한 근거를 알려주십시오.

 

답변>
17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청교도 운동의 열매는 매우 이단적이었습니다. 그들의 열매는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개혁교회가 일찍 이단 사상으로 규정한 회중주의(회중교회)이고 또 하나는 사도 바울이 저주 받을 이단사상으로 선언한 율법주의입니다.

오늘은 회중주의(회중교회)에 대해서만 설명하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회중교회(회중주의)가 개혁교회로부터 이단으로 규정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1562년 프랑스의 모렐리(Jean Merely)라는 사람이 자신의 저술 <기독교의 권징과 정치 제도에 관한 논문>(Treatise on Christian Discipline and Policy)에서 프랑스 개혁교회의 정치 제도가 비성경적이라고 비판하였습니다.(양신혜, <베자, 교회를 위해 길 위에 서다> (익투스, 2020), 324). 모렐리는 각 지역의 교회들에게 더 많은 자유와 자율성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교회의 통치의 주최는 교회의 회중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때 모렐리가 주장한 내용이 역사상 최초로 나타난 회중교회론(회중교회주의)였습니다. 모렐리의 회중교회 사상은 칼빈이 제네바 시에 설립한 ‘컨시스토리’(당회, 도시 전체의 당회) 제도와 교회 공의회 제도를 부정하는 심각한 주장이었습니다(앞의 책, 325). 모렐리의 회중교회 사상이 확산되어 프랑스 개혁교회 목회자들이 혼란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1562년 프랑스의 오를레앙 지역 노회가 모렐리의 그 사상이 “교회에 혼란과 분열을 가져오는 사악한 교리”(앞의 책)라고 판정하였습니다. 

모렐리에게 제네바 컨시스토리(제네바 당회)에 출두하여 조사 받으라는 명령이 떨어졌는데, 모렐리는 도주하였습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출두 요구에 순응하고 조사받았고 결국 후 파문당하였습니다(앞의 책, 326).

당시 컨시스토리는 칼빈의 후계자 베자에게 모렐리의 위험한 주장을 시의회에 보고하여 형사적 제제를 가하도록 촉구하는 일을 맡겼습니다. 시의회는 베자와 다른 몇 사람들의 권고를 따라 모렐리를 이단으로 규정하였습니다. 그의 책을 모조리 수거하여 불태웠습니다. 그의 주장에 동조한 사람들도 소환하여 엄히 문책하고 제네바 시로부터 영구히 추방하였습니다(앞의 책)

프랑스 개혁교회 선조들이 회중교회 사상을 이단으로 판정하고 관련된 모든 자료들을 불태운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교회는 민주주의 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성경에 기초한 신본주의를 시행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회중교회 사상은 교회를 한 회중이라고 봅니다. 하나의 회중인 교회는 외부의 통제를 받지 않고, 내부의 소수의 사람들의 통치도 받지 않고, 전체 회중이 교회를 스스로 다스리고 통치하는 민주주의적인 곳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단적인 사상입니다. 

신약의 사도들은 교회가 교인들 모두에 의해 스스로 통치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교회는하나님으로부터 적합한 은사를 받은 성숙한 지도자에 의해 성경에 기초하는 통치를 받아야 한다고 사도들을 가르쳤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개척한 후 반드시 합당한 자를 장로(감독)로 선출하게 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자신을 신약 교회를 설립하는 직분자인 사도이고, 동시에 교회를 다스리는 장로라고 소개하였습니다.

개혁교회는 그러한 성경의 가르침을 따릅니다. 합당한 은사와 성숙성을 가진 사람을 교인들이 목사(장로, 감독)로 청빙하고, 그로 하여금 교회를 다스리는 것이 합당하고 성경적이라고 가르칩니다. 

개혁교회의 신학을 바르게 계승하는 장로교회는 프랑스 개혁교회의 본을 따라 회중교회 사상을 매우 경계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청교도주의에 푹 빠져있는 한국의 장로교회 목회자들은 회중교회주의자들을 가장 존경하고 경배하고 있습니다. 그들 모두가 프랑스 개혁교회 선조들이 이단으로 규정한 회중교회주의자들이었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아무렇지 않게 여깁니다. 다음과 같은 유명한 사람들입니다.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
윌리엄 에임스(william Ames, 1576-1633)
폴 베인즈(Paul Baynes, 1573-1617)
리처드 십스(Richard sibbes, 1577-1635)
존 코튼(John Cotton, 1585-1652)
존 프레스톤(John Preston, 1587-1628)
존 오웬(John Owen, 1616-1683),
리챠드 백스터(Richard baxter, 1615-1691)
토마스 굿윈(Thomas Goodwin, 1600-1680)
존 하우(John Howe,1630-1705)
스티븐 차녹(Stephen Charnok, 1628-1680)
존 번연(John Bunyan, 1628-1699)
토마스 왓슨(Thomas Watson, 1620-1686)
토마스 브룩스(Thomas Brooks, 1608-1680)
메튜 폴(Matthew Poole, 1624-1679)
토마스 맨톤(Thomas Manton, 1620-1677)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

 

청교도운동은 결국 회중파들이 잉글랜드의 장로교회파 청교도들과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를 말살하고 회중교회 시대를 만들고 끝났습니다. 북쪽 스코틀랜드에는 이미 1560년대에 존 낙스를 통해 장로교회가 튼튼하게 세워졌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청교도 운동을 한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장로교 운동을 했습니다. 그들의 역사가 청교도 운동 역사에 들어가게 된 이유는 국왕 찰스 1세가 장로교회를 멸하고 국교회를 강요하니, 어쩔 수 없이 국교회와 싸우는 남쪽의 청교도들과 힘을 합하였기 때문입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별명을 굳이 말한다면 청교도가 아니고 ‘언약도’입니다. 1638년 찰스 1세가 장로교회를 버리고 국교회를 수용하라고 강요할 때, 전 국민이 들고 일어나서 하나님께 장로교회를 지키겠다고 스스로 언약했습니다. 그때부터 그들의 별명이 언약도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국교회를 강요하는 찰스 1세의 군대와 싸울 때 그들만의 ‘언약도 깃발’을 들고 싸웠습니다.
 

스크트랜드 장로교회 군대가 실제로 사용했던 '언약도' 깃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군대가 실제로 사용했던 '언약도' 깃발


스코틀랜드는 회중교회파 청교도 크롬웰 장군과 그의 회중교회파 청교도 병사들로 구성된 군대에 의해 두 세 번이나 수도가 점령되었습니다. 국왕 제도에 대해 서로 뜻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회중교회파 청교도들은 처음부터 국왕을 없애고 공화정을 수립하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칼빈의 사상을 따라 장로교회를 인정하는 조건하에 국왕이 존속하기를 원했습니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국왕을 세우려고 하자 크롬웰 장군은 자신의 군종목사 존 오웬과 함께 회중교회파 청교도 병사들로 구성된 군대를 몰고 스코틀랜드로 진격하여 수도 에딘버러를 두어 번 점령해버렸습니다. 그때가 1640년대 말부터 1650년대 초였는데, 그때부터 1680년대 말 명예혁명 때까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사실상 말살되었습니다. 

그 이전에 남쪽 잉글랜드의 장로교회 운동도 회중교회파 청교도들에 의해 말살되었습니다. 1640년대 말 국교회 군대가 청교도 군대에 패하고 찰스 1세가 포로되었을 당시 그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전쟁이 끝났을 때에 막강한 군권을 소유하고 있는 회중파 신자 크롬웰 장군이 최고 실권자로 부상했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의 모든 중요한 일들을 결정하고 추진했던 사람들은 의회의 장로교회파 청교도 의원들이었습니다.

둘 사이에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가장 예민한 문제는 국왕의 존속 여부였습니다. 장로교회파 의원들은 칼빈의 사상을 따라 장로교회가 인정되면 국왕의 존속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국왕 제도를 영구히 없애기를 원하는 회중교회파 청교도들은 타협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특히 회중파들은 장로교회파들에 의해 장로교회 제도가 대세가 되어 자신들에게 강요되는 것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회중파 크롬웰 장군과 그의 회중교회파 청교도 군대는 잉글랜드 의회를 두 차례 점령하여 장로교회파 청교도 의원들을 몰아냈습니다. 장로교회파 청교도들이 주도하여 만들어 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도 폐기했습니다. 웨신서는 만들어진 후 하루도 쓰여지지 못하고 휴지가 되어버렸습니다. 

이후 잉글랜드에서는 다시 장로교회 운동이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후 역사에서 영국의 남부에서 장로교회가 생겨나지를 못하게 된 것입니다. 영국의 청교도 운동에서 수적으로 가장 작은 사람들은 회중교회파 청교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다수였던 장로교회파들을 말살하고 역사의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영국의 장로교회의 주적이 국교회인 것 같았는데 사실은 회중교회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청교도주의 장로교회 목회자들은 영국의 청교도 운동으로 인해 장로교회(개혁교회)가 크게 살아난 것으로 착각합니다. 영국의 개혁교회(장로교회)를 가장 심각하게 말살하고 파괴한 세력은 국교회가 아니고 청교도 운동의 최종 승리자인 회중교회파 청교도들이었습니다. 
 

회중주의 이단사상의 영국 유입

회중주의 이단사상이 어떻게 영국 청교도 운동 속으로 유입되었을까요? 국교회 성직자 청교도들 가운데 더 이상 국교회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 회중교회 사상이 출현했습니다. 국교회 청교도였던 로버트 브라운과 해리스 목사에 의해 1581년 1월 런던에서 북동쪽으로 약 120 마일 정도 떨어진 노르위치(Norwich)에서 최초의 분리파 청교도 교회가 세워졌습니다(로이드 존스, <청교도 신앙: 그 기원과 계승자들>, 216).

국교회에 대한 소망을 버리고 새로운 청교도 교회를 처음으로 세운 그 사람들은 영국에서 한 번도 시도되지 않은 새로운 교회 개념을 추구했습니다. 그들은 교회를 ‘한 회중’으로 보았고, 회중이 교회의 모든 일들을 직접 결정하고 다스리는 것이 가장 성경적이라고 여겼습니다. 교회 외부의, 또는 내부의 소수의 어떤 권위있는 사람이나 조직에 의해 교회가 통치되는 거부했습니다. 프랑스의 개혁교회가 1560년대 초에 이단사상으로 규정한 회중주의(congregationalism)가 영국 청교도 운동 속에서 이렇게 출현했습니다(앞의 책).

이것이 시초가 되어 영국 밖에서 세워지는 모든 청교도 교회들은 회중교회로 세워졌습니다. 이들이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으로 이주하여 청교도 교회를 세웠는데, 역시 모두 회중교회였습니다. 

청교도들은 왜 장로교회가 아닌 회중교회를 세웠을까요? 국교회는 감독이 시키는 대로 하는 정치 구조입니다. 반대로 회중교회는 교회의 회원들이 스스로 알아서 교회를 운영하는 정치입니다. 국교회의 특징은 상명하복인데, 청교도들은 그것에 대해 심각한 염증을 느끼고 국회를 떠났으므로 그 정반대의 교회 정치를 채택한 것입니다. 

그러면 영국에 남은 국교회의 청교도들은 어떻게 회중교회 사상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헨리 제이콥스라는 국교회 청교도가 회중교회 사상을 영국의 남은 국교회 청교도들에게 소개했습니다. 제이콥스는 원래 네덜란드의 미들버그로 피난 간 청교도들의 교회 ‘모여든 교회’(gathered church)의 목회자로 사역했습니다(앞의 책, 221). 그는 국교회 치하에서 살수가 없어 네덜란드로 도주하여 다른 영국인들과 함께 영국인들로 구성된 교회를 섬겼는데, 그 교회도 역시 회중교회였습니다. 그곳에서 제이콥스는 회중교회 사상을 배웠습니다.

제이콥스는 1616년에 영국으로 귀국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국가로부터 영구히 분리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위험을 무릎쓰고 귀국하여 매우 특이한 국교회를 세웠습니다. 국교회이기는 하나 국교회 감독의 통치를 받지 않고 회중이 스스로 통치하는 국교회 속의 회중교회였습니다. 문론 그의 사상이 널리 환영받지는 못했으나 국교회이면서도 국교회 주교들의 통치를 받지 않고 회중이 스스로 교회를 다스리겠다는 국교회 회중교회 사상이 남아있는 다른 국교회 청교도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당시 영국 국교회에 남은 청교도들 다수는 여전히 장로교회 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소수의 퍼킨스(1602년 사망)의 후예들을 교회정치에 대한 특정한 사상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단지 국교회 신자들의 신앙자세와 의식을 바꾸는 신학운동, 즉 영생이 없는 죽을 사람으로 태어난 아담이 스스로 노력하여 영생의 자격을 갖추면 하나님이 영생을 주시기로 했다는 '행위언약' 개념에 기초하여 구원을 위해 각 사람이 스스로 노력하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에게 반응하며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는 경건주의 개혁운동에 힘쓰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들에게 서서히 제이콥스로부터 시작된 회중교회 개념이 수용되기 시작했습니다. 퍼킨스 계열과 제이콥스 계열은 융합되었습니다. 그래서 1640년대의 웨스트민스터 총회 때에 퍼킨스의 언약사상과 제이콥스의 회중교회 사상으로 무장된 ‘독립파’라는 특수한 청교도들이 나타나서 장로파들에게 대항하여 큰 목소리를 내게 되었습니다.

1차 내전이 청교도 군대의 승리로 끝났으나, 군권을 가진 독립파들에 의해 먼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만드는 일을 주도했던 잉글랜드의 장로교회파 청교도들이 말살되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도 독립파 군대에 의해 몇번 정복되었습니다. 결국 영국의 청교도 운동은 장로교 신앙을 말살한 독립파들의 독무대를 만들면서 마무리되었습니다. 

회중교회파 청교도들의 교회 정치사상은 이미 프랑스 개혁교회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었으나, 그들에게서 시작된 행위언약-능동순종 교리 등은 개혁교회의 중심에 자리잡게 되었고, 가장 위대한 최고의 개혁신학으로 대접받고 있습니다.  

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사탄이 세운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는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아세아연합대학 대학원(Th.M),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을 졸업했다.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에서도 수학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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