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가 인간에게 가능한 일인가?

 

글을 시작하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마6:12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는 마치 우리가 다른 이의 죄를 사할 수 있는 권세가 있다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인간의 죄를 사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는 제자들에게 신성모독을 부추기는 가르침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신성모독을 부추겼을 리는 만무다. 그럼에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가 마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신성모독을 부추기는 것처럼 보이는 까닭은 번역 성경들이 마6:12의 원문을 오역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마6:12과 병행 본문이라고 할 수 있는 눅11:4의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도 마6:12과 동일하게 원문을 오역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역한 주기도문을, 원문의 바른 의미를 모르는 채 그대로 사용한다면, 우리는 어쩌면 주기도문을 암송할 때마다 부지중에 신성모독죄를 범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마태복음 6장 12절의 바른 번역

마6:12의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에서 “죄 지은 자를”로 번역된 “ovfeile,taij”(오페일레타이스)는 “채무 아래 있는 사람”(one who is under obligation), 즉 “채무자”(debtor)를 의미하는 “ovfeile,thj”(오페일레테스)의 ‘목적격 복수’이다. 또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에서 “죄를”로 변역된 “ovfeilh,mata”(오페일레마타)는 “빚(부채)”을 의미하는 “ovfei,lhma”(오페일레마)의 ‘목적격 복수’이다.

그러므로 한글 성경 마6:12에서 “죄”로 번역된 “ovfei,lhma”(오페일레마)의 원래의 의미는 “빚, 부채”(debt)이다. “ovfei,lhma”(오페일레마)는 신약 성경의 롬4:4에서 한 번 더 사용되었는데, 여기서도 “ovfei,lhma”(오페일레마)는 “빚, 부채”의 의미로 사용되었다(롬4:4의 번역이 개역개정보다 한글개역이 더 정확해서 필자는 여기서 한글개역을 인용했다/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ovfei,lhma/오페일레마/ 여기거니와).

위의 사실을 염두에 두고 마6:12의 헬라어 원문 “kai. a;fej h`mi/n ta. ovfeilh,mata h`mw/n( w`j kai. h`mei/j avfh,kamen toi/j ovfeile,taij h`mw/n”(카이 아페스 헤민 타 오페일레마타 헤문 호스 카이 헤메이스 아페카멘 토이스 오페일레타이스 헤몬)을 직역하면, “(그리고) 당신은 우리의 빚을 면제해 주십시오. 우리가 우리에게 빚을 진 자들(의 빚)을 면제해 준 것과 같이”가 될 것이다(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여기서 “당신은 우리의 빚을 면제해 주십시오”는 오역이다). 여기서 마6:12을 바르게 번역할 수 있는 열쇠는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ovfei,lhma”(오페일레마)를 어떤 의미로 이해했는가를 아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지은 죄를, 하나님께 갚지 않으면 안 되는 빚(부채)으로 이해했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하나님과의 인간 사이에서 사용되는 “ovfei,lhma”(오페일레마)는 “빚”이 아니라 “죄”(a`marti,a/하말티아)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ovfei,lhma”(오페일레마)의 원뜻이 “빚”이라 할지라도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a;fej h`mi/n ta. ovfeilh,mata h`mw/n//아페스 헤민 타 오페일레마타 헤문)에서 “ovfeilh,mata”(오페일레마타)를 한글 성경에서 “빚”으로 번역하지 않고, “죄”로 번역한 것은 참 잘한 번역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ovfei,lhma”(오페일레마)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쓰일 때에는 “죄”가 아니라 단어의 원뜻과 같이 “빚”으로 이해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로 번역한 “w`j kai. h`mei/j avfh,kamen toi/j ovfeile,taij h`mw/n”(호스 카이 헤메이스 아페카멘 토이스 오페일레타이스 헤몬)에서 “ovfeile,taij”(오페일레타스)를 “죄 지은 자”로 번역한 것은 심각한 오역이며, 바른 번역은 이 단어의 원뜻 그대로 “빚진 자들”이다. 이때 “빚진 자들”의 “빚”은 자신에게 어떤 이가 돈을 빌려간 것일 수도 있고, 또 어떤 이가 자신에게 고의든 실수든 어떤 해를 가한 것일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어떤 이가 나에게 폭력을 행사했다면, 어떤 이가 나에게 폭력을 행사한 죄를 지었다고 생각한다. 또 내가 나에게 폭력을 행사한 어떤 이를 용서해 준다면, 내가 어떤 이의 죄를 용서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정서는 우리와 다르다. 유대인들은 어떤 이가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했다면, 그는 하나님께 폭력의 죄를 범한 것이며, 자신에게는 폭력이라는 빚을 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자신에게 빚진 자의 빚을 사해줄 수 있는 권리는 있지만, 죄 지은 자의 죄를 사해줄 수 있는 권리는 하나님께만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대인은 어떤 이가 자신에게 행사한 폭력의 죄는 하나님만이 용서해 주실 수 있으며, 자신이 자신에게 가한 어떤 이의 폭력을 용서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폭력으로 진 어떤 이의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마6:12은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사(탕감, 면제)하여 준 것 같이 (당신은)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로 번역해야 한다. 마6:12을 번역할 때, 똑같은 단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대해서는 “ovfei,lhma”(오페일레마)를 “죄”로, 사람에 대해서는 “빚”(부채)으로 번역해야 한다는 사실은 병행 구절인 눅11:4에서 더욱 분명해 진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눅11:4)

누가는 마태가 마6:12의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에서 사용한 “ovfeile,taij”(오페일레타이스/debtor)를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ovfei,lonti/오페일론티/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에서 동일하게 사용한다. 그러나 누가는 마태가 마6:12의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에서 사용한 “ovfeilh,mata”(오페일레마타) 대신에,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에서 “죄“를 의미하는 “a`marti,aj”(하말티아스)를 사용한다. 왜 그랬을까?

그 까닭은 누가복음의 독자들이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 이방인들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죄”(a`marti,a/하말티아)를 “빚”(ovfei,lhma/오페일레마)로 표현하면, 유대인들처럼 “ovfei,lhma”(오페일레마)를 “죄”(a`marti,a/하말티아)로 이해하지 못하고, “ovfei,lhma”(오페일레마)의 의미 그대로 “빚”으로 이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가는 이방인들의 바른 이해를 위해서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에서 “죄”를 마태와는 다르게, 실제로 “죄”를 의미하는 단어 “a`marti,a”(하말티아)를 사용한 것이다.

따라서 눅11:4의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에서 “죄 지은”은 오역이며, 누가가 사용한 “ovfei,lonti”(오페일론티)의 원래 의미를 그대로 살려서 “빚진”으로 번역해야 한다. 눅11:4의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를 원문대로 다시 번역하면,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가 될 것이다.
 

글을 마치며

불행하게도, 그것이 한글 성경이든 영어 성경이든지 간에, 필자가 검토한 모든 번역 성경은 마6:12의 “ovfeile,taij”(오페일레타이스)를 “죄 지은 자”로 오역했다(이런 경우가 많기 때문에 원문을 검토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눅11:4은 원문을 제대로 번역한 성경이 다수 있었다. 눅11:4을 제대로 번역한 성경 몇 권을 소개하면, 새번역(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우리에게 빚진 모든 사람을 우리가 용서합니다.)과 KJV(And forgive us our sins; for we also forgive every one that is indebted to us.), NASB('And forgive us our sins, For we ourselves also forgive everyone who is indebted to us.) 등이다.

몸통 글에서 보았듯이 설교자들과 성경 교사들이 오역된 번역 성경으로 설교나 강의를 준비한다면, 자칫 하나님을 모독하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는 것이 움직일 수 없는 두려운 현실이다. 독자들은 정이철 목사의 글을 보았듯이 회증파 청교도의 “능동 순종”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의 뜻 그대로 바르게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생겨난 기형아며, 한국교회에 없었으면 좋았을 두려운 현실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들과 성경 교사들이 이런 두려운 현실을 피하기 위해서는 말씀을 준비할 때마다 겸손하게 성령의 조명하심 앞에 서야 할 것이다. 필자는 설교자들과 성경 교사들이 원문을 제대로 살피려는 노력도 겸손하게 성령의 조명하심 앞에 서는 한 방법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현실적으로 설교자들과 성경 교사들이 원문을 검토하는 것이 그리 용이하지 않다면, 다른 번역 성경들을 살피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최소한의 작업이라고 여겨진다.

이 땅의 설교자들과 성경 교사들이여! 주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귀중한 것인가를 절실히 깨달음으로써, 말씀 맡은 자들이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의 뜻 그대로 잘 준비하여 외치고 가르친다면, 죽어버린 조국 교회라 할지라도 다시 살아나는 것은 불을 보듯 분명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만이 마른 뼈들을 살아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필자와 <바른믿음>은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독자들과 함께 최선을 다할 것이다.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겔3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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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