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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영국 장로교 운동의 최고의 적은 바로 청교도(회중파)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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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영국 장로교 운동의 최고의 적은 바로 청교도(회중파)들이었습니다
  • 정이철
  • 승인 2021.02.02 12: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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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청교도 운동 당시에 장로교회과 회중교회의 관계를 간략하게 설명해 주십시오.

 

 

답변>
스코틀랜드에서는 처음부터 칼빈의 제자 존 낙스에 의해 장로교회가 들어섰습니다. 1560년에 이미 존 낙스에 의해 신앙고백서가 만들어졌고, 1667년에 당회, 노회 등의 장로교회 직제들이 전국에 설치됨으로 장로교회가 국가적으로 정착되었습니다.(서요한, <청교도 유산>, 518)

사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자신들이 청교도 운동 울타리에 들어가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역사가 청교도 운동에 포함되느냐 하면, 남쪽 잉글랜드에서 국교회와 싸우면서 성장한 청교도들과 부득이 힘을 합하여 국교회와 싸웠기 때문입니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국교회와 싸우기 위해 잉글랜드의 청교도들과 힘을 합했던 이유는 1630년대에 전체 영국을 다스린 찰스 1세가 스코틀랜드 사람들에게 장로교회를 포기하고 국교회를 수용하라고 강요했기 때문입니다. 1638년 스코틀랜드 전 국민이 합심하여 하나님께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를 수호하겠다고 맹세(언약)를 했습니다. 이것을 스코틀랜드의 ‘국민언약’(Mational Covenant)라고 합니다.

이 일이 워낙 큰 사건이었으므로 이후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언약도’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언약도라는 별명을 얻은 사람들이지, 청교도라고 불리우기를 좋아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그들이 잉글랜드의 청교도들과 협력할 때, 어떤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잉글랜드의 회중주의 청교도들을 매우 싫어하며 경멸조로 말하기도 했습니다.

스코틀랜드 국민들이 찰스 1세의 국교회 강요 정책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찰스 1세가 보낸 국교회 주교들을 쫓아버렸습니다. 화가 난 찰스 1세는 잉글랜드의 군대를 보내 스코틀랜드를 정복하려고 했으나, 전쟁에서 이기지 못하여 더 망신을 당했습니다. 찰스 1세는 더 많은 군대를 보내기 위한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오래 폐쇄했던 잉글랜드 의회를 개원하여 군비를 조달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의원들은 독재를 일삼았던 왕을 싫어했습니다. 다수의 의원들은 수 십 년 전부터 확산된 청교도 운동의 영향을 받아 국교회 신앙을  매우 싫어하였고 찰스 1세에게도 반항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의회가 찰스 1세에게 협조하지 않고 도전적으로 반응하자 체면이 상한 찰스 1세가 먼저 의회를 군사적으로 지배하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실패하였고 결국 왕(국교회)과 의회(청교도)의 내전이 1642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내전의 초기에는 정규 군대를 가진 국교회가 우세했습니다. 그 와중에도 잉글랜드 의회는 국민들의 추천을 받아 잉글랜드(웨일즈, 아일랜드 포함)의 명망있는 신학자들을 한 곳으로 불러 모았습니다. 국교회를 무너뜨리고 난 후 국교회 자리를 대체할 하나의 청교도 개혁교회를 잉글랜드에 세우기 위해서였습니다. 국교회를 무너뜨릴지라도 여전히 청교도들 간에 예배와 교리가 다르면 훗날 똑 같은 혼란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교리와 예배를 일치시키려고 신학자들을 모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1643년에 소집된 웨스트민스터 총회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를 소집한 의회 의원들 다수가 장로교회파 청교도 신자들이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장로교회를 세우기 위해 웨민총회를 소집한 것은 아닙니다. 국교회를 없앤 후 그 자리에 예배와 교리가 하나로 통일된 청교도 교회를 세우기 위해 모였습니다. 모인 신학자들 다수가 장로교회파 청교도들이었으므로 자연스럽게 일이 진행되면 잉글랜드에 장로교회가 들어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잉글랜드에 통일된 청교도 교회를 세우기 위해 웨민총회가 국교회의 39개 신조를 15항까지 개정했을 때, 갑자기 멈추었습니다. 청교도 군대가 매일 국교회 군대에 밀리고 있었으므로 북쪽의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사람들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사람들도 장로교회를 지키기 위해 국교회 군대와 싸우는 입장이었으므로 그들의 요청에 응했습니다.

스코틀랜드는 전쟁에 가담해 달라는 요청에 응하면서 한 가지 조건을 달았습니다. 단순 정치적 동맹이 아닌 신앙적 동맹(언약)을 맺자고 제안했습니다. 국교회를 무너뜨린 후에 전체 영국에 하나의 개혁된 교회를 세우자는 언약을 맺기를 제안했습니다. 그래서 “엄숙동맹과 맹약”(1643년)이 탄생했는데, 국가 단위로는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언약이고, 종파들 단위로는 스코틀래드 장로교회, 잉글랜드 장로교회파 청교도, 잉글랜드 회중파 청교도들이 전쟁이 끝난 후에 하나의 통일된 개혁교회를 세우자는 언약이었습니다.

그래서 국교회의 39개 조를 개정하는 작업을 버리고, 새로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만드는 일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여기서부터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도 참여했고, 남쪽의 청교도들과 협력하게 됨으로 영국의 청교도 운동에 포함되는 모양새가 되었습니다. 크게 세 종파가 협력하여 서로의 신학적 입장을 최대한 반영하기 위해 장장 5년 동안 1,000번 이상 모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만들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단 한 번도 “이것은 장로교회의 신앙고백이다”라는 합의가 없었습니다. 크게 세 종파가 모두 만족하는 신앙고백을 정말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싸우기도 많이 했으나, 끝까지 한 종파도 떠나지 않았습니다. 당시 스코틀랜드 총대는 소수의 회중파 총대들을 경멸스럽게 보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렵게 신앙고백을 완성했으나 하루도 사용해 보지 못하고 휴지가 되었습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올리버 크롬웰 장군과 그의 군대가 잉글랜드 의회를 대적했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권력 다 다툼으로 볼 수도 있으나, 근본적인 원인은 크롬웰과 그의 병사들 대부분이 회중파 청교도 신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장로교회파 의원들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 내는 신앙고백서 등을 그들은 싫어했습니다. 그들에게 장로교회 제도를 강요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로이드 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크롬웰과 그의 병사들 대부분은 독립파-회중교회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장로교회 제도를 자신들에게 강요하는 것을 참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D. M. LLoyd - Jones, The Puritans: Their Origins and Successors, 225.)

크롬웰이 군대를 이끌로 런던으로 진입하여 두 번(1647년 8월, 1648년 12월)이나 의회를 점령했고 장로교회파 의원들을 모두 추방해 버렸습니다. 그것으로 잉글랜드의 장로교회 운동은 끝났습니다. 이후 다시 잉글랜드에서는 장로교회 운동이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잉글랜드의 장로교회 운동을 말살한 최고의 원수는 국교회가 아니고 바로 회중파 청교도들이었습니다. 잉글랜드의 권력을 잡은 크롬웰와 회중교회파 청교도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등 웨민총회의 결과물들을 모두 휴지로 만들었습니다.

이후 크롬웰과 회중교회파 병사들은 국왕 제도에 대해 뜻을 달리하는 스코틀랜드를 세 번(1648년 7월, 1650년 9월, 1651년 9월)이나 정복했습니다.(서요한, <청교도 유산>, 101, 라은성, <이것이 교회사다: 가공된 진리>, 122, 서요한, <청교도 유산>, 102) 회중파 청교도 신자 크롬웰 군대의 스코틀랜드 정복전쟁에는 회중교회파 최고의 신학자 존 오웬이 군목으로 참여했습니다. 회중교회파 청교도들이 장로교회 신앙을 좋아했다면, 아마 존 오웬이 그런 전쟁에 군목으로 참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영국의 장로교회(운동)의 최대의 적은 국교회가 아니라 잉글랜드에서 성장한 회중파 청교도들이었던 것입니다. 영국의 장로교회 운동에 가장 심대한 타격을 미친 세력을 국교회가 아니고 회중파 청교도들이었습니다. 회중파 청교도들은 세 종파가 모여 애써 만든 웨신서를 휴지로 만들었고, 잉글랜드의 장로교회 운동의 뿌리를 뽑았고, 스코틀랜드에 세워진 장로교회에도 심대한 타격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자신들만의 사보이 신앙고백(1658년)을 만들었습니다.

청교도 운동 시대에 장로교회의 최고의 적은 회중파 청교도들이었는데, 왜 이런 사실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장로교회가 중시하는 웨민고백을 만들 때에는 최대한 자신의 특이한 신학을 기술하기 위해 싸움을 마다하지 않았으면서, 자신들이 권력을 잡자 장로교회와 웨신서를 찢어버린 사람들이 바로 회중파 청교도들입니다.

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사탄이 세운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는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아세아연합대학 대학원(Th.M),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을 졸업했다.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에서도 수학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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