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성 교수의 청교도, 사상과 경건의 역사 서평 2


“... 마틴 로이드 존스 박사는 평생 청교도 신학을 연구했다. 그는 정규 신학대학원을 다니지 않았지만, 오직 청교도 저서를 수백 권 읽으면서 기독교 진리를 터득했고, 제2차 대전의 폐허 속에서 영혼들을 깨웠다 ... 자신들을 영혼의 의사라고 불렀던 청교도들처럼, 영혼의 의사가 된 그는 오직 청교도 설교집과 경건 서적들을 모조리 섭렵해서 새로운 강해설교의 금자탑을 이뤘다.”(26 페이지)

김재성 교수의 이와 같이 로이드 존스가 청교도 서적들을 많이 읽고 강해설교의 대가로 성장했다는 설명은 맞는 말이면서, 동시에 매우 위험한 독소이다. 왜냐하면 로이드 존스가 신학교에 다니지 않고 단지 청교도 서적들을 읽고 기독교를 이해함으로 인해 결국 심각한 거짓 신학도 함께 가지게 되었음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전의 글에서 필자는 로이드 존스의 성령 신학이 심각한 거짓 신학이었음을 설명했다. 그런데 로이드 존스의 심각한 이단성은 칭의신학에서도 타나났다.
 

“칭의와 죄 용서는 동일하지 않다 ... 그들은 속죄의 한 부분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율법에 수동적으로 순종하시기 이전에 이미 능동적으로 순종하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다시 말해 칭의에는 두 번째 요소로서 능동적 요소가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나의 죄가 용서받은 것 외에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적극적인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고 우리의 것으로 인정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율법을 준행하고 높이셨으며, 그 결과 율법의 모든 요구에 직면하신 의로운 분이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바로 그런 그리스도의 의가 나의 것이 되게 하였다.”(로이드 존스의 말/ 신호섭 교수의 책 <개혁주의 전가교리>, 130 페이지)

로이드 존스의 칭의 신학이 두 가지 면에서 심각하게 성경에서 벗어난 거짓 신학이었음을 알 수 있다.

1)칭의와 죄 용서는 동일하지 않다는 주장
2)그리스도가 율법을 준행하여 율법을 높이셨다는 주장
 

<칭의와 죄 용서를 분리시키는 로이드 존스의 거짓신학>

먼저 칭의와 죄 용서가 동일하지 않다는 로이드 존스의 주장이 왜 거짓 신학인지 살펴보자. 성경은 하나님의 인격을 가지신 죄 없으시고 의로우신 사람으로 오신 그리스도가 자신을 우리의 죗값으로 내어주심으로 죄인에게 칭의가 일어났다고 설명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 5:9)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성경 어디에도 그리스도의 속죄가 아닌 다른 무엇으로부터 우리의 의로움이 유래하였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의 의가 그리스도의 매일 아침의 목욕으로부터, 또 어떤 사람은 우리의 의가 그리스도의 매일 아침의 소금 양치질로부터, 또 어떤 사람은 우리의 의가 그리스도의 일평생의 율법 준수로부터 유래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은 오직 한 가지로부터 우리의 의로움이 유래했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의 인격을 가진 의로운 사람으로 오시어 속죄의 어린양의 순종의 삶을 사셨던 그리스도가 자기의 몸과 영혼을 우리의 죗값으로 하나님께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의가 유래했다고 설명할 뿐이다.
 

칼빈도 칭의는 오직 죄의 용서를 받는 것이라고 했다.

“사도행전 13장에 있는 바울의 설교에 이런 말이 있다.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8-39). 여기에 보면 죄의 용서를 말한 후에, 그에 대한 해석으로 의롭다고 인정한다는 말을 한다. 의롭다고 인정하는 것을 분명히 죄의 사면으로 해석하며, 의롭다함을 율법의 행위에서 분리시키고 있다.”(기독교강요, 3.11.3)

 

서철원 박사도 칭의는 곧 죄의 용서라고 가르친다.

의롭다 하심은 예수 믿음에 근거해서 죄를 용서하여 무죄하다고 선언하심이다. 믿음고백에 죄용서와 의롭다하심이 온다. 칭의는 단지 주 예수를 믿는다는 믿음고백에 대한 하나님의 무죄 선언이다. 따라서 법정적 선언이지 도덕적 칭의일 수 없다.”(서철원, 교의신학전집 5: 구원론, 29)

로이드 존스와 같이 죄의 용서와 칭의를 동일시하지 않으면 결국 율법의 행위를 통한 칭의를 주장하게 된다. 사람이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없으므로 하나님이 대신 율법을 준수하시고자 성육신하시었다는 거짓 신학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다. 로이드 존스가 바로 그 함정에 빠졌다.
 

<그리스도가 율법을 높였다는 로이드 존스의 거짓신학>

로이드 존스는 그리스도가 율법을 준수하심으로 율법을 높였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심각한 이단 사상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율법이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그리스도의 그림자였을 뿐이고, 또한 어린 아이가 장성하기 전까지 돕는 몽학선생에 불과했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 2:17)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히 10:1)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사람이 되어 오실 것을 계획하신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이 자기를 믿게 하려고 먼저 보내신 것이 율법이다. 사람이나 그리스도가 율법을 지켜서 의로움을 얻는다는 주장은 넌센스이다. 율법은 단지 사람이 자기의 죄를 깨닫고, 그리스도가 자기를 대신하여 죽으심을 믿게 하려는 목적으로만 도입되었다. 율법을 지켜서 의를 얻을 수 있다는 가르침은 성경에 한 줄도 나오지 않는다. 율법은 단지 오실 구원자를 계시하는 그림자(특별계시)였다.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갈 3:24)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갈 3:25)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율법은 더 이상 하는 일이 없어졌다고 한다. 대학생으로 성장한 자녀가 여전히 몽학선생의 손을 잡고 학교에 가는 것을 보았는가? 그런 일은 언제나 유치원생들에게나 있는 것이다. 성경은 율법이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한 후 제 사명을 다했다고 말한다.

우리가 구원을 얻기 전이나, 구원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율법이 하는 일이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그리스도께서 미리 보내신 율법을 통해 먼저 죄인으로 정죄해 두신 사람들이 때가 이르러 율법의 실체로서 오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구원의 유지도 율법과 관련이 조금도 없다. 그리스도의 피로 죄용서를 받고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의 전가를 받았으므로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 율법을 안 지킨다고 구원이 떠나가는 것이 아니다. 구원 이후의 변화되어지는 성도의 삶도 구약의 율법과 아무 관련이 없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를 적용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성도에게서 죄를 이기는 삶이 진행되어 진다. 구약의 율법의 요구는 성도에게 내주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구원 받은 성도가 자기 의지로 율법을 준수하여 변화되어가는 삶을 구현하면서 구원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율법을 준수하심으로 율법을 높였다는 로이드 존스의 주장은 성경의 가르침을 허무는 거짓 신학의 가르침이다. 율법은 단지 오실 그리스도의 그림자였다. 그리스도께서도 율법에게 순종하셨다면 율법이 하나님도 제어한다는 것이다. 그런 종류의 이단사상은 그리 흔하지도 않다.

대체 왜 로이드 존스는 이런 거짓 신학에 매이게 되었을까? 김재성 교수가 잘 설명해 주었듯이, 그는 정규 신학교에 다니면서 성경을 배우지 않았다. 의사 선생이었던 그는 청교도 서적들을 부지런히 읽었다. 그래서 성령신학과 칭의신학에서 청교도들의 이단의 길로 빠지고 말았다.
 

대표적인 청교도이고 로이드 존스가 가장 존경했던 조나단 에드워즈의 칭의 신학을 보자.

“우리가 형벌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과 형벌을 받으셔야 하는 것처럼, 상급을 획득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에 순종하셔야 할 필요성이 동일하게 제기된다 ... 우리가 상급을 취득하기 위해 율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이 성취되어야 하며, 형벌을 면하기 위해 죽음의 고난을 당해야만 하는 필요성이 정확히 동일하게 제기된다.”(조나단 에드워즈, 신호섭 교수의 책 <개혁주의 전가교리>, 122 페이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고난을 통해 확보하신 소극적 의의 목적은 죄책과 형벌로부터 구원하는 것일뿐, 죄인에게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부여하지 않는다 ... 그리스도의 수난은 의무로부터 구원하고 죄인을 무관심의 상태로 남겨 두지만, 그리스도의 적극적 의는 죄인에게 천국과 영생을 확보해 준다.”(조나단 에드워즈, 앞의 책, 123 페이지)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셨던 것처럼, 우리가 영생과 천국의 행복을 누릴 자격을 가지기 위해 그리스도가 아담이 지키지 못했다는 율법에 순종했어야 할 의무가 있었다고 에드워즈는 가르쳤다. 거짓 신학의 절정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드려서 우리에게 죄의 용서를 주신 것이 곧 칭의라는 성경이 가르침과 완전히 다른 말인다. 그런데 매우 멋있다.  이것이 청교도들의 사변 신학의 매력이다. 에드워즈의 그리스도가 율법을 지켜서 천국의 행복한 생활을 누리게 할 자격, 즉 의로움을 얻으셔야만 했다는 주장은 그리스도가 율법을 지켜서 율법을 높이셨다는 로이드 존스의 거짓 칭의 신학과 같은 내용이다. 결국 로이드 존스의 칭의 신학의 이단성이 에드워즈와 청교도들에게서 유래했음을 알 수 있다.

청교도 추종자들이 청교도를 높이는 방법은 가지가지이다. 그 중에 잘 먹히는 것 하나는 로이드 존스가 신학교를 다니지 않았으나 청교도 서적들을 많이 읽어 가장 탁월한 강해설교자가 되었다는 설레발이다. 청교도 서적들을 많이 보고 기독교를 이해했던 로이드 존스가 성령론과 칭의론에서 이와 같이 심각하게 기독교 신앙을 왜곡했다는 말은 일체 하지 않는다. 아니 알지도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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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