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장을 보면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이 그랄 땅에 거주하다 그곳을 다스리는 왕에게 자신의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창20:2).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이 일로 인해 하나님은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 그 말은 사실이 아닌 거짓말임을 알려줍니다.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이라"(창20:3)

물론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내 사라를 누이 동생이라고 부르도록 요청한 것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인 갈데아 우르를 떠날 때부터 사전에 아내와 상의를 한 내용이기도 합니다(창20:13). 당시 고향을 떠나 낯선 지역을 향해 여행해야 했던 아브라함은 생명의 위협을 느꼈으며, 그러한 두려움은 그를 비겁한 남편으로 거짓말쟁이로 만들었습니다.

더불어 이러한 거짓말이라는 비겁함 속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자신의 생명만은 지키고자 하는 인간적인 지극히 인간적인 인간의 생존을 향한 본능적 자기 보호가 있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외부의 위협이 적대적이며 그 강도가 강할수록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가 더욱 발동되어 거짓말뿐 아니라 누가 보더라도 상식적이라 볼 수 없는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자기 보호는 비단 아브라함 뿐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한국에서는 최근 수영선수 박태환 선수의 도핑관련 사실이 매스컴을 연일 달구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사실관계가 검찰 조사를 통해 조금은 밝혀지기는 했지만 여전한 의구심들은 남아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그 정확한 진실(fact)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세계수영연맹에서 금지된 주사를 맞은 박태환 선수나 그 약물을 주입한 의사들 모두 “나는 몰랐다”라며 서로 책임을 회피하고 있습니다.

단지 우리는 그러한 정황가운데 몇 가지 추측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수영 금메달리스트이며, 개인 트레이너를 둔 국가대표 급인 세계적인 수영 선수라 불리는 현역 선수가 금지약물로 공공연히 지정된 약물을 정말 모르고 맞았는지, 남성 호르몬 질환을 다루는 내분비 전문의사가 그 약품의 내용을 몰랐다는 것 역시 상식적으로 일반인이 선뜻 납득하기 어려운 사실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박태환 선수가 의사에게 책임과 비난의 화살을 쏘는 대신에 “국민 여러분 제가 잘못했습니다. 여러분의 성원에 부응하지 못하고 제가 잘못 생각을 했습니다. 실망을 안겨드려서 죄송합니다. 용서를 구합니다”라고 말하면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물론 그동안 자신이 쌓은 국제적 명성이나 국민적 인기가 상당 부분 훼손되고 손가락질 받을 수 밖에 없겠지만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점에서는 그것은 또 다른 용기 있는 행동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 저 혼자 생각해 봅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안타까운 사실은 우리가 사는 한국 사회가 잘못이나 실수를 저지른 사람이 쉽사리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장면을 보기가 너무나도 어렵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는 두 명의 남자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첫째는 10살이고, 둘째는 8살입니다. 아이를 키우며 첫째아이에게 늘 미안한 점은 아이를 처음 키우며 초보 부모가 되어서 수많은 시행착오와 내 자신의 미숙함으로 인해 큰 아이를 윽박지르며 키웠다는 사실입니다. 아이가 실수하고 잘못했을 때 진실과 사실만으로 정직하고 바른 아이로 내 아이를 어떠하든지 키워야겠다는 욕심으로 인해 잘못을 인정하고 쉽게 자신의 과오를 말할 수 없는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한 손에는 무서운 매를 들고 날카로운 눈빛을 하고는 아이에게는 진실과 사실만을 강요하는 내 자신의 지난 모습을 생각해 봅니다.

이러한 공포스럽고 지극히 위협적인 분위기에서 아이는 사실을 사실대로 말할 수 없고 어떻게든 자신을 변호하고자 하는 생존의 본능, 자기 보호가 작동해 계속적인 변명과 핑계가 돌고 도는 모습을 만들어 내었던 지난 날을 생각해 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자신이 잘못하고 실수를 인정했을 때 받을 벌이 아이 입장에서는 너무나 크다고 생각하기에 그 두려움 때문에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아이의 잘못이라기보다 어쩌면 그런 상황을 만든 저같이 미숙한 부모의 행동이 좀 더 근본적인 원인이라 생각됩니다. 용서와 관용의 태도를 경험해 보지 못했기에, 한 번의 잘못으로 자신의 모든 것이 몰락하고 파괴된다고 생각했을 때 아이는 비록 거짓말을 해서라도 그 상황을 모면하고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을 선택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가혹한 환경, 그래서 잘못을 인정하면 모든 것이 끝장나는 환경에서 자신을 지켜내야만 한다는 사실이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거짓말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고 잘못할 수 있고, 그 잘못이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비단 금지된 약물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유명한 운동선수뿐 아니라 연예인, 정치인을 포함한 이 시대를 사는 모든 남녀노소를 포함한 우리 모두에게 적용됩니다. 하지만 왜 유독 우리 사회는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을 극히 보기가 어려운 사회가 되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잘못을 범하는 이에 대한 용서와 회복보다는 그러한 사람이 저지른 잘못 그 이상을 추궁하며 한 사람을 완전한 나락으로 떨어트리는 파괴적인 환경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잘못을 인정할 수 없는 사회,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면 모든 것이 송두리째 파괴되기에 상식적이지 않지만 어떻게든 자기 보호로 겹겹이 자신의 보호막을 둘러싸야만 하는 이 안타까운 현실을 우리는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과 실수를 너그러이 회복의 관점으로 받아 줄 수 있는 따뜻한 눈빛을 경험할 수 있다면, 아니 한 번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파괴가 아닌 또 한 번의 재기(second chance)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진다면 비극적인 뉴스들을 우리 주변에서 좀 더 적게 들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거짓말은 단순한 거짓말의 현상 뿐 아니라 거짓말을 하게 만드는.  아니 거짓 말을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사회에도 그 책임이 일정부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각박하고 냉엄한 사회 속에서 살아갑니다. 한 순간의 잘못이나 실수에도 떨어질 낭떠러지가 수천 길처럼 보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 모두가 아브라함처럼 비겁하지 않고, 진리 되신 예수님(요14:6)을 따라 사랑 안에서 진리만을 말하며(엡4:13), 온전함(integrity)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다시금 생각해 봅니다.

영화 <Flight> 포스터

며칠 전 보았던 덴젤 워싱턴이 주연한 영화 <Flight>에서 알코올 중독자로 술을 마신 채 사고를 낸 기장이 수 많은 사람들이 지겨보는 청문회의 자리에서 이미 죽은 승무원에게 잘못을 전가하며,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는 기회를 거절하며 대신에 “하나님 도와주세요. 나는 술중독자 입니다. 그 술을 제가 마셨습니다. 그 승무원은 잘못이 없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을 우리 주변에서도 보고 싶습니다.

잘못에도 잘못의 죗값을 정당하게 받고, 그 이후 파괴와 파멸이 아닌 또 다른 삶이 가능한 사회, second chance가 주어지는 환경, 재기가 가능한 사회가 된다면 우리는 거짓말, 비상식이 아닌 말과 행함이 일치하는 온전한(integrity) 삶, 책임지는 삶을 더욱 많이, 더욱 자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를 용서하셨고, 지금도 용서하시고 앞으로도 우리를 용서해 주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도 그 누군가를 그렇게 대하며 따뜻한 포옹을 안겨주는 과제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여러분과 제가 먼저 실천하며 진실을 권하는 사회를 선도하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진리되신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니 감사합니다. 오직 사랑가운데 진리 되신 예수님을 따라 진리만을 말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행여 그러하지 못했을 때에도 잘못을 인정하고 돌아서는 자가 되게 하시고 또한 그런 이들을 품어주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진리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바른믿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