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모 목사의 성경 오역(誤譯), 오석(誤釋) 바로잡기(17)

 

글을 시작하며

어느 날 예수님은 수가 동네의 한 우물가에서 낯선 사마리아 여인을 만난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물 한 그릇을 부탁했고, 그녀는 예수님의 부탁을 거절한다. 이때 예수님이 그 여인에게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3-14)는 말씀을 하신다. 그러자 그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에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요4:15)라고 대답한다.

거의 모든 신학자들은 요4:15의 사마리아 여인의 말을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여인의 오해는 매우 어리석게 된다. 그녀는 일반적인 물을 위하여 매일 올 필요가 없도록 하기 위해 예수께서 가지신 마법의 물을 요구하고 있지 않는가!”(G. R. 비슬리 머레이)

“그 여인은 분명히 예수가 제공하고자 하는 물에 관심을 갖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그 물의 진정한 기원에 대해 잘 몰라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안드레아스 J. 쾨스텐베르그)

“그녀는 아직 자신이 무엇을 구하고 있는 것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다. 그녀는 아직도 문자적인 물을 구하고 있다”(게리 M. 버지)

“이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에 대한 세부 사항이나 웅대함은 모르지만, 적어도 자신이 이 물을 원한다는 것은 안다”(클린턴 E. 아놀드)

“이 여자가 청한 것이 분명히 보여 주듯이, 그녀는 니고데모와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순전히 자연적이고 본성적인 차원에서만 생각한다.”(D. A. 카슨)

앞에서 본 것처럼 신학자들은 하나같이 이 여인이 예수님의 깊은 뜻은 잘 몰랐다할지라도 아무튼 예수님이 제안하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원했다고 이해한다(단, 필자가 살펴 본 바에 의하면, 요한복음 주석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The Gospel According To John”을 쓴 ‘레이몬드 E. 브라운’은 요4:15에 대해 별 주석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과연 요4:15에 대한 이들의 주석이 적절한 것일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들의 주석은 적절치 않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처음 한 동안은 예수님을 플레이보이로 오해하고 있었음을 간파하지 못한다면, 적어도 요4:15과 요4:17의 사마리아 여인의 대답을 제대로 이해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수가 동네의 사마리아 여인은 처음 한 동안은 예수님을 플레이 보이로 오해했다!

유대인의 관습상 공개된 장소에서, 즉 집 밖에서는 여자에게 말을 거는 것은 금기 사항이다. 따라서 유대인은 집 밖에 나가면, 자신의 아내에게도 말을 걸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유대인 남자가 집 밖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같은 이방 여자에게 말을 거는 일은 사실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유대인은 사마리아 여자는 태어날 때부터 부정하기 때문에 사마리아 여자에게서 태어난 모든 자들은 어떤 방법으로도 부정을 씻을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대인은 사마리아 인이 쓰는 그릇이나 잔 등은 물론이고, 그들의 빵까지도 돼지고기처럼 여길 정도로 그들의 모든 것을 부정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집 밖에서는 자신의 아내에게도 말을 걸지 않는 유대인 남자가 사마리아 여자, 그것도 본문에서처럼 유대인 남자(예수님)와 사마리아 여인(수가 동네 여인) 단 둘만 있는 상황에서 유대인 남자가 사마리아 여자에게 말을 거는 것은 도저히 상상조차 힐 수 없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와 단 둘만이 있는 외딴 우물가에서 그 여자에게 말을 걸었던 것이다.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요4:7)

이에 대해 사마리아 여인은 다음과 같이 반응한다.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요4:9)

위에서 “어찌하여”로 번역된 “pw/j”(포스)는 “어떻게?”(how?)를 의미하는 ‘의문 불변사’로서, 본문에서처럼 놀라움을 나타낼 때에는 “어찌된 일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의미의 아주 강력한 의문을 나타낸다. 그리고 “상종하지”로 번역된 “sugcrw/ntai”(슁크론타이)의 원형 “sugcra,omai”(슁크로마이)의 문자적인 의미는 “~를 함께 사용하다”(NRSV: Jews do not share things in common with Samaritans.)이며, “~와 거래하다”(NASB: For Jews have no dealings with Samaritans.), “~와 교제를 나누다”(NRSV: Jews do not share things in common with Samaritans.) 등이다.

유대인인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부탁한 것은 다음의 두 가지 유대인의 금기 사항을 어긴 것이다. 하나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을 거는 것(그것도 단 둘 만이 있는데서)이며, 또 하나는 사마리아 지역의 우물물을 사마리아 여자의 물 깃는 그릇을 사용해서 마시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은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요4:9)는 짜증스런 반응을 보이면서, 유대인인 예수님의 이런 태도가 하도 이상해서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요4:11)라고 질문까지 한 것이다.

여기서 “물 길을 그릇도 없고”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 길을 그릇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사마리아 여인은 물을 길으러 우물에 왔으므로 당연히 물 깃는 그릇이 그녀에게는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에게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여인의 질문은 유대인인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자인 자신에게 사마리아인의 물 깃는 그릇을 사용해서 물을 퍼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얼토당토않은 황당한 요구가 아닙니까? 하는 질문이다.

아무튼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그것도 단 둘만 있는 와딴 우물곁에서, 물을 좀 달라고 한 것은 유대인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의 이런 수상한 행동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뻔하다. 이 여인은 틀림없이 어떤 낯선 유대인 남자가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나를 유혹하려고 수작을 걸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유대인 남자가 사마리아 여인에게, 그것도 단 둘만 있는 외딴 곳에서 말을 건다는 것은, 십중팔구, 아니 100% 수작을 거는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에게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요4:9)는 짜증스런 반응을 보인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의 부탁에 대해 이렇게 강렬하게 부정적으로 반응한 이유는, 처음 보는 낯선 유대인 남자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못된 짓을 자신에게 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 상황이 어떤 분위기였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구했던 ‘물’을 ‘승용차’에 빗대어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를 리메이크해 보겠다.
 

예수님과 수가성 여인의 대화 리메이크

아무도 없는 사마리아 지역의 수가 동네 어느 외딴 우물가에 한 사마리아 여인이 폐차 직전으로 보이는 낡은 티코 한 대를 세워 놓고 그 옆에 서 있다. 근데 그 차는 정말 한 눈에 보기에도 곧 고장 날 것만 같은 고물 차였다.

이때 한 남자가 그 여인에게 다가 온다. 그 남자는 사마리아인들이 경멸하는 유대인이었다. 물론 유대인들도 사마리아인들을 경멸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이런 이유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는 상종하지 않는다. 그러나 낯선 이 유대인 남자는 처음 보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을 걸며 대화하려고 한다. 유대인 남자의 이런 행동은 유대인의 관습으로 볼 때에는 있을 수 없는 충격적인 행동이었다. 왜냐하면 유대인 남자들은 집 밖에 나가면 자신의 아내에게도 말을 걸지 않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어 있는데, 그럼에도 이 유대인 남자는 같은 유대인 여자도 아닌, 서로 경멸하고 있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그것도 외딴 곳에서 말을 걸었기 때문이다.

예수님: (낯선 사마리아 여인에게) 저 마을 입구까지만 당신의 차로 나를 좀 태워주게나.(요4:7/물을 좀 달라 하시니)

사마리아 여인: 당신은 유대인인데, 절 언제 봤다고 제게 차를 태워달라고 하십니까? 그것도 단 둘 만 있는데서요.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요4:9/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예수님: 어허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군. 만일 내가 누군지 네가 알았다면(내가 누군지 알아? 나 재벌 2세야!), 나의 부탁을 들어주고, 나에게 새 차 한 대 사달고 부탁했을 거야. 그러면 내가 네게 새 차 한 대 사주었을 거야!(요4:10/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사마리아 여인: 내가 보기에 당신은 빈털터리 같은데, 그래서 나에게 언제 퍼질지도 모르는 고물 차를 태워달라고 하면서........ 허풍 떨지 마세요. 당신은 현대 그룹 총수보다도 더 대단하단 말입니까?(요4:12/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예수님: 너의 고물 차 티코는 휘발유도 계속 넣어야 하고, 또 자주 고장 나서 카센터에도 연신 가야하지만, 내가 네게 주려고 하는 차는 휘발유를 전혀 넣지 않아도 잘 달리고, 전혀 고장도 나지 않아서 카센터에도 영원히 갈 필요가 없는 최고급 차지. 혹시 너 “Forever Car”라고 들어봤니? 내가 네게 주려는 차가 바로 “Forever Car”야. 세상에 단 한 대밖에 없는 “Forever Car” 말이야!(요4:13-14/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사마리아 여인: (마음속으로 “이 놈, 큰 일 낼 사기꾼이네. 내가 속을 줄 알고.....” 이 여인은 화가 나서 예수님께 말을 놓기 시작한다.) 그래. 이 고물 차 맨날 고장 나서, 시도 때도 없이 카센터 가야하고, 연비도 엉망이어서 기름 값도 많이 들어 고생고생 하는데, 잘 됐네. 네가 말한 그 “Forever Car” 나한테 줘 봐. 이제 다시는 카센터, 주유소 안 가고 좀 편하게 살게 말이야(요4:15/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이 여인이 자신을 플레이보이로 오해하므로, 자신의 말을 진지하게 듣지 않고 있음을 아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결정타를 날리시려고 “네 남편을 불러 오라”는 말씀을 하신다. 그러나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의 이 말씀에 “이 남자가 이제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갈 데까지 가자는 거구나“라고 생각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아래처럼 들었을 것이다.

예수님: 혹시 너 남자 친구 있니? 아니면 결혼은 했어? 남편은 있니? 네 남편 한 번 봤으면 좋겠는데.......(요4:16/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사마리아 여인: (마음속으로 “이 놈이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갈 데까지 가자는 거구나. 요것 봐라, 날 우습게보네.” 이 여인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그래, 나는 팔자가 사나워서 남편 같은 거 없다. 왜, 어쩔래! 네가 내 팔자 고쳐줄래?(요4:17/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이때 예수님은 준비한 결정타를 사마리아 여인에게 날리신다.

예수님: 그래, 네가 팔자가 사나워서 남편이 없다고 한 말은 사실이구나. 과거에 너는 다섯 번이나 결혼 했지만 다 깨어지고, 지금 너와 같이 사는 남자와는 혼인 신고도 안 했으니까 말이야(요4:17-18/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이 순간 비로소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이 유대인 남자가 플레이보이가 아니라 범상치 않은 자임을 깨닫는다.

사마리아 여인: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요4:19)
 

글을 마치며

복음서는 코이네 헬라어로 기록되어져 있기 때문에, 복음서에 기록된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코이네 헬라어의 어법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할 일이다. 그러나 여기에 더하여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 당시의 삶의 정황이다. 만약 이것을 놓치고 헬라어의 어법만을 염두에 두고 복음서를 해석한다면, 아무리 헬라어에 정통한 자라할지라도 해석과 번역에서 큰 실수를 범할 수밖에 없다.

필자가 쓴 “성경의 오역과 오석 바로잡기 11번(‘거라사 군대 귀신’, 오역과 오석으로 제법 착한 귀신이 되다!)과 12번(“뱀같이 지혜롭고”의 오석이 한국교회의 “어리석음”을 부추겼다!)이 헬라어뿐만 아니라 당시의 삶의 정황을 알아야 재대로 해석과 번역을 할 수 있는 좋은 보기가 될 것이다. 또 다른 보기를 하나 더 소개한다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마8:22)에서 “죽은 자들”(nekrou.j/네크루스)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그 당시에 어떤 의미로 사용된 관용어인지 알지 못한다면, 거의 모든 신학자들이 이해하듯이 “죽은 자들”을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즉 육신적으로는 살아있으나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의미한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런 이해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죽은 자들”의 의미와는 거리가 먼 잘못된 이해이다(“죽은 자들”에 대해서는 이후에 필자가 다른 글에서 설명할 것이다). 그러므로 주석자나 번역자들은 헬라어의 고유한 어법과 함께, 당시 사람들의 삶의 정황, 예를 들면 당시의 관습이나 관용어 등을 잘 숙지해서 주석과 번역을 해야 실수를 최소화할 수 있다. 필자도 힘이 닿는 데까지 계속 성경 원래의 뜻에 가깝도록 성경 원문의 본래 의미를 찾기 위해 힘 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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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