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용하는 말 중에 희소가치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많으면 가치가 없고 흔하지 않는 것이라야 가치가 있다는 말입니다. 보잘 것 없는 질그릇이라도 그것이 아주 오랜 세월전에 사용되어진 것이라면 희소가치를 따져서 수백 만원을 주고도 살 수 없으리만큼 가치있는 것이 됩니다.

요즈음은 사람의 가치가 희소가치에 역으로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점점 사람의 수가 많아져 지구가 만원이 되어지자 상대적으로 사람의 가치는 점점 하락되어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가리켜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을 가진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존재요 어느 피조물에게도 없는 영혼을 가진 것이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거라사에서 귀신들린 사람 하나를 살리기 위해서 돼지 2,000마리가 몰사하는 것도 불사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란 수가 많아졌다고 하여 가치가 떨어지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절대가치에 사는 존재요 결코 상대가치에 의해 평가받는 존재가 아닙니다. 성경에는 우리 사람을 그릇으로 비유했습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요 그 토기장이 되신 하나님에 의해 우리 인간이 흙으로 만들어진 질그릇이긴 하지만 생명이 있는 그릇이요 하나님의 형상이 담긴 그릇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가치를 혹 평가한다면 소유와 기능에 의해 평가해서는 안됩니다. 사람의 가치는 그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의해 평가되어야 합니다. 그 중심에 하나님의 형상이 얼마나 짙고, 깨끗하게 보존되어 있으며 얼마나 오늘도 밝게 빛나고 있느냐 하는 것이 평가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우냐, 얼마나 건강하냐, 어떤 기능을 가졌느냐 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판단하는 기준은 그 사람 속에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의 형상이 얼마나 깨끗이 보존되어 있느냐로 평가합니다.

사람의 행복은 그가 가진 소유나 외적인 조건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삶 속에서 보람을 얼마냐 얻느냐 하는 것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란 밥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보람을 먹고 사는 존재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보람이 없는 삶이란 육체의 길이요 동물의 삶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성경 디모데후서 2장을 보면 맨 끝에 ‘주의 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맨 처음에 디모데를 ‘아들’이라고 부른 뒤에 ‘군사’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아주 고도적인 이야기부터 시작합니다. 군사, 경기자, 수고하는 농부, 일꾼 그리고 그릇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끝에서부터 역순으로 거꾸로 해석을 해본 다면 , “그릇된 도리를 식별해서 그릇된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고 바른 도리를 늘 먹고 자기의 마음 가운데 늘 담아 둘 때에 좋은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좋은 그릇이 되는 데에는 “길”이 있습니다. 그릇된 말씀과 여러 가지 문화적인 것을 넣어서 잡탕이 된 기독교를 기독교라고 받아 가지고서는 ‘기독교도 이렇게 문화적인 내용이 있어야 하고 현란해야 하고 찬란해야 하고 화려해야 한다’는 이런 식의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무엇이 주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려고 하는 진리인가를 찾아 나가는 것입니다. 무엇이 진리인가를 찾아서 그 진리를 자기 마음 가운데 올바로 간직하고 주께서 정결케 하신 그 은혜 가운데 늘 살면 좋은 그릇이 됩니다.

밤낮 진리를 배운다고 해도 일단 자기의 문제가 있을 때 그릇된 것인지 옳은 것인지 분간도 못하고 잡된 것인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인지 기뻐 받으실 것인지도 알지 못하고 이 세상 법칙으로 자기에게 무슨 좋은 행운이 오리라고 생각되거나 자기에게 유익하다고 생각되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금까지 그렇게 입이 아프게 가르치고 누누이 설명한 것을 포기해 버리고 간단하게 자기의 이익을 좇아가는 일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귀한 그릇이 되지 못합니다. 자기를 깨끗이 지켜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만을 꼭 간직하고 여타의 잘못된 생각이나 잘못된 사상이 나를 지배할 때에는 그것을 포기해야겠다” 할 때에 깨끗한 그릇 노릇을 하는 것이고 귀히 쓰이는 그릇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은 자로서 준비되아져간다는 것은 무작정 기도하고 말씀만 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진리의 말씀만을 가지고 자기의 잘못된 생각이나 잘못된 사상을 포기할 때 준비된 자라 할 수 있는 것이고 이러한 사람이 하나님의 합한 그릇으로 쓰임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큰 집이란 큰 집안 전체를 뜻합니다. 큰 집안에서 귀히 쓰시려고 할 때 하나님의 집은 무엇을 제일로 삼느냐 하면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을 제일로 삼습니다. 그 집의 중심은 “빛과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종합적으로 하나님의 도덕적인 성격을 표시하려고 할 때에 ‘사랑’이라는 말로 표시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8)고 했습니다. 거기에서는 하나님이 곧 사랑이신 것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랑만이 전부가 아니고 또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요일1:5)고 했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정의 같은 말이 있다면 세 마디가 있다고 했습니다. 앞의 두 가지 이외에 또 하나는 “하나님은 신이시니”(요4:24) 하는 말입니다. 이 세 가지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하는 말은 하나님은 빛을 가지고 계신다 하는 말보다도 강력한 말입니다. 그것이 대표적인 말입니다. 그러기에 좋은 큰 집의 중심적인 성격과 요소는 빛과 사랑입니다. 그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의 풍성한 지혜와 지식 가운데 있을 때 빛이 있는 것이고, 그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으로 충만해 있을 때 거룩한 사랑이라는 도덕적 품성의 종합적인 것이 그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마음과 뜻과 힘과 목숨을 다하여 주를 먼저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인간인 자기를 사랑하고 보존하듯이 이웃도 하나의 인간으로, 하나의 인격으로, 하나의 가능성이 있는 은사 받은 그릇으로서도 사랑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목숨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사랑할 대상은 ‘주 너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아닙니다. 이것이 계명의 큰 뜻입니다. 그것을 마음 가운데 품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마음 가운데 품고 또한 빛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집의 가장 강한 성격을 가진 자니까 귀한 그릇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진리가 풍성하고 그 마음 가운데 하나님께 대한 열렬한 사랑이 있어서 하나님을 전부로 삼고 하나님을 가장 아끼고 살아가는 생활을 할 때에 귀한 그릇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다른 곳에서 찾지 말고 항상 이렇게 명백하게 우리에게 일러 주신 말씀 가운데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차례차례 말씀해 나가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먼저 ‘군사’에서부터 시작했지만 우리는 주의 종노릇을 하는 것이 무슨 뜻인가 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좋은 군사로서 주의 종 노릇하는 것이 무슨 뜻인가를 알고 하나님의 일을 해야지 무턱대고 일을 한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의 종으로서 확고하게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만을 따라가려는 간절한 심정을 언제든지 잃지 않고 살아갈 때 주께서는 쓰십니다.

각 사람은 주님의 뜻을 다른 데서 찾으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가르치며 알기를 원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분명히 깨달아서 주의 거룩하신 뜻대로 자기의 생활을 경영해 나가야 합니다.

세상이 질병과 죄악으로 혼탁하고 어려운 정황 가운데 세상과 구별된 성도로서 예수님의 참 제자로서 나아가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허락해 주신 그릇의 분량 가운데 모든 중심이 하나님 앞에서 믿음 안에서 진실하고 깨끗한 양심을 가질 때 하나님의 귀한 그릇이 되어져 갈 때 바른 교회나 국가가 복을 받게 됩니다.

말세에 맑고 깨끗한 양심을 지켜 미혹의 영을 물리치고 깨끗한 양심으로 하나님이 귀히 쓰시는 그릇이 되어 교회와 국가에 복을 끼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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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일 목사는 중앙대학교 법학 수학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법학(B.A) 호서신학대학원 & 개신원(M.Div) 총회신학연구원 (Th.M) 에서 공부를 하였고 경북 영주 현대중앙교회(예장 백석 ) (1993~현재) 개척하여 담임하고 있고, 성경 중심적 칼빈주의 개혁주의 교회를 지향하여 바른신학, 바른믿음, 바른생활의 공동체를 세워 가고자 정진하고 있고, 늦은감은 있지만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해설집 공동 집필 및 기타 칼빈주의 정론에 관한 서적 집필에도 신학자들과 동역하며 연구하는 사역에도 주력하고자 뜻을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