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1장 3-11절 강해

2. 지극히 선한 것들을 분별하며, 순결하고 허물이 없이 그리스도의 날 까지 이르 라.

“선할 것들을 분별하라”는 것도 9 절 말씀과 동일한 정신이다. 모든 선행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게 시행되어야한다. 그리스도인의 선행은 법도가 있고, 순서가 있고, 하나님의 뜻이라는 질서가 있다. “그리스도의 날”을 어떻게 예비할 것인가?

“지극히 선한 것들을 분별하라.”

“선한 것”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마 19:17; 막 18:19) 는 말씀과 엡 2:10 절 말씀을 생각하게 된다. 엡 2:10 절 말씀은 특별히 하나님이 죄인을 대속하신 “구속의 목표 중 하나”이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본문의 내용은 다른 내용이다.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라는 것은 “선을 행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선과 악을 분명하게 분별하라”는 뜻이다. “지극히 선한 것”이라는 말이 언급된 구절들을 보면 보다 분명하게 의미를 알게된다.

(1) “가장 귀하다”는 것을 뜻한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 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 6:26). 인간의 생명이 “지극히 귀하다”는 뜻이라. 하물며, 하나님의 독생자의 “피로 구속을 받은 성도들”의 생명이 얼마나 귀하겠느냐는 것이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마 10:28-31).

“가장 귀한 것”을 분별하라. “가장 귀한 것을 분별하여, 그 것을 취하라”는 의미이다. “귀한 것”과 “천한 것”을 분별하여 “귀한 것을 취하라”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자신의 신분”을 아는 사람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고, “하늘에 앉힘을 받은” 사람이다, “예수님과 함께” (엡 2:6).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앉은“ 자가 ”천한 생각“ ”천한 말“을 한다는 것은 결코 합당치 않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천한 삶”이라는 자가당착이고, 모순이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재창조”하신 사람이 천한 사람이 결코 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상에서 택하여 내어 버린” 사람이 더 이상 “세상”에 산다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chosen out of the world]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요 15:19).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여 사는 삶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도록 바울이 기도하고 있다.

(2) 두 번째, 지극히 선하다는 것은 “다르다”는 뜻이다.

이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 또 다른 구절은,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고전 15:14)이다. 이 다른 것을 분별하라는 것이다.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보이지 않고, 다르게 살지 않는다는 것은 비성서적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별”하신 그 구별 (성별)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무효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인들을 “다르게” 재창조하셨으면,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이다. 그 구별의 사람을 “그리스도의 날까지” 사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성도를 위한 바울의 간절한 기도이다. 왜냐하면, 이 삶만이 “구속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3)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한다는 것은 선악을 분별한다는 뜻이다.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히 5:14). 선악을 분변한다는 것은 “진리와 비진리”를 분변하는 것, “하나님의 것과 세속적인 것”을 분변하는 것 등을 포함한다. 곧 이 말씀은, “진리와 비진리를 섞지 말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것과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을 분별하라. 섞지 말라” “하나님의 말씀과 세속적 지혜, 곧 ‘철학과’ 섞지 말라”는 뜻이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골 1:8).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
냐?“(골 2:20).

“철학”과 “헛된 속임수”와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 등은 다 한 종류에 속한 “다른 세상에 속한 것들”이다. 섞지 말라. “하나님의 말씀과 자신의 지식, 경험, 전통을 섞지 말라.” 섞지 말고 분별하라. 구별하라.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가 얼마나 더 귀한 것을 깨달아 알라.” 지극히 선한 것, 곧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의견을 섞지 말라. 지극히 선한 것과 선하지 아니한 것들을 분리하라, 섞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의 간절한 기도가 되었던 것은, 마지막 때에 사람들은 “장로의 유전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섞어가다가, 결국에서는 “세상 사람의 지식과 지혜”도 하나님 말씀과 섞어버릴 때가 올 것에 대한 경고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라”는 것이 바울의 기도를 통한 하나님의 뜻이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예를 보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마15:6-9).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라. “종교 다원주의” “관용주의” “복수주의” “타협주의” “상대주의”등 성경 말씀에 비추어 보면 절대 공존할 수 없다.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라. 사도 요한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 . .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요일 2:15-17).

“지나가는 것”과 “영원한 것”을 분별하여, “좋은 것을 취하라”는 의미이다.

3. 진실하라

“진실하라”는 말은 “햇빛에 비추어 분별하여라” 라는 뜻으로, “햇빛에 비추어 보아서 깨끗케 하라”는 의미를 갖는다.

(1) 빛은 여러 종류가 있다: 달 빛, 별 빛, 촛불 빛이 있다. 전기 불빛이 있다.

그러나 어떠한 빛도 햇빛과 비교할 수 없다. “청소”할 때, “글”을 읽을 때. 희미한 빛은 잘못으로 인도하고, 청소하는 일, 곧 정결케하는 일은 불완전에 끝난다. 달빛에 비추어 보아서는 “색갈”을 구별할 수도 없고, “깨끗한 청소”도 할 수 없다.

따라서 햇빛에 비추어 판단한다는 것은: (i) “더러운 것이 없다” (ii) “거짓이 없 다”는 뜻이고 (iii) “육신에서 오는 판단이나 삶이 제거되었다” 는 뜻이고 (iv)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판단”하는 것에서 해방되었다는 뜻이다.

(2) “진실”은 “순수함” “정결함” “신실함”이라는 뜻이다. “섞인 것이 없다” “거짓이 없다”는 뜻이다. “거짓 없는 사랑” (롬 12:9) 같은 것이다. 사람에게 적용될 때, 벧후 3:1 절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둘로 너희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하게 하여 곧 거룩한 선지자의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는데 는 “진실한 마음” 곧 “다른 것이 섞여 있지 않은 마음”이 전제된다.

(3) 명사로서, “순전함” “순결함”이라는 말이 고전 5:8 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고 있다. 바울은 다음 구절에서 이 단어를 대단히 의미심장한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이 구절은 7 절과 연결된 내용의 한 덩어리이다.
7 절: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i)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바로 “교회”에 대한 참 모습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 교회의 시작은 사도행전 2 장에 기록되어 있고, 따라서 사도행전 2 장 마지막구절 47 절은,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교회에]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로 끝나고 있다.

“유월절 어린양” “누룩” “떡” 이라는 말들은 “교회”를 상징하는 뚜렷한 구약의 성경구절들로, 레위기 23 장 4 절에서 22 절 내용이 예표가 되고 있다. 레 23:5 절: “여호와의 유월절”에서 시작된다. (14 일 저녁이다). 6 절: 이 달 15 일은 여호와의 무교절이다. 10 절: 첫 열매 (reshit) 제사를 드리고, 15-16 절: 안식일 다음 날부터 50 일을 계수하여 새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17 절: 떡 둘을 가져다가 흔들지니, 고운 가루에 “누룩을 넣어서” 구운 것으로 여호와께 드리는 첫 열매요 (bikkurim). . . .”

(ii) 만약 이 “첫 열매”가 교회를 상징한다면, 레위기에서는 “누룩을 넣어서”라고 했고 바울은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라고 했는가? 간단한 해결은 하나님께서, “떡 두 개를 가져다가 요제로 드리라” (레 23:17)는 데 있다. 그리고 “누룩”은 이방인이 교회에 들어올 것을 상징하지만, 참 교회는 “누룩 없는 순전한 떡”이다. (iii) 바울의 이 고전 5:7-8 절 내용은 “신약교회의 성격”에 관한 대단히 중요한 하나님의 계시이다. 교회는 절대 누룩이 있을 수 없다. 레 23장 내용은 “가시적 교회”안에 누룩이 있을 것을 분명하게 상징하고 있다. “떡 두 개”에 누룩을 넣어서. . .” (iv) 참 교회에는 누룩이 절대 있을 수 없는 사실을 바울은 고전 5:11-13 절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 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외인들을 판단하는데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중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치 아니하랴?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고전 5:11-13)

바울이 말한 “순전함”이란 “누룩이 없는 떡” 곧 교회를 뜻한다. 본문에서 바울은 “순전함 (진실함)과 허물이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신앙을 지킬 것을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또한 “하나님께서 친히” 지키신다. 그리스도의 몸에 누룩이 있다는 것은 비정상이다. (v)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서에서,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라고 또 기도하고 있다. 이것이 그처럼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지키신다.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 (살후 3:3).

순전을 그리스도인이 지키는 길은: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 서 떠나라”(살후 3:6). 곧 분리(分離)이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간절하게 기도한 뜻이다. 순결하고 허물이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신앙을 지키라. 하나님께서 성별하신 성별을 지키라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순전하고 허물없이 신앙을 지켜간 사람이 많지 않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가 그렇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제 “교회를 위해서” 이처럼 간절한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4. 허물이 없이 그리스도의 날 까지 이르라.
“허물이 없이”라는 말은 “공격을 받을 만 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상태”를 뜻한다.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행 24:16).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고전 10:32).

그리스도인의 삶 중에 중요한 한 부분은 “자신이 넘어지지도 말고” “남을 넘어지게 하지도 않는 삶”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벧후 3:14).

왜 바울은 교회를 위하여 이처럼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있는가? 첫 째는 그리스도의 피로 교회를 그렇게 점도 없고, 흠도 없고, 순전하게 씻으셨고, 오직 지식과 총명으로 사랑이 성장하도록 새로 지으셨고, 그러한 사람들로 하나님이 친히 그의 가족을 구성하셨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다른 제사”가 더 이상 없이 단번에 영원히 온전케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피조물을 창조하셔서, 다시는 타락도 없고, 배도함도 없고 따라서, 다시는 구속도 없는 한 완전한 인간 곧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마 5:48).

이들은 다시 타락할 수 없다. 따라서 다시 구원이 필요 없는 그런 종류의 인간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한 완전하고 영원한 백성을 창조하셔야 했는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 10:11-12).

만약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창조되었다면, 교회는 당연히 “흠 없고 점 없는 성도들”이다. 흠 있고, 점 있고, 누룩 있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로 인한 의의열매가 가득하고,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이 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게 때문에 바울은 빌립보 교회 뿐 아닐라 모든 신약 교회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한 것이다. 그리고 바울의 기도는 “하나님의 감동”인 것을 우리는 믿는다. 

 

정태윤 목사 / 복음주의 형제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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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윤 목사는 정태윤 목사는 미국 달라스에 있는 서남침례교회의 목사이다. 정태윤 목사는 현대의 교회들이 하나님의 참된 말씀에서 멀리 벗어났음을 안타까워는 목회자들과 함께 ‘복음주의 형제회’를 조직하여 매년 복음을 연구하고 전파하는 세미나를 개최하고 있다. 천주교의 심각한 배도를 설명하는 데이비드 헌트의 책「짐승위에 탄 여자」을 번역하여 국내에 보급하였고, 그 외에도 「진정한 복음」,「참 복음과 거짓복음」, 「로버트 채프만: 사랑의 사도」를 번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