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세기 제 1장부터 11장까지는 보통 원역사(Urgeschichte)라 불린다(여기에 대해서는 Claus Westermann의 Genesis, Biblischer Kommentar.; Translated by John J. Scullion S. J. 《Genesis 1-11》 A Continental Commentary, Fortress Press/ Minneapolis를 참조할 것).
그런데 창세기 전반부는 창조주 하나님의 성경 계시 신앙의 근원임에도 불구하고, 그 해석이 사실 그리 간단치 않다. 수천 년 동안 성경을 믿고 읽으며 연구해 온 다양한 신앙과 학문적 배경을 가진 학자들조차 그 일치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과학기술 시대를 맞아 그 혼란은 증폭된 감이 없지 않다. 왜 이런 일이 생겨난 것일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 중에서도 창세기 1장 창조 기사는 어떻게 우리 인류에게 전해진 것인지 의문의 정점에 있다.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 전해진 첫 언어는 무엇이었으며, 창세기 1장 이전 히브리어가 없었을 당시에는 어떤 식으로 이 계시가 우리 인류에게 전달되어 온 것일까? 그리고 이 창세기 1장의 창조 기사로서의 언어 계시가 최초 전해진 당시 (에덴동산) 문화와 주변 상황 속에서의 계시 그대로 과학기술이 발달한 이 시대에도, 문자적으로 수용하고 적용하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일까?
16세기 유럽에서 근대 과학이 시작되기 전 수천 년 동안 과학적 방법론 없이 해석되어 온 창세기 전반부(1-11장)를, 오늘날 자연과학적 시각으로 수정하고 해석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이런 의문을 풀 수 있는 결정적 실마리를 성경은 제공하지 않는다. 하지만 탁월한 국내 최고의 고대 근동언어학자 장국원 박사도 성경은 진화론적 언어 발달설이 아니라, 인간 창조와 함께 이미 언어는 사용되어 왔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탁월한 역사 속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일치된 견해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장신대 구약학 교수를 지낸 문희석(文熹錫)도 근본적으로 자연과학과 대결하는 도중에 교회는 ‘창조주와 창조’ 이해를 잘못 하게 되었는데, 아직까지도 그런 그릇된 이해를 철저히 바로 잡아놓은 적이 없었다고 탄식하며 올바른 창조 이해가 여전히 미개척지로 남아 있다고 했다.
또한 인류는 창세기 1장 해석을 가로막는 결정적인 세 가지 사건을 역사 속에서 겪는다. 먼저 인류의 타락과 에덴동산 추방 사건에 따른 우주적 붕괴(죽음과 저주로 대표되는 우주적 재앙)가 일어났다. 둘째는 지구촌 생태 환경의 일대 대 격변을 초래한 창세기 대홍수 사건이다(창 6-9장 참조). 이 재앙으로 에덴동산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벨탑에서의 인류 언어 혼잡 사건이 있었다.
창조주 하나님이 창조의 초월 사건을 내재의 언어로 계시한 창세기 1장 창조 기사에 초월-내재적 요소가 혼합된 위의 세 가지 사건은 창세기 1장의 바른 해석을 무색하게 만들어버렸다. 3가지 사건 중 어느 한 가지만이라도, 창세기 1장 해석의 결정적 방해 요소라 할 수 있다. 그러니 3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할 때, 바른 해석을 기대하는 것은 암담함 그 자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인류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신 호기심이라 불리는 생득적(innate) 체질을 가지고 있다. 창세기 1장 해석의 원형을 찾는 것이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바른 해석을 향해 몸부림치면서 나아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실마리를 푸는 추적을 위한 기초 탐구 작업을 시작하려고 한다.
즉 본고는 창세기 1장의 직해(直解) 시도(주: 창세기 1장에 대한 주요한 주석들은 널려있으니 참조할 것)가 아니라, 해석의 틀을 제공하려는 것이 목표다. 따라서 바른 해석의 골격을 제공하는 작은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계속>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

그럼에도 땅에서 임무를 수행할 때 육화하기도 한다. 사람을 만지고 손을 잡아 이끌기도 한다. 이런 일은 현대의 과학수준으로는 증명이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성도"들은 이 일을 상징이 아닌 사실로 해석하고 상징이 아닌 사실로 받아들이고 믿는다. 분명 과학적으로는 현재 논리적 증명이 불가능한데도 말이다.
이러한 부분들이 믿음이 현재 과학의 수준들을 때때로 뛰어넘는 지점들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해석하고 이렇게 믿는 것이 성경적 해석이고 성경적 믿음이다. 사실 당연한 얘기를 했다.
하나를 추가하면 우리의 믿음은 거짓이나 환상이 아닌 사실을 믿는 것이고,
과학자들 중 "성도"인 과학자들은 과거보다는 현재에 더 많은 성경 기록들이 사실임을 과학적으로 밝혀내가고 있고 현재보다는 미래에 더 그러할 것이다.
쉬운 표현으로 얘기해보자. 성경말씀이 과거와 현재 미래의 "성도"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를 말이다.
한 가지 거친 가정을 해보자. 한 오천년 후까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지 않으셨고 과학기술은 엄청나게 발전해 있다고 말이다.
그때의 성도들은 아마도 그들의 이해수준에서 성경말씀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엄청나게 정확하게 기록되었다고 얘기할 것이다.
이말은 인간이 알아야 될 필요가 있는 만큼의 내용이 성경말씀에 이천년 전의 사람들에게도 현재의 사람들에게도 그리고 미래의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사실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표현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얘기이다.
모든 시대의 "성도"들이 각자의 시대에서 사실을 가장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언어가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설명으로 표현되어 기록되었다는 얘기이다.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그러하다.
현재 과학의 한계를 인정하고 현재 과학의 발전 가능성에 기대를 걸며 "겸손하게" 현재 과학적으로 밝혀낼 수 있는 것을 최선을 다해 논증하면 거기까지가
과학적으로 사실을 확인하는 한계이고 이를 인정하는 것이 정직하고 진실한 태도이며 자세인 것이다.
성문화된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해석의 틀을 제공하려는 것이 목표라고 하니,
우리 "성도"들은 이러한 최소한의 분별점을 포인트 삼아, 어떤 유용한 해석의 틀이 제공되는지 지켜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