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모 목사의 성경 오역(誤譯), 오석(誤釋) 바로잡기(15)

 

글을 시작하며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막7:2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마15:24)

위의 막7:27의 예수님의 말씀과 병행 본문인 마15:24에 대한 지금까지의 모든 해석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사역의 우선순위가 유대인이 먼저이고, 이방인이 나중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막7:27에서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먼저”가 있기 때문에 뒤에 나오는 “자녀들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가, 이방인에 대한 거절이 명백한데도, 그렇지 않다고 억지 해석을 한다. 이로써 예수님이 이방인 수로보니게 여자의 딸을 고쳐주신 일을 적법한 것으로 합리화시킨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롬1:16(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을 미리 염두에 두고, 그 틀에 맞게 적당히 끼워 맞춘 자의적인 해석이다. 마치 수사관들이 죄목을 미리 정해놓고, 거기에 맞추어 수사하는 것처럼 말이다.

“먼저”로 번역된 부사 “prw/ton”(프로톤)은 “먼저, 우선”의 의미 외에도 “특별히”의 의미도 있다. 따라서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는 “특별히 자녀로 먹게 할지니”로, 즉 ‘자녀로 먹게 해야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본문에서는 반드시 그렇게 해석해야 한다. 왜냐하면 바로 뒤이어 나오는 “자녀들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라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자녀가 아닌 개들에게 떡을 주시는 것을 거절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롬1:16은 하나님의 원론적인 구원 계획에서 복음이 유대인에게 먼저이며, 이방인에게 나중인 것을 의미하는 말씀이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사역이 유대인에게 먼저이고 이방인은 그 다음이라는 의미의 말씀이 아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할 것 없이 모든 죄인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모든 죄인을 위해 하나님 나라 말씀을 선포하셨고, 또 모든 죄인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아무튼 막7:27은,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전통적인 해석이 말하는 것처럼 ‘유대인이 먼저이고, 그 다음이 이방인이다’라는 의미는 없으며, 이와 유사한 어떤 암시조차도 없다. 오히려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자녀가 아닌 개들에게 떡을 주시는 것에 대한 명백한 거절임에 분명하다. 이와 병행본문인 마15:7에서도 예수님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막7:27과 동일한 뜻을 분명히 하셨다. 그러나 그럼에도 예수님은 곧 수로보니게 여자의 귀신들린 딸을 고쳐주심으로써 이방인인 그녀에게 자녀의 떡을 주셨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지금까지의 전통적인 해석과는 달리 예수님은 결코 이방인을 개로 여기지 않으셨으며,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방인을 거절하시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생각해 보라! 만약 예수님이 이방인을 개로 여기셨으며,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이라는 말씀이 이방인을 거절하시는 말씀이 사실이라면, 예수님은 수로보니게 여자의 딸을 고쳐주심으로써, 이방인을 거절하신 자신의 뜻과 맞지 않는 모순된 행동을, 그것도 자신이 마땅치 않다고 말한 행동을 결코 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이방인인 수로보니게 여자에게 자녀의 떡(그것이 부스러기라 할지라도, 물론 예수님은 그녀에게 부스러기 떡을 주시지 않으셨다)을 주신 것이 사실이라면, 졸지에 예수님은 마음이 조석지변으로 변하는 믿을 수 없는 인격의 소유자로, 또 잔인한 인격의 소유자로 전락하고 만다. 그렇지 않은가? 방금 마땅치 않은 일이라고 정색을 해 놓고, 금방 돌아서서 그 일을 해버리시는 것과 또 도움을 청하며 자신의 발 앞에 엎드린 불쌍한 이방인 여자를 개 취급하는 예수님을 어찌 조석지변으로 마음이 변하는 잔인한 인간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앞에서 소개한 막7:27과 마15:24의 전통적인 해석은 예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신 인격을 모독하는 심각한 오석임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런 안타까운 경우의 또 하나의 사례가 바로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일 것이다. 요11:6(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에서 예수님이 나사로의 병든 소식을 듣고도 이틀을 더 유하신 것에 대해,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렸다가 죽은 뒤에 베다니로 가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심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고 했다고 해석한다. 만약 이 해석이 옳다면,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회를 잡기 위해서, 사랑하는 나사로가 죽기까지 기다린 잔인한 인간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의 전통적인 해석도 선하시고 인자하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모독하는 어처구니없는 오역이다(필자는 기회가 되면 결코 이것이 사실이 아님을 글을 통해 입증할 것이다).
 

막7:27의 바른 의미는 무엇일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막7:27)

위 본문을 바르게 해석하는 실마리는 의외로 접속사 “kai”(카이)에서 시작된다. 한글 성경에는 빠졌지만, “예수께서 이르시되”로 번역된 “kai. e;legen auvth/|”(카이 엘레겐 아우테)는 “kai.”(카이)로 시작한다. 마가가 사용한 순접 접속사 “kai.”(카이)는 지금까지 모두가 잘못 해석해 온, 그래서 예수님이 수로보니게 여자의 간구를 거절하시는 말씀으로 이해했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찌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의 진의를 파악하는데 필요한 중요한 증거들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순접 접속사 “kai”(카이)는 앞의 내용과 뒤의 내용 중간에서 두 내용이 서로 상충하지 않는, 즉 같은 맥락의 내용임을 나타내는 순접 기능을 한다. 만약 서로 상충하는 내용이라면 역접 접속사 “de.”(데)가 사용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kai”(카이) 뒤에 나오는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찌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kai”(카이) 앞에 나오는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거늘”의 수로보니게 여자의 요구와 상충하는 거절의 내용이 아니라, 오히려 수로보니게 여자의 요구를 받아들이시는 말씀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해석해 온대로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찌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수로보니게 여자의 간구를 거절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과 또 수로보니게 여자의 믿음을 시험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예수님의 의도와는 동떨어진 자의적인 해석에 불과하다. 또 본문에서 “자녀로 먼저”를 예수님의 사역의 순서가 유대인이 먼저이며, 헬라인은 그 다음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도 엄청난 오석이다. 예수님은 여기서 뿐만 아니라 다른 어디에서도 자신의 사역 순서가 유대인이 먼저이고, 이방인이 나중이라고 말씀하신 적은 결코 없다.

그러나 필자의 해석에 반대하는 이들은 어쩌면 마10:5-6(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로 반론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말씀도 하나님 나라 사역의 순서가 유대인이 먼저이기 때문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명령하신 것이 아니다. 단지 이 말씀은 처음 선교의 길을 나서는 경험이 일천한 제자들에게, 의욕만 앞세워서 이방인의 지역이나 사마리아 지역까지 선교하려고 욕심 부리지 말고(경험이 없는 초보들은 그럼에도 의욕이 앞서서 무리하게 욕심을 부리다가 일을 망치는 경우가 흔하다), 비교적 사역하기 쉬운 이스라엘 지경에서 먼저 선교하라는 말씀이다. 다시 말하면 마10:5-6은 롬1:16처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순서에 따라 “유대인에게 먼저 가야 한다”는 의미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마땅치 아니하니라”(막7:27)에서 “마땅치”로 번역된 형용사 “kalo.n”(칼론)의 의미는 “선한, 옳은”(good, right) 등이다. 그러므로 한글 성경이 번역한 “마땅치”는 조금 미진한 번역이다. “마땅치 아니하니라”(evstin kalo.n)/에스틴 칼론)를 원문대로 직역하면, “선하지(옳지) 아니하니라”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마땅치 아니하니라”는 말씀을 하신 뒤에, 곧 수로보니게 여자의 딸을 고쳐주셨으므로. 처음에는 하지 않겠다고 하신 ‘악한(옳지 않은) 일’을 하신 것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마땅치 아니하니라”를 수로보니게 여자의 간구를 거절하는 의미로 해석한다면, 예수님이 수로보니게 여자의 딸을 고쳐주신 일은 선하지(옳지) 않은 일, 즉 범죄가 되고 말 것이다. 더구나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원래는 계획에도 없었던, 그래서 해서는 안 되는 “마땅치(선하지, 옳지) 않은 일”을, 수로보니게 여자의 멋진 말에 설득되어서 저질러 버린 꼴이 되고 만다. 또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아무리 시험이 목적이라 할지라도 예수께서 수로보니게 여자를 “개”로 지칭한 것은 예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신 성품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무리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형상을 갖고 있는 한 인간을 개로 지칭하는 것은 가증한 유대인들이나 할 수 있는 지독한 인격 모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다른 유대인들처럼 이방인인 수로보니게 여자를 개로 지칭했다는 해석은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과 그의 선하사고 인자하신 성품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래서 예수님의 인격을 모독하는 오석이다.

“개들에게”가 이방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증거는 또 있다. 그것은 본문의 사건보다 먼저 있었던, 예수님이 로마 군인 백부장의 하인의 병을 고쳐주신 사건이다. 만약 “개들에게”가 이방인을 의미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로마 군인 백부장이 예수께 간구했을 때(마8:5-6/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와하나이다)에도, 예수님은 수로보니게 여자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이방인인 백부장에게도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말씀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절 대신 오히려 이방인 백부장의 간구를 쾌히 받아주셨다(마8:7/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이는 예수님이 수로보니게 여자에게 하신 “개들에게”가 결코 이방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유력한 증거이다. 또 예수님은 수로보니게 여자 사건 이후에도 이방인의 지역(갈릴리 호수 동쪽 해변에 인접한 데가볼리 지역)에서 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쳐주셨으며(막7:31-37), “칠병이어의 기적”(막8:1-9)도 베풀어 주셨다. 이도 예수님이 수로보니게 여자에게 말씀하신 “개들에게”가 이방인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강력한 증거들이다.

그러면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슨 의미인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면, 여기서 “개들”은 예수님의 축귀 사역을 “저가 바알세불을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막3:22)라고 비난하므로, 성령으로 일하시는 예수님을 사탄의 졸개로 경멸하며 성령을 모독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같은 자들을 의미한다. 이들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거룩한 것과 진주를 발로 밟으려고 한 자들이다(마7:6/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따라서 27절(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찌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은 예수께서 지금까지 해 오신 사역, 즉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같은 자들에게, 이들에게 자녀의 떡을 주는 것은 마땅치 않는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떡을 주시지 않으시고, 세리들, 죄인들, 창기들, 이방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떡을 주신, 그리고 곧 수로보니게 여자에게 하나님 나라의 떡을 주실 예수님 자신의 사역의 정당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하시며, 확인하시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적대함으로써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더러운 개들과 같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하나님의 자녀의 떡을 베푸는 것은 마땅한(옳은) 일이 아니며,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믿음으로 예수께 나아오는 자들에게 자녀의 떡을 베푸는 것이 마땅한(옳은) 일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사실상 수로보니게 여자의 간구를 받아들이셨다. 그러나 수로보니게 여자는 그동안 유대인들에게 수없이 들어왔던 “개”라는 말의 선입견 때문에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자신의 간구를 거절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예수님은 수로보니게 여자가 오해하리라는 것을 예상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방인을 거절하시는 것이 아니며, 그러므로 선하시고 인자하신 그의 성품과 어울리지 않게 “개”라는 모욕적인 말로 수로보니게 여자를 시험하신 것은 더더욱 아니다.

“개들에게”로 번역된 “kunari,oij”(퀴나리오이스)는 “kuna,rion”(퀴나리온)의 ‘복수형’이다. 그러나 26절의 수로보니게 여자의 딸(qugatro.j/뒤가트로스)은 ‘단수형’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개들에게”(kunari,oij/퀴나리오이스)는 수로보니게 여자의 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도 그랬지만(마3:7/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23:33)라고 책망하셨다. 왜냐하면 그들은 독사의 자식들처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임한 하나님 나라를 공격하며, 하나님을 모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평범한 이스라엘 백성이나 이방인들 어느 누구에게도 “개, 독사의 새끼” 등의 말로써, 그들의 인격을 모독하신 적은 결단코 없으시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겸손하게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5절에서 “그 발 아래 엎드리니”의 “엎드리니”로 번역된 “prose,pesen”(프로세펜센)의 원형 “prospi,ptw”(프로스핖토)는 신적인 존재 앞에 부복할 때 주로 사용된다. 이는 수로보니게 여자가 예수님을 신적인 존재(메시아)로 믿고 엎드렸음을 의미한다), “주여”(ku,rie/퀴리에)라고 부름으로써(마가복음에서는 어떤 사람도 예수님을 “주여”라고 호칭하지 않았다. 수로보니게 여자가 예수님을 “주여”라고 호칭한 유일한 사람이다), 예수님의 신성과 메시아 되심을 고백하게 될 수로보니게 여자를 향해, 예수님이 “개”라는 말로 그녀의 인격을 모독하셨을 리는 결코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개들에게”는 유대인들의 말처럼, 결코 ‘이방인들’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다.

“개들에게”로 번역된 “kunari,oij”(퀴나리오이스)의 원형 “kuna,rion”(퀴나리온)은 예수님이 수로보니게 여자를 생각해서,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이 이방인에게 사용했던, 썩은 고기를 먹고 사는 야생 들개를 의미하는 “ku,wn”(퀴온)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좀 순화한 “애완용 개”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구약 시대 때부터 개를 증오해 온 유대인들이 “개”를 애완용으로 기른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유대인들에게 개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야생 들개를 의미하는 “ku,wn”(퀴온)이며(빌3:2/개들을/ku,naj/퀴나스/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또 하나는 본문에 나오는 “kuna,rion”(퀴나리온)이다. 유대인들에게 “kuna,rion”(퀴나리온)은 애완용 개가 아니라, 부잣집에서 음식물 쓰레기 처리용이나 방범용으로 기르는 개(house dog)를 의미한다. 미리 말한다면, 여기서 예수님이 야생 들개를 의미하는 “ku,wn”(퀴온) 대신에 “house dog”을 의미하는 “kuna,rion”(퀴나리온)을 사용하신 까닭은, 수로보니게 여자를 동정한 나머지 “야생 개”(ku,wn/퀴온)를 좀 순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이스라엘 집” 안에서 설치고 다니면서 하나님의 아들을 모독하는 가증스러운 위선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지칭하기 위한 일종의 언어유희이다. 아래 마15:24에 대한 설명을 보라.
 

막15:24의 바른 의미는 무엇일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마15:24)

마가는 막7:27을 “kai.”(카이)로 시작함으로써, 뒤에 나오는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찌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수로보니게 여자의 간구를 거절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용하는 말씀임을 나타냈다. 반면에 마태는 마15:24을 “de.”(데)로 시작함으로써, 뒤에 나오는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수로보니게 여자를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말씀임을 나타내고 있다.

마태가 본문에서 역접 접속사 “de.”(데)를 사용한 것은 “de.”(데) 앞에서 제자들이 “그 여자가 소리지르오니 보내소서”라고 말한 것처럼, 이방 여자에 대한 제자들의 부정 반응과 “de.”(데) 뒤의 예수님의 긍정 반응이 서로 대립됨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따라서 “de.”(데) 뒤에 언급된 예수님의 말씀(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은 “de.”(데) 앞에서 이방인을 거부하면서 “보내소서”라는 제자들의 말과는 정반대로, ‘아니다. 내가 그녀에게 보냄을 받았다’라는 뜻의 말씀이다.

이 사실을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증거가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로 번역된 “ouvk avpesta,lhn”(우크 아페스탈렌)에서 “avpesta,lhn”(아페스탈렌)이 “보내다”의 의미를 가진 동사 “avposte,llw”(아포스텔로/send)의 ‘신적 수동태’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해석처럼,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가 이방인에게로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는 의미가 옳다면, 예수님은 이방인에게로 보내지 않으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셈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반하여, 이방인 수로보니게 여자의 딸을 고쳐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수로보니게 여자의 딸을 고쳐주셨을 리는 없지 않겠는가?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은 누구를 가리키는 말인가? 먼저 살필 것은 이 말이 유대인들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는 점이다. 출12:37-38(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에서 발행하여 숙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요 중다한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생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을 보면, 이미 이때부터 “중다한 잡족”, 즉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집”에 포함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은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포함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스라엘 집”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이스라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영역으로서의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은 이스라엘 국경 밖에 있는 양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밖에 있는 양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단순히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이스라엘 집의(oi;kou VIsrah,l/오이쿠 이스라엘) 잃어버린 양”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잃어버린 양은 집 밖에서 잃어버려지기 때문에(집 안은 주인의 확실한 통치 영역이므로, 집 안에서는 결코 양이 잃어버려지지 않는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 이런 이미지를 주지시키기 위함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은 유대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하나님의 통치) 밖에 있는 죄인들, 세리들, 창기들, 이방인들 모두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은 니고데모와 같은 유대인들을 비롯해서 삭개오와 같은 세리들, 38년 된 병자와 같은 죄인들,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창기들, 로마 장교 백부장과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인, 그리고 수로보니게 여자와 같은 이방인들 모두를 의미한다는 말이다.

마15:24의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은 눅15:4(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에서 “하나를 잃으면”의 잃어버린 양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 양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이 아니다. 왜냐하면 눅15:7(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의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은 사실상 바리새인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이 말들이 지금까지의 해석에 익숙한 독자들에게는 당혹스러울지 모르겠다. 그러므로 때가 되면 눅15장의 예수님의 비유 3가지도 글로 설명할 것이다. 특히 예수님의 비유에서 오역과 오석이 많은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물론 예수님의 말씀에 중요하지 않은 말씀은 없겠지만, 특히 예수님의 비유는 거의 하나님 나라에 관한 가르침이므로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의 비유”에서 꼭 놓치면 안 되는 사실 하나는,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을 존경하던 유대인들은 바리새인들을 “회개할 것 없는 의인”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회개할 것 없는 의인”은 예수께서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책망하신 바리새인들을 지칭하는 관용어였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 건강하고 의로운 “의인”이라고 여기는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없이 “이스라엘 집” 밖에서 헤매고 있는 병든 죄인, 즉 “잃어버린 양”을 부르러 오셨다(막2:17/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이들 모두를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이들 모두를 위해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셨고, 이들 모두를 위해 대속 제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글을 마치며

이렇게 성경의 오역과 오석은 때로 인류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시고, 대속 제물로 처참한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상한 인격 파탄 자로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을 오역한 번역 성경을 읽거나, 오석된 설교를 듣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성경의 오역과 오석’은 하나님의 진리를 왜곡시킴으로써 영생의 문제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성경의 오역과 오석이 크게 문제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진리 문제가 아닌 사변적인 문제를 다루는 성경 본문이라면 오역하거나 오석해서 설교하더라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중요한 교리를 결정할 수 있는 본문이나, 또 그것을 지원하는 본문이 오역되거나 오석 된다면, 대단히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하나님의 나라’가 전혀 엉뚱하게 왜곡되어, 교회가 ‘다른 복음’을 ‘참 복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오역과 오석의 또 한 가지 심각한 문제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신성과 인성을 심각하게 왜곡, 모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오역과 오석으로 파렴치한 인격으로 오도되어 버린 예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신 인격을 원래의 고상한 인격의 자리로 돌려놓기 위해 이 글을 썼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눅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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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