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금주 31일은 종교개혁 503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날을 맞이하게 되면서 새삼 되새겨 보는 단어가 ‘개혁’(改革)이라는 단어이다.

사전적 의미로는 ‘법, 제도, 조직 따위를 새롭게 그리고 보다 좋게 고친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일반적이고 통상적인 말로는 ‘뜯어서 고친다’ 는 의미로 소위 그릇됨과 과오 나아가 부정과 부패를 척결하고 온전하고 합당한 것으로 새롭게 세우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지만 성경적 개혁은 위와 같은 의미로서의 개혁이 아니며 먼저 종교개혁자들이 일으킨 종교개혁의 취지가 아닌 것이다. 교회의 개혁, 교단의 개혁, 목회자의 개혁, 성도의 신앙의 개혁 그리고 교회의 생활 및 기타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의 개혁은 그릇된 옛 구습을 성경의 진리 가운데로 다시 되돌아오는 회복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잣대로 삼고 진리 안에서 서는 것이며, 나아가 그 진리 가운데서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로움을 회복하는 것이 바로 참된 개혁의 의미인 것이다.

하지만 현시대는 이러한 바른 개혁의 바탕 안에서 교회와 기타의 일들이 개혁되지 않고 있으며 더욱 안타깝고 어처구니 없는 일은 다른 복음을 들고 전하는 자들이 너무도 많다는 것이다. 성경에도 보게 되면 이런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나오는데 바로 갈라디아 1장 6절-10절이다. 성경은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은 이 같은 ‘은혜의 복음’을 떠나 ‘다른 복음’ 즉 ‘공로의 복음’을 따르고 있었다.

그것은 곧 ‘거짓 선생들’ 즉 초대교회 안에 있던 율법주의자들이 주장한 것인데, 그들의 소위 복음이란 것은 사도행전 15장 1절에 나타나는 대로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 는 것이었다. 그들은 사람이 구원 얻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것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바로 그 믿음에다가 ‘율법 준수’라는 것을 구원을 성립시키는 조건으로 하나 더 첨가시킨 것이다. 어떻게 보면 별 나쁜 말 아닌 것처럼도 보이지만, 사실에 있어서 이 주장은 지극히 심각한 오류를 내포하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이들도 수도사나 청교도의 신앙을 본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다 보니 그들의 행위를 구원으로 몰아가는 어처구니없는 신학으로 많은 신자와 신학도들 병들게 하고 있다. 이같이 이런 ‘다른 복음’에 넘어가고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정말 깜짝 놀라 뒤로 자빠질 일이다. 내가 「다 이루었다」라고 십자가상에서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선언하신 그대로 그리스도의 공로는 이미 조금도 모자람 없이 100퍼센트 완성된 공로였다. 그 완성된 구원의 공로 때문에, 구원은 이제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가 된 것이다.

그러니 그 같은 ‘은혜의 복음’을 ‘공로의 복음’으로 바꾸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구원의 주권자이시며 완성자이신 하나님 당신에 대한 크나큰 모욕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은 실제로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다. ‘은혜의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으로 떠나는 그 순간부터 이들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변절하고 돌아선 배교자가 된 것이다.

은혜의 복음으로 우리를 불러 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망각하고 자신의 선행과 공로를 내세우는 자, 오로지 십자가의 은혜만을 기억하며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 돌리며 살아야 할 위치에서 탈주한 자, 이미 하나님과 원수가 된 자이다. 아무리 같은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도 그 복음이 다르면, 사람이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를 선포하는 이 요긴한 복음의 교리가 다르면, 실상은 다른 신을 믿고 있는 우상 숭배자와 다를 것이 없는 이단에 불과한 것을 똑바로 깨달아야 할 것이다.

‘다른 복음이란 것은 있을 수 없다.’ 바꾸어 말하자면 ‘참된 복음은 오직 한 가지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것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믿음으로써 구원받는다.’ 라는 이 은혜로운 복음 외에 다른 그 어떤 구원 얻을 복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하기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내 그 이단을 가르치는 거짓 교사들의 행위는 그저 복음을 조금 수정하는 것이나 약간 첨가하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그 본질을 뒤엎어 버리고 다른 것으로 대체해 버리는 행위와 꼭 같았다 라고 주장하는 바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갈 1:7b) 하였다.

그 지극히 순수하고도 완전한 복음에 무엇을 조금이라도 첨가한다든지 수정한다는 것은 곧바로 그 복음을 근본적으로 뿌리 뽑아 흔드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것 없는 행위가 되고 마는 것이다. 사탄은 예나 지금이나 성도를 유혹하기 위하여 항상 양면작전을 쓰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신앙생활 잘하고 있는 ‘성도의 육신’을 죄짓는 자리로 끌어 내리려고 유혹하는 동시에, ‘성도의 영혼’에 대하여서는 그저 약간만 다르게 보이는 다른 복음에 이끌려가도록 유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처럼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하는’ 행위는 곧 바로 ‘너희를 요란케 하는’ 행위 즉 신자의 영혼에 대한 직접적인 위험이라고 경고한 것이다. 교회를 흔드는 최고의 시험은 교회 밖에서 교회를 비난하고 핍박하는 무리들이 아니라 항상 바로 교회 안에서 교회의 그 참된 복음을 변질시키려는 이단에 의하여 비롯되어져 왔던 것은 과거와 현재를 통하여 교회사에서 너무나도 뚜렷한 실상이었다.

지금 기독교계 안에서도 “교리는 따지지 말고 그저 모든 기독교가 하나가 되자.”라는 주장이, 보수적이라고 하는 교단 안에서 조차도 그 소리를 높이고 있다. 정말로 기가 찰, 어처구니없는 소리이다. 더욱이 나름 개혁주의 신학자라는 부류 가운데, 나아가서 목사들이 그런 말로 교인들을 혼란스럽게 하니, 정치가들도 “사상 따지지 말고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무조건 하나가 되자.”라는 말로 국민들을 오도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나라가 헌법에 입각한 정통한 국시가 바로 서 있지 않으면 결국 국민이 분열되어져 참된 자유 민주주의적 국가라 할 수 없듯이, 교회는 복음 진리를 명확하게 세워 놓지 않으면 결국 스스로 혼돈의 암흑 속에 놓여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 십자가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이 수만 명 모여 보았자 그 교회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할 구원의 복음이 변질되어 있는 교회들과 아무리 손을 잡고 교단을 합쳐 보았자 그게 무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되겠는가? 구원 복음이 없는 교회 설립, 바른 복음이 중심이 되지 못한 교단 연합이라는 것은 실상은 사단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꼴만 연출하게 될 뿐인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이 재삼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강조한 것처럼 ‘만일 누구든지…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갈 1:7, 9절) 따름인 것이다.

독생자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그 귀한 교회를 뿌리 채 흔들려고 하는 이단 하나님께서는 이런 ‘다른 복음’ 전하는 자들을 어떻게 그냥 보아 넘기실 수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단에 대한 저주는 어떤 ‘옹졸한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개인적 감정 표출’인 것이다.

바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단과 그 ‘다른 복음’을 따라가는 자들이야말로 그런 무서운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줄을 깨닫고, 더욱 이단에 대하여 영적 신경을 곤두세우고 그릇된 성경해석과 사람을 좋게 하고 자신들의 사상을 돋보이게 하려는 신학을 조심하며 경계하며 피할 줄 아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임을 다져 보면서 다시 한번 우리에게 종교개혁의 5대 표어를 심비(心碑) 새기게 한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ㆍ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ㆍ오직 믿음(Sola Fide)ㆍ오직 은혜(Sola Gratia)ㆍ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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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일 목사는 중앙대학교 법학 수학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법학(B.A) 호서신학대학원 & 개신원(M.Div) 총회신학연구원 (Th.M) 에서 공부를 하였고 경북 영주 현대중앙교회(예장 백석 ) (1993~현재) 개척하여 담임하고 있고, 성경 중심적 칼빈주의 개혁주의 교회를 지향하여 바른신학, 바른믿음, 바른생활의 공동체를 세워 가고자 정진하고 있고, 늦은감은 있지만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해설집 공동 집필 및 기타 칼빈주의 정론에 관한 서적 집필에도 신학자들과 동역하며 연구하는 사역에도 주력하고자 뜻을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