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3년 7월 1일 영국 여러 지역의 학식있고 존경받는 신학자들이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소집된 실질적인 원인과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1639년, 1640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들, 그리고 잉글랜드 내부의 모든 정치적 갈등과 혼란들이 근본적으로 국교회와 장로교회, 국교회와 청교도 운동의 신학의 차이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사이의 1639년과 1640년의 두 번의 전쟁도 찰스 1세가 적극 옹호하는 잉글랜드의 국교회와 스코틀랜드에 자리 잡은 장로교회 사이에 타협할 수 없는 신학의 차이 때문이었다. 두 나라의 전쟁으로 인해 붉어진 찰스 1세와 잉글랜드 의회 사이의 심각한 갈등도 왕이 지지하는 국교회와 의회가 지지하는 청교도 운동 사이의 타협할 수 없는 신학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두 나라의 관계, 그리고 잉글랜드의 국교회의 수호자 찰스 1세와 장로교회파 청교도 신자들이 다수인 의회의 관계는 계속 악화되었다.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달을 때, 의회의 지도자들은 국가의 혼란을 평정하기 위해 모두 인정하고 따를 수 있는 신앙의 일치가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예배와 교리를 통일시키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라는 인식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프랑스, 그리고 신대륙의 신학자들까지 참여하여 신학적인 문제들을 토론하기 위한 전국의 명망있는 신자들의 대회였던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1643년 7월 1일에 첫 모임을 가지게 된 배경을 이와 같이 이해해야 한다.

1641년 무렵부터 존경받는 신학자들로 구성된 전국 총회를 소집하여 교회와 국가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교리와 신학의 일치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1641년 아일랜드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잉글랜드 의회는 군대 파견에는 동의하나 군 지휘권은 왕이 아닌 의회에 있다고 주장하는 ‘대항의서’(Great Remonstrance)를 왕에게 제출하였다. 찬성 159표, 반대 148표로 가결되어 왕을 분노하게 만들었더 그 문서에 “이 나라의 가장 신중하고 경건하며 학식이 깊으며 현명한 신학자들의 전체 대회(synod)가 우리와 같은 종교를 고백하는 외국 지역 출신 일부 인사의 도움을 받아 교회와 평화와 선한 정치를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논의할 것”을 왕에게 요구하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잉글랜드의 정치 지도자들의 그러한 상황 인식으로 인하여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탄생되었다.

1642년 2월 12일에 개최된 의원들의 회의에서 어떤 신학자들을 어떤 방식으로 선발하여 한 자리에 모이게 할 것인지에 대하여 의논되었다. 잉글랜드 각 주의 귀족들과 일반 시민들이 신학자들을 추천하고 의회가 선택하는 방식을 취하기로 했다. 선택된 신학자가 반드시 추천자들의 지역 출신일 필요는 없고 다른 지역 출신이어도 무방하다고 결정했다. 런던과 가까운 지역에 거주하는 신학자들이 유리하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런던이나 다른 어떤 특정 지역의 신학자들이 더 많이 추천된 것은 아니었다. 각 지역의 귀족들과 시민들에 의해 추천되고 의회에 의해 선택된 신학자들 대부분은 장로교회주의 청교도들이었다.

1642년 6월 의회가 종교개혁에 관한 내용을 담은 또 하나의 법안을 통과시켰으나 찰스 1세가 거부하였다. 그러므로 의회는 스스로의 권위에 근거하여 단독으로 입법 과정을 추진하였고 1643년 5월 13일 그 법안을 하원에 제출하여 그해 6월 12일 상원의 승인을 받았다. 그 법안의 명칭은 다음과 같았다.

“영국 교회의 치리와 예배 형식을 결정하며 그 교리에서 거짓된 비평과 해석을 일소하기 위하여 의회의 상하양원의 자문 기관으로서 성직자들과 기타 인사들로 된 대회를 소집하는 법안”

그 법안의 내용과 의미가 그 법안의 긴 명칭 속에 드러나 있었다. 1643년 6월 12일 의회가 영국의 교회의 신앙과 교리의 일치를 위한 토론, 그리고 의회와의 협의를 위해 잉글랜드, 웨일즈, 아일랜드의 학식이 풍부하고 경건한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의 대회가 7월 1일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 잉글랜드 국교회 예배당)에서 개최하기로 결정되었다.

1643년 6월 12일의 회의에서 그 모임의 명칭은 결정하지 않았고 단지 모임의 장소만 결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진행되었으므로 그 모임은 자연스럽게 웨스트민스터 총회로 호칭되었다. 의회는 6월 12일의 회의에서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부여하는 임무에 대해 논의하였다. 의회는 우선적으로 엘리자베스 여왕 때 작성된 국교회의 신앙고백 39개 조를 개정하는 작업을 웨스트민스터 총회 신학자들에게 위임하였다. 잉글랜드 내부의 갈등,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사이의 갈등이 모두 교회의 신학과 교리의 차이에서 비롯되었으므로 의회는 웨스트민스터 총회 신학자들에게 교회의 교리와 신학에 과한 연구와 토론을 부탁하였다. 의회는 웨스트민스터 총회 신학자들에게 국가의 정치와 관련된 일을 다루게 하지 않았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기능과 임무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당시 잉글랜드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국왕 찰스 1세의 권위는 이미 땅에 떨어진 상태였다. 장로교회주의 청교도 평신도들이 다수였던 의회가 왕을 심히 비판하고 질책하였고 결국 양측의 군사행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왕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적극 옹호하였던 국교회의 감독체제는 이미 실질적으로 붕괴되었다. 그렇다고 국교회를 대체할 다른 교회가 잉글랜드에 세워지지도 않은 상태였다. 청교도들 가운데 장로교회파들이 가장 많았다. 그러나 잉글랜드에 단 하나의 장로교회도 세워지지 않았다. 장로교회파들과 가장 예민하게 논쟁하게 될 회중교회파들의 교회도 아직 세워지지 않았다.

국가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잉글랜드의 교회의 교리와 예배를 일치되게 해야 할 필요성이 분명했으나, 교회가 스스로 그 일을 할 수 있는 형편이 전혀 아니었다. 그 일을 추진할 수 있는 사람들은 오직 국왕을 대적하고 있는 의회의 의원들이었다. 그래서 의회가 전국의 신학자들의 대회를 결정하고 주관한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어떤 교단 목회자들의 대회가 아니었다. 교회들이 스스로 만들어 낸 모임도 아니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의회의 명령과 요구를 수행하는 일종의 의회에 부속된 하나의 위원회와 비슷한 기구였다. 웨스트민스터 총회 신학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의회가 자신들에게 부과하는 예배와 교리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여 그 결과를 의회에 보고하는 것뿐이었다. 그것이 수용되거나 수용되지 않거나 하는 것은 전적으로 의회의 소관이었다.

그런데 한국의 대부분의 장로교회 목회자들은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장로교회를 위한 장로교회 신학자들의 대회였다고 생각한다. 장로교회 신앙고백을 만들기 위해 소집된 신학자들의 회의였다고 오해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자들의 총회를 결정하고 주관한 의회의 구성원들 다수가 장로파 청교도들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의회에 의해 선택되어 웨스트민스터 총회로 소집된 신학자들 다수가 장로파 청교도들이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과 장로교회 신앙고백을 만들기 위해 장로교회 신학자들의 대회였다는 추정이나 오해는 너무 거리가 먼 것이다.

당시의 사건 하나를 살펴보면, 의회와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의회에 의해 선택되어 총회에 참석한 다니엘 휘틀리(Daniel Featley)라는 인물을 의회가 체포하여 런던탑 감옥에 가두어 버린 사건이다. 휘틀리는 1643년 8월 잉글랜드 의회와 스코틀랜드의 동맹에 반대하다가 투옥되었다. 의회가 웨스트민스터 총회를 소집하였고, 의장과 모든 회원들을 의회가 선택했고, 신학자들의 임무를 의회가 결정하였고, 신학자들의 임무의 범위와 한계를 의회가 정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하는 사건이다. 그런데 한국의 장로교회 목회자들은 장로교회가 장로교회 신앙고백을 만들기 위해 웨스트민스터 신학자들의 대회를 스스로 개최한 것으로 알고 있다.

잉글랜드 의회에 의해 소집된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예배모범(1645년), 정치모범(1647년), 신앙고백(1647년), 소요리문답(1648년), 대요리문답(1648년)을 작성하여 의회의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수행했던 그 모든 작업들의 열매는 하나도 만들어지지 못하였다. 웨스트민스터 총회 신학자들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배경과 신학에 대해 깊이 연구한 학자 로버트 래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 소집의 목적을 생각하면,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결과는 완전한 실패작이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황당하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다음에 설명하기로 하자.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바른믿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