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23 07:19 (금)
“율법을 완전하게 하려 함이니라”가 ‘예수님이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러 오셨다’는 의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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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을 완전하게 하려 함이니라”가 ‘예수님이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러 오셨다’는 의미인가?
  • 이창모
  • 승인 2020.10.07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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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의 성경 오역(誤譯), 오석(誤釋) 바로잡기(14)

글을 시작하며

“JMT”는 ‘작업의 과정을 여러 가지 단계로 분류하여 작업개선의 합리화를 기하는 교육방법’을 뜻하는 “Job Method Training”의 약자다. 그러나 요즈음 신세대가 친구들끼리 대화하며 “JMT”라고 말했다면, 전자와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 요즈음 신세대가 쓰는 “JMT”는 “존맛탱”을 영어 발음대로 약자화한 것이며, 어떤 음식이 “너무나도 맛이 좋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요즈음 신세대가 “우리 담임선생님 갈비야!”라고 했다면,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구세대들은 “우리 담임선생님이 바짝 말랐어!”라고 이해할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 신세대가 쓰는 “갈비”는 “갈수록 비호감”이라는 의미이다.

만약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이 신세대의 용어로 “JMT”와 “갈비”를 말씀하셨는데, 성경 번역자는 “JMT”를 “Job Method Training”으로, “갈비”를 “마른 사람”으로 번역했다면 어떻게 될까? 또 번역자가 “JMT”와 “갈비”를 글자 그대로 옮겨놓았는데, 설교자가 “JMT”를 “Job Method Training”으로, “갈비”를 “마른 사람”으로 오석했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오역한 성경을 읽는 자나, 오석한 설교를 듣는 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의 진의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오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런 어처구니없는 오역들이 번역 성경에 상당수 있으며, 오석된 설교들도 설교단에서 상당수 남발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의 연약한 한계로 인해 원문을 오역하거나 오석하는 실수를 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번역자들이나 설교자들은 오역과 오석을 줄이려고 조심스럽게 성경 말씀에 접근하려고 애써야 한다. 왜냐하면 자칫 중요한 교리를 결정하는 어떤 성경 구절이 오역되거나 오석되었을 경우에는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이단적인 교리들이 얼마든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회중파 청교도들의 “능동순종”도 이 범주에 속할 것이다. 아래서 다루려고 하는 마5:17의 오역과 오석도 회중파 청교도들의 “능동순종”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보여 진다.
 

마 5:17의 일반적인 해석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5:17)

마5:17의 일반적인 해석은 아래와 같다.

마태의 내러티브에서 “성취하다, 이루다”란 용어는 하나님의 역사적 계획에서 예수의 의미에 대한 중요한 단서가 된다. 예수의 삶과 사역이 구약 성경의 예언과 소망을 이루기 때문이다.....“성취하다, 완전하게 하다”라는 개념은 예수의 순종(율법을 지키는 것)을 단지 일컫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것을 포함할지라도 말이다.(마이클 윌킨스)

이 예수님의 율법 성취에 대한 언급은 신약 계시의 보다 나은 해석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설명된다는, 말하자면 예수님 자신의 율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과 신자들에 대한 율법의 의의가 밝혀진다는 의미에서 그것을 보다 광범위하게 이해할 수 있다.(헤르만 리델보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율법의 요구 조건을 충족시켰습니다.(척 스미스)

왕께서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은 다음과 같은 의미로 말씀하셨을 것이다. “나는 율법이 실현하고자 했던 모든 것을 완성시키고자 온 것이다.” 이때에 그 사람들은 그 왕의 계획 속에 십자가가 있는 것을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캠벨 몰간)

거룩한 율법을 거절하는 것이 그의 의도가 아니라 오히려 율법이 요구하는 바로 그 의의를 성취하고 레위의 제사 제도가 예표하였던 것을 이루며,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예언을 완성하기 위해서 그는 성육신하신 것이다.(아더 핑크)

단지 구약의 본문들이 예수에 의해서 이루어졌음을 입증해 보이는 변증적 관심 이상의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오히려 예수께서 구약 전체에 의해 증언되었고, 구원 시대를 위해 약속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목표 달성이라는 포괄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양용의)

위에 소개한 것처럼, 또 다른 주석자들의 해석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사람들에 따라 해석은 조금씩 다르다 할지라도 한 가지 일관된 공통점은 “폐하려”와 “완전하게 하려”를 율법과 직접 관련해서 이해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폐하려”와 “완전하게 하려”의 해석은 서로 조금씩 다르다할지라도, 아무튼 “율법” 자체를 “폐하려” 하거나, “완전하게 하려”는 것으로 이해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은 결코 “율법” 자체를 “폐하려” 하거나, “완전하게 하려”고 오셨다는 의미가 아니다.
 

마5:17의 바른 의미는 무엇일까?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5:17)

당시 예수님은 위의 말씀을 헬라어가 아닌 히브리어로 말씀하셨을 것이다(일반적으로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통용어는 아람어였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는 아람어가 아니라 히브리어임을 확신한다. 왜냐하면 이를 입증할 확실한 증거들이 여럿 있기 때문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예수님 당시의 언어는 ‘아람어’가 아니라 ‘히브리어’였다!”라는 제목으로 짧은 글을 쓸 예정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폐하다”는 히브리어 “메바텔”이며, “완전하게 하다”는 “메카옘”이었을 것이다. 마태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히브리어 “메바텔”을 헬라어 “katalu,w”(카탈뤼오)로, “메카옘”을 “plhrw/sai”(플레로사이)로 번역해서 기록했을 것이다.

우리 성경에서 “폐하러”로 번역된 헬라어 “katalu/sai”(카탈뤼사이)의 원형 “katalu,w”(카탈뤼오)의 사전적인 의미는 “파괴하다, 해체하다”(destroy, tear down) 등이다. 히브리어 “메바텔”도 이와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또 우리 성경에서 “완전하게 하려”로 번역된 헬라어 “plhrw/sai”(플레로사이)의 원형 “plhro,w”(플레로오)의 사전적인 의미는 “성취하다, 이루다”(fulfill, make come true) 등이다. 히브리어 “메카옘”도 이와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마5:17의 “폐하러”와 “완전하게 하려”가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위에서 소개했던 여러 해석들, 즉 율법 자체를 폐하거나 완전하게 하려 오셨다는 해석은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용된 단어들의 일반적인 의미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마5:17에서처럼 예수님 당시에 율법과 관련해서 사용되는 히브리어 “메바텔”과 “메카옘”은 유대인 랍비들이 “율법” 해석에 대하여 서로 논쟁을 벌일 때 사용하던 ‘전문 용어’(관용어)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마5:17에 대한 위의 해석들, 즉 율법 자체를 폐하거나 완전하게 하려 오셨다는 해석은, ‘갈수록 비호감’이라는 의미의 “갈비”를 ‘마른 사람’으로 오해하는 것처럼, 명백한 오석일 수밖에 없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 특히 랍비들이 사용했던 “율법을 폐하다”와 “율법을 완전하게 하다”는 말의 의미는 “율법” 자체를 폐기 또는 무효화한다거나, “율법” 자체를 완성 또는 완전하게 한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었다. 유대인들은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단 한 획이라도 폐할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마5:18(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이 이것을 의미할 것이다. 또 전능자 하나님이 주신 율법은 처음부터 완전하기 때문에, 누가 그 율법에 순종하든지 불순종하든지 간에 그 완전함에는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율법을 다 지킴으로써 율법을 완성하셨다’거나 ‘십자가를 지심으로 율법을 완성하셨다’는 말은 그 자체로는 백번 맞는 말이지만, 마5:17의 해석으로서는 예수님의 의도와는 동떨어진 자의적인 오석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의미로 마5:17을 말씀하셨을까? 다시 말하면 당시의 유대인들은 마5:17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예수님 당시의 랍비들은 열심히 율법을 연구하여 율법의 경중을 가리고, 또 어떻게 하면 율법을 더 잘 지킬 수 있는가를 위해 율법을 해석하는 일에 전념했다(이런 경향은 포로기 후 시대부터 있어왔던 일이며 예수님 당시까지 계속되었다. 이렇게 율법을 해석한 것을 장로의 유전 또는 구전 율법이라고 불렀는데, AD 200년경에 ‘유다 하나시’에 의해 그동안 축적되었던 구전 율법들이 책으로 집대성 된다. 책으로 집대성된 구전 율법을 유대인들은 ‘미쉬나’라고 불렀다). 랍비들은 자신이 나눈 율법의 경중의 순서나 또는 율법을 해석한 것을 가지고 여러 사람들 앞에서 자신과 다른 율법의 경중의 순서나 또는 율법을 해석한 랍비들과 논쟁을 하면서 자신이 연구한 것이 옳음을 입증하는데 열을 올렸다. 이런 논쟁에서 이기는 랍비는 이기면 이길수록 대중들의 인기와 존경을 받으면서, 높은 명성을 얻었다. 물론 논쟁에서 계속 지는 랍비는 대중들의 관심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려고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마22:36)라고 질문한 것도 율법의 경중에 대한 질문이며, 만약 예수님의 답변이 자신과 다르면, 당시 인기가 급부상하고 있는 랍비 예수와 논쟁을 벌여 이김으로써 자신의 명성을 높이고자 했을 것이다. 이때 예수님은 율법의 경중에 대해서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22:38-39)로 자신의 생각을 말씀하셨다.

물론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당시 모든 랍비들이 이구동성으로 인정하는 것이었으므로 더 이상 논쟁은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신 율법 해석은 랍비들의 일반적인 해석들과는 사뭇 달랐다. 예를 들면,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에 대해 예수님은 형제에게 노하거나 욕하는 것도 살인이라고 해석하셨으며(마5:22), “간음하지 말라”는 율법에 대해서는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이라고 해석하셨다(마5:28). 예수님의 율법 해석들 중에 당시 랍비들을 가장 화나게 했던 것은 아마도 안식일에 관한 율법 해석이었을 것이다(막2:27-28/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아무튼 예수님의 율법의 해석은 당시의 랍비들이 인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들의 전통적인 해석과는 너무나도 달랐으며, 파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랍비들은 예수님의 율법 해석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그 해석이 하나님의 율법을 폐하는 것이라고 비판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마5:17에서 자신의 파격적인 율법 해석이 올바르기 때문에 결코 자신의 율법 해석이 율법을 폐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더 나아가서 자신의 율법 해석이 올바르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하게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마5:17은 율법을 지키는 문제가 아니라 율법을 해석하는 문제를 다룬 말씀이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5:17)
 

글을 마치며

율법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의 신적 권위로 주신 법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라도 하나님의 율법을 한 획이라도 폐할 수 없다. 물론 예수님도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자신이 동참하여 인간에게 주신 율법을 결코 폐하지 않으신 것 사실이다. 또한 예수님은 둘째 아담으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순종하신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율법에 온전히 순종하신 “능동순종”으로 의를 획득하셨다거나, “능동순종”으로 인한 의가 인간에 전가되었다는 말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능동순종”을 주장하는 이들의 생각처럼 이것이 그렇게 중요한 진리였다면, 율법에 대해 여러 가지 말씀을 하신 예수께서 한 번쯤은 “능동순종”의 중요성을 말씀하셨을 법도 한데, 이것에 대해 한 마디 말씀은 고사하고 암시조차 하지 않으셨다. 왜 그러셨을까? 이는 “능동순종”이 하나님의 진리가 아니라 회중파 청교도의 상상에서 나온 어이없는 사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예수님은 십자가만이 죄인들을 구원하는, 즉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의롭다하심을 선언하는 유일한 자신의 “능동순종”임을 힘주어 말씀하셨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10:17-18)

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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