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정 목사님! 다음은 합신의 배현주 목사님의 글입니다. 개혁신학을 부지런히 주장하시고 설명하기로 유명한 분입니다. 배 목사님은 웨민총회에 다른 청교도 종파들이 있었을지라도 장로교회 청교도들이 모든 과정과 분위기를 압도하고 주도했으므로 웨민고백의 모든 내용이 장로교회의 신앙고백서로 전혀 손색이 없다고 합니다. 정 목사님이 웨민고백에 대해 설명하는 것과 조금 다릅니다. 목사님의 의견은 어떠한지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다음은 배현주 목사님의 말입니다.

----------------------------------------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가 회중 교회주의자들과의 혼합주의 산물이라고 말하는 자들에 대하여서..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를 장로주의 청교도들과 회중주의 청교도들이 타협해서 작성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이러한 자들의 주장은 주로 항간에 온라인에 떠돌아 다니는 찌라시를 자기의 개인적인 욕망에 뒤섞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한 것에 불과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는 장로주의 입장에서 정리된 것이고 그 당대에 회중주의자들은 마지못해서 서명한 것에 불과하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참석한 121명 총대 중에 의견을 달리하는 형제들 5명은 그야말로 사면초가와 같이 진리에 확고한 여러 장로주의 총대들의 신학적 입장에 둘러 쌓여서 질식한 자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끼리 따로 모여서 사보이 선언을 작성하였다. 그 만큼 회중주의자들은 장로주의 청교도들의 신학적 입장과 논리 정연한 진리성에 대하여서 압도되어서 변명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마지못해서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결정에 서명하였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는 장로주의 입장에서 매우 잘 정리된 종교 개혁의 결정판이다.

쯔빙글리와 부쪄와 불링거와 칼빈으로 이어지는 종교 개혁 1세대들의 신학적 노고는 데오도레 베자와 함께 종교 개혁 2세대로서 프랑스 개혁 교회 그리고 17세기 대륙의 개혁주의자들과 대영제국 장로주의 청교도들에 의하여서 장로주의로 그 정통 신학이 정초되었다. 그래서 존 칼빈으로부터 시작된 개혁 신학은 하나의 방향을 갖게되었고 그것은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로 최종적인 결실을 맺었다.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는 모든 개혁 교회가 준수해야할 거룩한 보편 교회법이다. 거룩한 보편 교회법은 한 두 사람의 주장으로 폐기될 수 없다. 신구약 성경은 반드시 해석이 필요한 신의 문헌이며 그 해석은 사사로히 개진 될 수 없다. (벧후 1:20)

모든 성경의 해석은 항상 거룩한 보편 교회법으로 이루어져 한다. 역사적으로 정통 기독교가 수납한 거룩한 보편 교회법을 무시하고 자의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자들은 무식하고 굳세지 못한 자들이다. (벧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딤후 3:16)

그러므로 참된 신자들은 몇몇 궤변론자들의 허망한 이설에 미혹되지 말고 거룩한 보편 교회가 역사적으로 수납한 정통 교리를 따라서 신구약 성경을 해석함이 가장 건전하고 지혜로운 행위라 여겨진다.
---------------------------------

영상 설명>


답변>
저는 배 목사님을 뵌 적이 없으나 이전에 그 분의 글을 인용하였고 한번 뵙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제가 아주 존경하는 목사님입니다. 그런 의도는 아니시겠지만, 저와 배 목사님을 논쟁하게 만드시는 것 같아 조금 주저됩니다. 배 목사님이 어디에 올리신 글인지 모르겠으나, 진정 배 목사님이 공개적으로 쓰신 글로 믿겠습니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입니다. 장로교회에서 웨민고백서(WCF)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가 너무 막중하고, 또한 그것이 성경과 같이 성령의 감동으로 작성된 정확무오한 문서인 것처럼 여기는 목회자들이 많으므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설명하고 싶을 뿐입니다.
 

1) 웨민총회 당시(1640년대) 회중파 청교도들은 누구인가?

저는 아직 웨민총회에 참석했던 회중파 청교들의 발흥과 활동에 대하여 일목요연하게 설명하는 연구의 글을 보지 못했습니다. 대부분의 문헌에서 ‘독립파’(independents)라고 자주 나오고 또는 ‘회중주의자들’(congregationalists)라고도 나옵니다.

잉글랜드 독립파 회중교회주의 청교도 운동의 시초는 헨리 제이콥스인데, 그의 사상의 특징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 국교회를 정당한 교회로 인정하고, 국교회의 승인을 받는 형제교회로서 국교회의 감독을 받지 않고 모든 것을 회중이 자치하는 회중주의 교회를 주장하였습니다. 1615년부터 이와 같은 주장을 실천에 옯겼습니다.

2) 1580년대에 이미 국교회를 부정하고 떠나 새로운 교회를 개척한 분리파들처럼 자발적으로 교인이 되기를 원한다는 내용의 서약을 하는 사람들만 교인으로 받는 '교회언약' 제도를 실천했습니다. 그들의 교회언약 속에는 율법을 준수를 교인의 의무로 가르치는 그릇된 내용이 강조되었습니다.

그런데 제이콥스를 통해 회중파 청교도들이 중시하는 신학과 교리가 발전된 흔적들은 많이 보이지 않습니다. 제이콥스가 훗날의 침례교와도 연관있다고 합니다. 회중파 청교도들의 중심적인 신학은 장로교회 제도 도입이 좌절된 후 그대로 국교회의 성직자로 남아 새로운 방향의 청교도 운동을 추진한 윌리엄 퍼킨스와 그의 제자들과 후배들에 의해 발전되었습니다.

퍼킨스 계열의 청교도들의 특징은 크게 다음의 두가지입니다.

1) 국교회를 부정하는 주장이나 국교회가 싫어할 행동을 표면적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훗날 퍼킨스의 제자들과 후배들이 모두 회중주의자들이었고 또는 회중주의와 궤를 같이했으나, 퍼킨스 등 초기의 사람들은 국교회를 자극하는 교회 정치 개혁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2) 분리파 청교도와 독립파 청교도들처럼 교인이 되기 위해 율법준수를 서약하는 내용 등이 강조되는 교회언약 제도를 주장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구원이 율법으로 말이암고, 신약 성도의 구원이 그리스도가 아담 대신 준수한 율법에서 나온다는 매우 비성경적인 신학이 퍼킨스에 의해 정립되었습니다.

퍼킨스 이전에도 행위언약(또는 창조언약 등)과 유사한 용어와 개념이 간헐적으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구원을 가지고 태어나지 못한 아담이 율법을 지켜서 자신을 완전히 구원하기로 하나님과 언약했다는 비성경적이고 반칼빈주의적인 ‘행위언약’ 신학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사람은 퍼킨스였습니다. 아담이 율법을 지키지 못해 자신을 구원하지 못했으므로 그리스도가 율법을 지켜 자신과 우리의 구원의 자격을 획득했다는 능동순종 사상도 퍼킨스이 정립한 행위언약 신학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콕케이우스가 행위언약을 정립했다고 하는데, 그는 퍼킨스가 죽은 후에 태어난 사람입니다.

웨민총회에 참여했던 ‘독립파’ 또는 ‘회중주의자들’ 또는 ‘회중파’는 과연 누구일까요? 명칭으로만 보면 독립파 회중교회 청교도 운동의 시조인 제이콥스를 따르는 사람들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했던 사상과 신학을 보면 퍼킨스 계열의 청교도들입니다. 웨민총회 당시 그들에게는 인간은 본래 율법을 지켜 자신이 구원받게 해야 했으나 그리 못했으므로, 그리스도가 대신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주었다는 율법주의 신학이 아주 강했습니다. 1640년대 웨민총회 당시 ‘독립파’라고 불리웠던 청교도들은 수 십 년 전 새로운 청교도 운동을 시작했던 헨리 제이콥스(1610년대)와 퍼킨스(1590년대) 계열의 혼합이라고 생각됩니다.
 

2) 1640년대 웨민총회 당시 회중파 청교도들의 영향력

배 목사님은 웨민총회에 참여했던 회중파들의 숫자가 불과 5명에 불과했고, 그들은 다수의 장로파들에게 압도되어 끌려갔다고 하셨는데, 사실이 아닙니다. 그들의 숫자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서 파송했던 8명보다 더 많은 12명이었습니다. 그 12명의 회중파 청교도  총대들의 신학 논쟁 실력은 너무나 출중했습니다.  

퍼킨스 계열의 청교도들은 연구 논문과 출판사역의 달인들이었습니다. 국교회와 정부를 자극하지 않는 새로운 청교도 운동으로 세상을 바꾸려고 작심했던 청교도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각 사람이 스스로 자기의 구원을 위해 경건하게 살고 자발적으로 헌신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결국 언제가 국교회는 무너지게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예정과 주권을 강조하는 기존의 칼빈의 신학이 자신들의 청교도 운동에 적합하지 않으므로 인간의 조건, 의무를 강조하는 율법주의 신학을 수립하여 전파했습니다.

이미 1590년대부터 그들의 연구 논문들이 쏟아졌고 부지런히 책으로 출판되어 잉글랜드뿐 아니라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도 전파되었습니다. 그래서 1590년대 중후반 스코틀랜드의 대표적인 언약신학자 로버트 롤록이 칼빈의 언약 신학을 배반하고 퍼킨스의 행위언약에 물든 내용을 담은 책을 출판하기도 하였습니다. 1640년대 웨민총회에 참석한 스코틀랜드의 총대들(알랙산더 핸더슨, 사무엘 러더포드)도 이미 퍼킨스의 행위언약 신학에 물든 상태였습니다.

웨민총회에서 다수의 장로교회 목회자들이 행위언약 사상을 삽입하는데 앞장섰고, 심지어 비록 명확하기 기술하지는 못했으나 해석하기에 따라 능동순종 교리로 보이는 내용을 삽입하는 데에도 앞장서게 되었습니다. 행위언약 기술은 비교적 쉽게 이루어졌으나 능동순종 기술에 관해서는 더 격론하였고 능동순종파들이 능동순종 주장으로 해석하기에 좋도록 기술하는 것으로 마무리 했습니다.   

웨민총회에 참석한 회중파는 그저 12명에 불과했던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들의 신학에 물들어 칼빈의 신학을 부분적으로 떠난 장로교회 목회자들도 많았습니다. 12명의 회중파 총대들의 신학적 실력과 논쟁의 능력은 가히 특공대원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 잉글랜드 장로교회 총대들과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총대들 속에서 이미 칼빈주의를 떠나 부분적으로 퍼킨스주의자가 되어버린 2중대원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웨민고백서 속에 칼빈의 신학과 대치되는 행위언약 개념 등이 수월하게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순수 회중파 총대 12명의 신학 토론이 능력은 어떠했을까요? 결코 적은 숫자로 인해 다수의 장로교 청교도들에 의해 압살되어 끌려가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옳건 그르건 간에 엄청난 신학적 실력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결코 분위기에 밀려가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청교도 운동을 연구한 학자들의 웨민총회에 참석했던 회중파들에 대한 말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다음은 서요한 교수의 책들에서 발견되는 내용입니다.

“독립파(Independent): 이들은 비록 소수였으나 능력과 경건, 대중적인 인지도로 존경을 받았으며 회의 시 매우 명예로운 위치를 확보하였다. 이들은 특히 장로교 정치 형태를 완강히 반대하고 회중 교회의 독립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토마스 굳윈, 예레미야 바로우, 윌리암 브리지, 필립 나이, 시드락 심슨 등 12명이었다.” (서요한, <청교도 유산>, 197 페이지 인용)

“독립교회파는 처음에 5명이 참석했으나, 나중에 7명이 더 추가되어 12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아주 유능하고 학식이 대단했다. 회중파 신자 크롬웰로 인해 정치적인 입지도 탄탄했다. 토마스 굿윈, 필립 나이, 제리미야 버러스, 위리암 브릿지, 시드락 심슨이 참여했고, 이들은 장로교 교리에 대해 매번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서요한, 언약사상사, 196 페이지 요약)

“웨민총회에서 스코 사람들은 적었으나 영향력은 실로 막강했다. 장로교회를 지키려고 에라스티안파와 독립교회파들과 심각하게 대립했다.”(서요한, 언약사상사, 242 페이지 내용)
 

다음은 로이드 존스의 책에서 발견되는 내용입니다.

“런던의 독립파 청교도들은 아직 천 명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을 그러한 교인이라고 고백한 모든 남자들과 여자들을 합해 보도라도 말입니다 ... 그러나 숫자를 제외한 다른 모든 면에서는 매우 탁월한 신앙의 소유자들이어서 나머지 모든 종파들을 다 합한다 할지라도, 또는 어느 종파라도 그들과 비교되지 않습니다.”(1640년대 로버트 베일리의 말, 로이드 존스, <청교도 신앙>, 219)

다음의 내용은 회중파들이 자신들의 교리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주장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당시 웨민총회 참석자들의 말입니다.

“겸손하고 진지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견해 차이가 있다 해도 함께 일하고 함께 기도할 수 있고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웨민총회 회원 러버트 헤리스의 말, 로이든 존스, 332)

“우리 가운데 차이점이 있다 할지라도 많이 논쟁하기 보다는 더욱더 기도에 힘씁시다 ... 우리와 독립파 형제들 사이의 차이가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다양한 방법을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여전히 ‘형제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러합니다. 아브라함과 롯이 공통의 적을 겨냥해야 할 때마다 서로를 구출할 채비가 되었듯이, 우리의 차이란 고작해야 작은 주름 정도의 차이 밖에 되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옷을 나누는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웨민총회 회원 찰스 헐, 로이드 존스, 332-33)

웨민총회에 참석했다가 중도에 떨어져 나간 청교도 파당은 없습니다. 모두 5년 동안 함께 토론하여 웨민고백서를 완성시켰습니다. 누구도 중도에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모두의 신학과 주장들을 고루 반영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명이나 몇 사람들에 의해 단기간에 쓰여진 다른 신앙고백서들과 달리 웨민고백서는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5년 동안이나 준비되었던 것입니다.
 


다음은 Robert Letham의 <The Westminster Assembly>에 나오는 내용들입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게 우려스럽고 혐오스러웠던 독립-회중교회주의(회중교 청교도)가 잉글랜드에서 부상한 것이 잉글랜드의 장로교주의의 운명을 결정하고 말았습니다.”(Robert Letham, The Westminster Assembly, 43)

"회중교 사람들이 능동순종 사상을 주장할 때, 장로교 대표들은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그리고 능동순종 사상을 가르치지 말라는 제임스 1세의 명령을 담은 글도 회의장에서 낭독되었습니다. 제임스 1세는 역사적으로 어떤 공의회에서도 능동순종 사상을 수용하지 않았고, 어떤 교부들도 능동순종을 가르친 적이 없으므로 능동순종 사상에 대한 논의를 자신이 통치하는 땅에서 허용하지 않는다고 말했었습니다."(Robert Letham, The Westminster Assembly, 39 페이지 요약)

이상으로 살펴본 것처럼, 웨민고백서 작성에 참여했던 회중파 12명의 신학적 논쟁의 실력은 특공대 수준이었고, 장로교회 총대들 가운데 이미 부분적으로 퍼킨주의(행위언약)에 물든 회중파 2중대원들의 협조와 활약으로 인해 웨민고백서에는 신약성경의 사도들과 칼빈의 사상과 다른 내용들이 일부 기술되어 있는 것이 분명한 사실입니다. 회중파들은 무능하고 숫자가 적어 장로파들에게 압살당하고 끌려가지 않았습니다.
 

3)웨민고백서는 장로교회 설립을 위한 신앙고백서인가?

그렇다고 말하기가 조금 어렵습니다. 장로교회주의자들이 다수였던 잉글랜드 의회가 웨민총회를 소집하였으나, 표면적으로 장로교회 설립을 선전하지 않았습니다. 찰스 국왕과 국교회와의 전쟁(잉글랜드 내전, 청교도 혁명)의 와중에 시작된 일입니다. 그때의 캐치 프레이즈는 ‘국교회 타도’였습니다. 국교회를 대체하는 하나의 개혁된 교회(청교도 연합교회)를 세우는 것이 당면 목표였습니다. 웨민고백서는 엘리자베스 여왕 때 작성되어 국교회의 기둥 역할을 하고 있었던 ‘39개 신조’를 대체할 새로운 하나의 개혁된 교회(청교도 연합교회)를 위한 신앙고백서로 작성되었습니다.

조금 나중에 동참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와 맺는 엄숙동맹(1643년)의 내용 어디에도 장로교회를 잉글랜드에 세운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그냥 개혁된 교회를 세우자는 내용입니다. 문제는 모두가 자신을 개혁된 교회라고 자부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사람들은 잉글랜드에 장로교회를 세우게 될 것이라고 김칫국을 마셨습니다.

웨민고백서 작성 당시 장로교회를 위한 신앙고백서라는 의식을 가지고 참여한 사람들이 다수였으나, 장로교회를 위한 신앙고백서가 되게 하려면 회중파 등의 조금 다른 자기 신학을 주장하는 자들을 추방해야만 하는데, 국왕과 국교회의 군대와 전쟁하는 와중에 분열을 일으킬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이 당시의 현실이었습니다. 처음부터 국회를 대적하는 하나의 개혁된 교회, 즉 청교도 연합교회를 세우는 것을 목표하였습니다.  

신앙고백서가 완성되었던 때와 청교도 군대가 국왕의 군대를 물리치고 승리를 결정하는 때가 거의 비슷했습니다. 곧 바로 잉글랜드에서 내부의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장로교회 지도자들이 회중파 신자들로 구성된 청교도 군대를 지휘하는 회중파 신자 크롬웰을 경계했습니다. 회중파 청교도들은 교인 수에서는 미약했으나 신학에서 강력했고, 특히 세상을 뒤엎을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크롬웰과 그의 군대의 대부분의 병사들은 독립파(회중파)였지 장로교회 신자들이 아니었습니다."((Robert Letham, The Westminster Assembly, 43) 

"크롬웰과 그 군대는 주로 독립파(회주파)편이었습니다. 장로회 제도를 강요하는 것을 잠치 못한 사람들은 주로 그들이었습니다. "(로이드 존스, 청교도 신앙, 320)

결국 크롬웰이 회중파 신자들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런던으로 진입하여 의회를 두 번이나 강제로 장악하여 장로파 청교도들을 의회에서 추방했습니다. 이후 장로파들은 다시 의회에 입성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이후 잉글랜드에서 장로교회 운동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이런 일은 오직 정치적인 문제일까요? 신앙은 같으나 정치적 이해가 달라서 벌어진 것일까요? 그것은 이슬람의 수니파와 시아파가 단지 정치 때문에 죽기살기로 싸운다는 것과 같습니다. 신앙이 같은 형제이면 싸우다가도 멈춥니다. 같은 영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잉글랜드는 회중교회의 나라로 변했습니다. 그 판국에 웨민고백서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웨민고백서는 완성된 직후 잉글랜드에서 휴지로 변했습니다.

주로 회중파 신자들로 구성된 군대의 지휘관이었던 회중파 신자 크롬웰은 곧 바로 스코틀랜드와도 전쟁을 개시했습니다. 전쟁을 먼저 시작한 쪽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군대였으나 크롬웰의 군대에 의해 완전히 패배했습니다. 두 번의 전쟁을 통해 크롬웰의 군대가 스코틀랜드의 수도를 두 번이나 점령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장로교회를 말살하고 회중교회를 강요했습니다. 이것도 역시 단지 정치적인 문제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같은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끼리 이렇게 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판국에 웨민고백서를 찾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약 10년 이상 회중교회가 영국을 지배하였고, 크롬웰의 사망과 함께 다시 국교회가 부활하여 국가교회가 되었습니다. 애써 만들었던 웨민고백서는 계속 아무런 의미가 없는 휴지가 되었고 아무도 찾지 않았습니다. 훗날 명예혁명(1682년)으로 스코클랜드에 종교의 자유가 주어지면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가 다시 복원되었습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만 여럿이 함께 만들었던 웨민고백서를 다시 찾아서 신앙고백서로 사용하였고,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웨민고백서가 장로교회 신앙고백으로 전적으로 부적합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내용이 장로교회에 합당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장로교회 조상 칼빈의 가르침에서 벗어나는 내용이 일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반성의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퍼킨스가 본격적으로 도입하여 회중파들과 퍼킨스의 비성경적인 언약사상에 물든 장로교회 목회자들이 지지한 행위언약(능동순종) 사상입니다.

회중파가 1658년에 자신들만의 사보이 선언을 별도로 채택한 것은 웨민고백서에 기술된 자신들의 신학이 불충분해서이지, 웨민고백서 작성 당시 자신들이 아무 말도 못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신학을 더 명료하게 표현하기 위해 한 것입니다. 그래서 얼른 보면 웨민고백과 사보이 선언의 순서와 내용이 거의 동일합니다. 

 

맺는 말

웨민고백을 성경에 준하는 장로교회의 교과서로 여기는 자세는 매우 위험합니다. 최근 미국의 대표적인 장로교단(PCA)은 목사 후보생이 웨민고백의 어떤 부분에 대해 수용할 수 없다고 고백하면 노회가 검토하여 용납하고 안수하는 방향으로 헌법을 수정했습니다. 프랑스 신앙고백서, 로이드 존스 등도 웨민고백을 성경에 준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맹신하는 자세를 버리라고 권했습니다. 

“우리는 16-17세기에 작성된 신앙고백서에 율법주의적으로 묶일 위험성을 피해야 합니다. 신앙고백서는 부차적인 기준에 불과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들은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갖는 것이 아닙니다.”(로이드 존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자유로워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신앙고백서를 지침으로 사용해야 하지만, 폭군이 되도록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고백서들이 어떤 항목도 손을 대거나, 바꾸어서는 안 되는 엄격한 규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로이드 존스)

“따라서 고전, 관습, 다수, 사람의 지혜, 판단, 선포, 칙령, 포고, 회의, 환상, 혹은 이적 등등의 어떠한 것의 권위도 성경의 여러 책들을 반대할 수 없고, 오직 모든 것이 성경에 일치되게 검토되며 규정되며 개혁되어야 한다.”(프랑스 신앙고백서 5장)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바른믿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