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모 목사의 성경 오역(誤譯), 오석(誤釋) 바로잡기(12)

글을 시작하며

아래는 모 목사님들의 그룹 카톡에 올라온 L 목사의 글이다.

네 S 목사님, 그게 팀 켈러가 말한 바죠. "다이너마이트를 바위 옆에서 터트리면 그슬리기만 할 뿐 바위를 폭파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먼저 그 바위에 구멍을 뚫고 그 안에 다이너마이트를 넣은 후 폭파시켜라. 그래야 바위가 부서진다." 비둘기처럼 순전하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뱀같이 지혜로와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다시 생각해봅니다. ^^

아래는 인터넷에서 발췌한 M 목사 설교의 일부이다.

그런데 왜 하필 뱀일까? 뱀은 하와를 유혹하여 아담을 타락시킨 동물로서 마귀를 의미하기도 하며 간교함의 대명사이기 때문이다. 공중에 권세 잡은 자가 뱀처럼 간교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이 그들에 맞서서 그들의 속내를 훤히 꿰뚫어 볼 만큼 머리를 잘 쓰고 판단을 잘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에서 소개한 실례들처럼 마10:16(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뱀같이 지혜롭고”에 대한 교회의 일반적인 해석은, 이리 가운데로 보냄을 받은 양 같은 제자들이 이리 같은 험악한 세상에서 뱀 같이 지혜롭게 처신하여 자기 자신을 잘 지키라는 예수님의 명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과연 이런 의미로 제자들에게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를 말씀하신 것일까? 아니면 이 말씀에 전혀 다른 어떤 의미가 있는 걸일까?
 

“뱀 같이 지혜롭고”에 대한 교회의 일반적인 이해

아래 소개하는 신학자, 유명한 설교자들, 그리고 대부분의 주석들에서도 “뱀같이 지혜롭고”를 [글을 시작하며]에서 소개한 실례들과 대동소이하게 해석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사도들을 위험하고 적의가 있는 환경 가운데 무방비 상태로 보내셨다. 그들은 적절히 행동해야 하였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뱀의 지혜가 필요했다(헤르만 리델보스).

특수한 상황에서의 생존에 관한 한, 뱀이 우리보다 더 지혜롭다고 하겠다(척 스미스).

이 말씀은 불신자들이 있는 곳에서 우리가 비둘기같이 순결하지만 뱀처럼 지혜롭게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하용조).

제자들은 ‘뱀같이 지혜로워야’ 한다. 박해에 직면한 제자는 멍청히 무대책으로 당하는 숙맥이 되어서는 안 되고, 현실적 상황을 직시하여 그 상황에 지혜롭게 대처함으로써 불필요한 피해를 피해야 한다(양용의).

물론 뱀은 자신을 보호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일반적으로 뱀들은 적이 공격하면 굴이나 연못같이 적이 쫓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재빨리 도망감으로서 자신을 보호한다. 어떤 뱀은 적을 만나면 목 부분이나 몸통을 크게 부풀리거나 꼬리를 심하게 흔들어서, 또는 꼬리로 내는 요란한 소리로 적을 위협해 자신을 보호한다. 또 어떤 뱀은 죽은 척해서 위기를 벗어나기도 하며, 주변과 비슷한 색깔을 띠는 보호색으로 자신을 보호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뱀 같이 지혜롭고”는 결코 이리들 사이의 위험한 환경에서 “뱀 같이 지혜롭게” 자기 자신을 잘 보호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럼에도 교회들이 “뱀 같이 지혜롭고”를 ‘지혜로운 자기 방어’의 교훈으로 해석하는 것은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뱀의 지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잇었는가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이 시대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뱀의 생물학적인 지식에 근거해서 해석한 어처구니없는 오석이다. 문제는 이런 어이없는 오석이 이 시대의 교회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명령하신 “뱀 같이 지혜롭고”와는 정반대의 어리석은 행위를 하도록 부추긴다는 데 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뱀 같이 지혜롭고”의 참 의미는 무엇일까?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10:16)

위에서 “뱀같이 지혜롭고”는 예수께서 열 두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마10:5/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 보내시며...) 제자들에게 하신 여러 말씀들 중 하나이다. 특히 예수께서 파송하신 제자들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은” 대단히 위험한 환경에 처해진다는 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뱀같이 지혜롭고”의 직접적인 배경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시면서, 제자들이 들어가야 할 세상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은” 위험한 환경임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양 같은 제자들이 “이리 가운데”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셨다.

그런데 만약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양 같은 제자들이 포악한 이리들 사이에서 뱀 같은 지혜를 발휘해서 자기 자신을 잘 방어하라는 명령이었다면, 예수님은 잔인하시고 어리석기 이를 데 없는 분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리들 사이에 들어간 양은 UFC 챔피언 양이라 할지라도 거기서 살아남을 확률은 현실적으로 0%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리들 사이에서 뱀 같이 지혜롭게 자기를 방어하며 살아남으라고 명령했다면, 또 거기에다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을 방어해도 안 될 판인데,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까지 하셨다면, 이런 명령을 제자들에게 한 예수님을 가리켜 어찌 잔인하지 않고, 무지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다. 그러므로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은” 환경에 있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리들 사이에서 뱀 같이 지혜롭게 자신을 잘 방어하라는 잔인하고 어리석은 명령일 수는 결코 없다. 오히려 예수님의 이 명령은 제자들에게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은” 환경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지키려고 잔머리 굴리지 말고, 대신에 너희에게 주어진 진짜 사명을 지혜롭게 잘 감당하라는 명령이다.

그렇다면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의 예수님의 말씀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이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포함한 유대인들이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가를 알아야 한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다른 모든 동물들보다 뱀이 가장 지혜롭다고 생각했던 까닭은 다름이 아니라 뱀의 혀가 두 개였기 때문이었다(물론 구조적으로 뱀의 혀는 두 개가 아니다. 단지 혀의 끝이 두 개로 갈라져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뱀의 혀는 두 개라고 말한다). 고대 유대인들은 혀가 하나일 때보다 혀가 두 개일 때 훨씬 말을 지혜롭게 잘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혀가 하나뿐인 다른 동물들보다 혀가 두 개인 뱀이 가장 지혜로울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뱀에 대한 유대인들의 이런 생각은 창3:1(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창3:1의 “간교하니라”(개역개정)는 히브리어 “아룸”을 번역한 것이다. 개역개정에서 히브리어 “아룸”을 “간교하니라”로 번역한 것은 뱀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에서 나온 의역이다. 히브리어 “아룸”의 원래 의미는 “지혜롭다”이다. 따라서 70인경에서도 창3:1의 히브리어 “아룸”(간교하니라)을 헬라어 “fronimw,tatoj”(프로니모타토스)로 번역했으며, “fronimw,tatoj”(프로니모타토스)는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fro,nimoi/프로니모이)”에서도 동일하게 사용되었다. 아무튼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들짐승 중에 혀가 두 개인 뱀이 가장 말을 잘하는, 그래서 가장 지혜로운 짐승이라고 생각했다.

고대인들이 말을 잘하는 사람을 지혜롭다고 생각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사람이 침묵하고 있으면, 그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인지 어리석은 사람인지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사실 어떤 사람에게 지혜가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는 그 사람이 하는 말에서 가장 먼저 드러난다. 따라서 구약의 ‘잠언’에도 지혜와 말의 상호관련성을 나타내는 구절들이 여럿 있다.

잠언과 비유와 지혜 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한 말을 깨달으리라(잠1:6)

명철한 자의 입술에는 지혜가 있어도 지혜 없는 자의 등을 위하여는 채찍이 있느니라(잠10:13)

지혜 있는 자의 교훈은 생명의 샘이니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잠13:14)

지혜 있는 자의 혀는 지식을 선히 베풀고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쏟느니라(잠15:2)

또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도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그가 지혜롭다고 판단했다(마13:54/고향으로 돌아가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그들이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따라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이 이리들 사이에서 뱀 같이 지혜롭게 자기 자신을 지키라는 명령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이리 가운데서 뱀 같이 지혜롭게 수행하라는 명령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양 같은 제자들을 이리 같은 세상에 파송하신 가장 중요한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하신 말씀대로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웠다 하고”(마10:7)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는 제자들이 이리 가운데 있다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래서 그들 가운데서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보호하려고 시도하지 말고, 오직 뱀 같이 지혜롭게 천국 복음을 전파하라는 명령이다. 또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리 가운데서 천국 복음을 전파할 때, 조금이라도 자신을 보호하려는 마음이 생기면 천국 복음이 변질될 위험이 있으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에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는 말씀을 더하심으로, 제자들에게 비둘기 같이 순결하게 천국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이 명령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이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게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 방법 하나를 말씀해 주신다.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10:19-20)

결국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는 말씀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지키려고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고, 철저하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라는 명령이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양 같은 제자들이 험악한 이리들 사이에서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게” 천국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양 같이 연약한 제자들은 사나운 이리 가운데서 어떻게 살아남아서 천국 복음을 전파할 수 있단 말인가? 이리 가운데 있는 양은 100% 죽을 수밖에 없는데도 말이다.

이리 가운데 있는 양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 자신을 결코 지킬 수 없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이리 가운데서 뱀의 지혜로 자신을 스스로 지키려고 시도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예수님은 이리 가운데 있는 양 같은 제자들이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일러주셨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10:28-29)

먼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리들을 두려워하지 말 것을 명령하신다. 왜냐하면 이리들은 몸은 죽여도 영혼을 능히 죽이지 못하는 별 것 아닌 자들이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더욱 더 이리들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이리들보다 훨씬 더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 제자들에게 계시기 때문이다. 또 예수님은 이리들이 가지고 있는 몸을 죽이는 능력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뜨릴 수 없는 능력이므로 이리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신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제자들의 머리털까지 세실 정도로 이들을 귀하게 여기시며 지켜주실 것이므로, 제자들은 이리들이 두려워서 스스로 자기 자신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이리 가운데로 보냄을 받은 제자들은 이리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이리 가운데서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게 천국 복음을 전파하며, 예수님을 시인해야 한다. 이것이 이 시대를 사는 예수님의 참 제자들의 모습이며, 참 교회의 모습이다.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마10:30-32)
 

글을 마치며

“뱀 같이 지혜롭고”에 대한 오석은 불행하게도 한국교회를 어리석게 만드는데 한몫했다. 왜냐하면 “뱀 같이 지혜롭고”의 오석이 한국교회가 세상을 열심히 닮아가는 세속화에 합리적인 이유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교회들은 지금까지 이리 가운데처럼 험악한 세상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남기 위해 이리들보다 더 많은 숫자와 더 큰 힘을 가지려고 애써왔다.

이를 위해 교회들은 복음을 변질시키면서까지(예를 들면 불신자가 좋아하는 교회, 알파 코스, 두 날개, 오순절주의의 은사주의, 신사도주의 등)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데 열심을 내었다. 왜냐하면 교회가 이리들보다 더 크고, 더 많고, 더 힘이 세야지 이리 가운데서도 먹히지 않고 잘 살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이런 까닭에 이 시대의 교회들은 이리들이 오히려 두려워할 정도로 이리들보다 더 크고, 더 많고, 힘이 더 센 괴물이 되고 말았다. 다시 말하면 이 시대의 교회들은 이리 가운데서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남아 더 잘 살기 위해서 바른 천국 복음을 전파하게 하는 비둘기의 순결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뱀 같이 간교한 지혜로 이리들보다 더 크고, 더 많고, 더 사납고, 더 더러워지고 말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이리 가운데 있는 양 같은 참 교회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게”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말씀의 능력 외에는, 적어도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능력에서는 언제나 약자로 존재한다. 세상 끝을 이야기하는 요한계시록에서의 참 교회의 모습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오순절주의자들은 마지막 때에는 사탄이 더욱 강하게 날뛸 것이므로, 교회는 더욱 풍성한 성령의 은사들을 받아 초자연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강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열변을 토한다. 마치 은사주의가 성경적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오순절주의자들의 주장은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오히려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대적들의 움직일 수 없는 특징이 큰 이적과 능력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계14:13-14/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마지막 때에 참 교회에는 오순절주의자들이 말하는 화끈한 은사로 인한 초자연적인 능력은 없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참 교회에 주시는 능력은 오직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말씀의 능력뿐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계11:3)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주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계14:6)

마지막 때에 참 교회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의 능력으로 영원한 복음을 전하다가 이리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고(계11:7/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터인즉), 큰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계11:9/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보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만약 오순절주의자들의 주장대로 교회가 성령의 화끈한 은사들을 가지고 초자연적인 능력을 발휘한다면, 교회는 결코 이리들에 의해 죽거나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리 가운데서 끝까지 복음을 전하다가 이리들에게 죽는 것이야말로 참 교회가 승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가 이리들에게 죽지 않았다는 것은 교회가 복음을 변질시켜 이리들과 타협했다는 증거이므로, 이리들에 의해 죽지 않은 교회는 실로 비참하게 패배한 교회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교회가 이리들에 의해 죽었다는 것은 교회가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게” 천국 복음을 끝까지 능력 있게 전했다는 증거이므로, 이리들에 의해 죽은 교회는 실로 영광스럽게 승리한 교회이다. 예수님의 재림 때, 하나님께서는 이리 가운데서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게” 천국 복음을 전파하다가 이리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수치를 당한 참 교회를 다시 살리심으로써 참 교회의 궁극적인 승리를 이리들이 두려움에 떨면서 확인하게 될 것이다(계11:11/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우리 모두는 이리 가운데 있는 마지막 시대의 한국 교회가 지금까지 부흥, 또는 성장이라는 미명하에 스스로 만들어 온 이리 같은 교회의 모습을 가차 없이 버리고, 이제라도 비록 겉모습은 죽임당한 어린 양 같이 볼품없고 연약할지라도, 예수께서 명령하신대로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게” 세상을 향해 담대하게 천국 복음을 전하다가 이리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그러나 삼일 반 후에 하나님이 다시 살려주시는 진짜 주님의 교회로 회복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자.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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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