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 안 먹히면 무엇으로도 안되는게 기독교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이므로 조금이라도 깨어서 자기를 살피지 아니하면 신속히 세속적이요, 사탄적인 방법을 사용하게 됩니다. 목적이 옳으면 그 수단과 방법이 옳은 가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목적이 옳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현상이 복음전도의 현장에서 빈번히 나타납니다. 이는 치명적이기에 그 결과는 항상 옳지 않는 방법으로 결론지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기독교는 산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것만이 아니라, 그 정상을 가기 위한 좁은 문, 좁은 길을 통과해야 합니다. 즉 기독교란 과정조차 성경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 가지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 중에 오늘 눈여겨볼 것은 첫 번째 시험입니다.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4:3)

시험자의 첫 번째 시험은 돌로 떡을 만들어라는 것입니다. 지금 사탄은 우리 주님을 향하여 무엇을 시험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사십일을 굶었으니 돌도 떡으로 보일 만큼 배고프기에 기적을 행해서 먹으라는 것일까요? 만약 그런류의 시험이라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왜 그 유혹을 물리치셨을까요? 그것이 무엇 때문에 죄입니까?

우리 주님은 지금 무엇을 앞두고 시험에 빠지신 것일까요? 이 시험이 끝나면 곧바로 공생애의 사역이 시작되는 시점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공생애 이전에도 입을 열어 얼마든지 진리의 말씀을 전달하는 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공생애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진리를 가르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5:17)

여기에서 보듯이 사탄의 시험은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는 바로 직전에서 시험을 하신 것입니다. 즉 구세주로서 공생애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 공생애의 사역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수능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은 예수님의 개인적인 성향을 시험하신 것이 아니라 공인으로서의 자격이 있느냐를 보시는 것이므로 사역자로 자질이 있느냐를 검사한 것입니다.

돌로 떡을 만들라는 이 시험은 배고픈 네가 돌로 떡을 만들어서 먹어라가 아니고, 사역의 시작을 떡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즉, 백성들의 필요를 먼저 채워주라는 것입니다. 당시의 팔레스타인은 제대로 먹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이 때 백성들이 절실히 필요한 빵을 주는 것으로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사탄이 예수님을 향해 유혹하는 것은 정확이 이것입니다.

“먼저 사람들이 배고프지 않느냐? 일단 천국이고 지옥이고 간에 먹고는 봐야 하지 않겠느냐? 그리고 그들에게 필요를 채워주면 사람들이 많이 올 것이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인 사역이 아니겠니?” “예수, 당신이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땅에 온 이유가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함이 아닌가?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복음을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당신에게 주어진 시간은 겨우 3년 정도일세? 만약 선택된 자라 할지라도 당신의 복음을 듣지 못하면 어떻게되겠는가? 누가 선택된 자인지 모르니 일단 많이 모아서 씨뿌리듯 복음을 뿌리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일단 먹을 것과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겠는가? 일단 많이 모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 유혹은 예수님을 비롯하여 모든 사역자들에게 동일하게 임하는 유혹입니다. 그러나 이 유혹의 개념을 모르는 사역자들은 대부분 사역자로서의 첫 번째 시험에 불합격 하고 맙니다. 즉 이 유혹에 넘어간 사역자들은 사역자의 자격이 없는(수능에서 탈락한 학생) 무자격 사역자와 같습니다.

1960, 70년대에 대형교회가 된 교회들의 대부분은 지역 주민들의 필요를 채워주므로 우후죽순 사람들이 몰려온 결과라는 것을 부인하기 힘듭니다. 미군으로부터 받은 구호물자와 밀가루는 주로 교회를 통하여 지역에 배포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즉 당시의 그와 같은 사역을 한 목사들은 첫 번째 시험에 탈락한 자들이었습니다.

제3세계 국가 중에서 선교를 하는 나라는 거의 대한민국밖에 없습니다. 이는 한국이라는 나라가 기독교적으로도 크게 성장했고 더불어 경제도 크게 성장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선교전략에 무엇인가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선교사들은 기독교 불모지에 들어가 초기 성장과 교회 건축은 신속하게 진행되지만, 시간이 지나도 선교지 교회의 교인들은 헌신하기는커녕 자립조차 어려운 실정입니다. 그리고 참담한 결과들이 나타납니다. 이 선교지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기독교는 ‘좋은 것을 주는 부자들’입니다. 즉 이들에게는 교회가 좋은 것을 주면 ‘당연한 것’이고 아무 것도 주지 않으면 ‘교회가 왜 저러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현지인들은 헌신은 커녕 헌금조차 내지 못합니다. 혹자는 그들이 너무나 어렵게 생활하기에 헌금을 드릴 형편이 못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변명에 불과합니다. 그들이 헌신하지 못하므로 헌금을 내지 못하는 것이지 가난해서 헌금을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교지의 선교사들은 10년이 지나도, 심지어 20년이 지나도 선교비의 거의 전액을 한국으로부터 원조를 받아야 합니다. 아마 100년이 지나도 대를 이어 한국에서 돈을 받아다 공짜로 먹이고 입히는데 쓰고 말 것입니다.

한국의 초기 교회는 자립이 되지 않아 목사에게 생활비를 드리지 못하면 교인들이 쌀을 퍼다가, 닭을 잡아다가 목사를 먹이고 입혔고, 목사는 그와 같은 대접이 마땅한듯 묵묵히 사역하였지 언제까지나 미국의 원조를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의 한국 상황은 지금의 선교지에 비해서 더 비참한 상황이었습니다.

지금의 선교현장은 어떻습니까? 선교사는 교회에서 열심을 내는 자를 자신의 제자로 삼고 그를 신학교에 보내어 사역자로 만듭니다. 그 사역자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교회가 없는 곳으로 들어가 교회를 개척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사역자는 보고 배운 것이 그러하므로 그 교회 역시 자립하지 못하고, 현지인 사역자는 자신의 스승인 선교사로부터 월급과 교회 운영비를 전액을 받아서 씁니다. 이는 교회를 개척하면 개척할 수 록 선교사는 더욱 많은 제자들의 부양비로 과부하가 걸리게되고, 이 돈은 거의 대부분 한국교회로부터 나갑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선교사가 더 이상 제자들에게 월급과 교회 운영비를 주지 못하면, 그 제자는 사역을 하지 않거나 심지어 교회를 떠나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현상들이 한국 선교사가 사역하는 일부에서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전 지역에서 대동소이하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민교회는 어떻습니까? 이민자들이 교회에 출석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국이 그립고, 한국식 음식이 그립고, 처음 정착할 때 도움이 필요하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교회를 찾습니다. 이들이 교회를 찾는 정확한 이유는 말씀을 깊이 배우고자,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자신의 ‘떡’을 채우고자 함입니다. 즉 이들이 접근 자체가 틀린 것입니다. 주님은 이들을 향해 호통을 치시기를,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6:26) 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첫 번째 시험에서 넘어진 사역자들의 눈에는 이런 것이 얼마나 잘 못된 일인지 알 수 없을 겁니다. 그러므로 “이들이라도 받아 교세를 불리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라”라는 정확히 사탄이 2000년간 사용한 시험에 또 탈락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후 낙담한 사역자는 “이민 목회는 너무 어려워”라고 푸념할 것입니다. 시험에 넘어진 선교지, 이민교회, 이들을 파송한 한국 교회에서 성경이 말하는 교회 공동체가 나올리는 없습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복음이 들어가 실제로 한국에서는 불교 신자였지만 지금은 열심있는 교인이 되었어요. 그런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라고 반문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목적이 맞으면 과정이야 좀 바껴도 상관있나? 라고 말하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또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선교지나 이민 목회는 어쩔 수 없어, 한국에서나 그렇게 말할 수 있지 당신이 나와서 해봐” 라고 말합니다. 물론 한국의 풍토에 비해 그곳에서 목회하기가 월등히 어렵다는 것은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서를 바꿔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며 교회는 무엇을 해야합니까? 강력하게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

교인들이 먼 타향에서 외롭고 고달프게 산다고 하여 위로하고, 감싸주고, 실제적인 도움을 주려는 일을 하지 말고, 배운 그 말씀을 잘 지키고 살아가는지 확인하고 그렇지 않는 자들을 찾아가 권면하며 순종하도록 해야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20)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르치다 뿐 아니라, 그것을 ‘지키게 하라’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순서를 바꿔서 찾아오는 사람들이나, 여전히 교회 내부에서 순서를 바꿔 먼저 육신적 필요를 채워주기를 원하는 자들에게는 꼭 순서를 지켜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그래도 여전히 먼저 자기의 필요를 구하고 나중에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면 도움의 사역을 멈추어야 합니다. 오직 기도와 말씀 사역 외에는 교회가 오랫동안 돕는 사역을 해서는 안됩니다. 만약 그 결과 성도들이 다 떠나버리면 어떻합니까? 그리고 몇 명만 남아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라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아 있는 자들을 붙잡고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요6:67) 라고 물으시면 됩니다. 그 때 성도들 중 “김 집사가 대답하되 목사님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요6:68 참조) 라고 하는 자들을 데리고 목회하시면 됩니다.

 

정대운 목사 / 삼송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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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운 목사는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들을 중심으로 탁월하게 가르치는 뛰어난 교육목회 전문가이다. 정대운 목사는 “객관화(진리)의 주관화(신앙)를 추구합니다”라는 말로 자신의 교육목회 철학을 표현하기 좋아한다. 세종대, 개신대학원대학교(M.Div),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에서 공부했고, 현재 계속해서 국제신학대학원대학(석,박사 통합과정)에서 연구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원 교수(교회사)로 사역하고 있고, 고양시의 삼송제일교회의 담임목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