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합신 신학위원회가 능동순종 교리를 옹호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한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 율법을 준수했다”라고 주장하는 합신의 사람들을 비판한 정이철 목사에 대한 연구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능동순종 주장자들을 보호할 것이라는 소문이다. 

“능동순종의 교리는 정통교리이므로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개혁신학에 충실한 분들입니다.”

“능동순종을 반대하고 능동순종 주장하는 합신의 목회자들을 비판하는 정이철 목사와 <바른믿음>의 주장은 대응할 가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능동순종이란 그리스도께서 아담의 자리에 오셔서 완전히 율법에 순종하심으로 그 자신과 우리의 영생의 자격을 취득하기 하셨다는 이론이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영생과 우리의 영생을 위해 율법에 완전하게 순종했어야 하는 이유는 행위언약이라는 것 때문이다. 행위언약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아담을 불완전하고 임시적인 상태로 창조하셨고, 아담이 율법에 완전하게 순종하면 비로소 완전한 사람이 되고 하나님이 그에게 영생을 주기로 약속했다는 것이다.

행위언약과 능동순종은 다음과 같이 연관되어 있다.

1)행위언약이 진리이면 능동순종도 성경적이다. 그리스도의 능동순종이 필요한 이유는 행위언약 때문이다.

2)행위언약과 능동순종이 진리이면, 인간의 영생과 죽음이 율법에 달렸다는 가르침이 성경에 나와야 한다.

3)행위언약과 능동순종이 성경의 진리이면, 그리스도가 우리 대신 율법 조문들을 모두 지켜서 영생의 의를 획득하신다는 계시가 구약 시대부터 성경에 나왔어야 한다.

4)행위언약과 능동순종이 성경의 진리이면, 그리스도께서 자신과 우리의 영생을 위해 실제로 율법 조문들을 모두 준수하려는 강한 의지를 가지셨음이 성경에 나와야 한다.
 

여기에 대한 성경적인 대답은 다음과 같다.

1)아담과 하나님 사이의 태초의 언약은 어떤 조건 하에 하나님이 아담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한 언약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이미 은혜와 사랑 가운데 영생과 모든 복과 은혜를 주시고 자기 백성으로 삼은 아담과 영원히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자는 내용의 언약이었다. 하나님이 자기의 인격을 걸고 언약하셨으므로 아담이 그 언약에 신실하거나 불신실하거나에 상관없이 하나님 자신이 그 언약을 이루어야 할 책임을 떠안으신 은혜와 사랑에 기초한 언약이었다.

실제로 아담은 하나님의 자리까지 넘보고 반역하였으나 하나님은 자신의 인격을 걸고 언약하셨으므로 자신이 아담의 죗값을 지불하심으로 언약을 회복하셨고 아담과 그의 후손들을 다시 자기 백성으로 회복하였다. 그로서 하나님 자신의 창조목적을 결국 완성하셨다.

그러므로 아담의 어떤 행위에 기초하여 아담에게 영생을 주기로 했다는 의미의 ‘행위언약’이라는 명칭보다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주신 처음의 언약이라는 의미로 ‘첫 언약’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속죄를 통해 이루어내신 언약을 은혜언약이라고 부르지 말고, 신약 성경의 가르침대로 새 언약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다. 새 언약은 첫 아담이 파기한 언약을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가 대신 죗값을 치르시고 복구하여 내신 언약이다.
 

2)인간의 삶과 죽음이 율법에 달렸다는 가르침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구약의 모든 성도들이 믿기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을 믿게 하시는 은혜를 따라 구원 받았다. 아브라함이나 기생 라합 등은 도무지 하나님을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을 믿게 하시는 은혜를 따라 구원을 얻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기 전에 먼저 모세를 통해 부르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 유월절 밤에 죽은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의 효력이 소급적용되어 구원 받았다. 그 후의 홍해도하는 그들에게 세례식이었고 만나와 반석의 생수는 그들의 성찬식이었다.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레 18:5)

청교도파들은 칼빈이 레위기의 이 말씀을 인용하여 율법을 행함으로 영생의 의를 얻는 것이 가능하다고 가르쳤다고 주장한다. 칼빈이 그렇게 가르쳤다면, 그것은 칼빈의 오판이다. 레위기의 이 말씀은 가나안 원주민들의 동성애, 친족간통, 수간 등의 범죄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따라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으로 가나안 땅에서 멸망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로마서 10:5절에서 바울이 레위기의 이 구절을 인용함으로 마치 바울에게 율법의 행함으로 의를 얻는다는 신학이 있었던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로마서 10:5-10절에서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의 의를 얻는다는 사실이다.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5-10)

신구약 성경 어디에도 율법을 행함이 영생의 의를 얻는 길이라는 말씀이 없다. 율법은 은혜로 구원 받은 하나님 백성들이 먼저 생기고 난 후 그들이 실천하면서 살아야 신앙의 원리로서 도입되었다. 율법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이미 은혜로 구원 받은 하나님 백성들이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율법이 주어지지 않았다. 율법은 은혜로 이미 구원 받은 구약의 백성들에게 사실은 자신의 행위로는 구원에 이를 방법이 없고 오직 장차 오실 그리스도로만 구원이 가능함을 알게 했다.
 

 

“율법은 본래 인간에게 의를 주기 위하여 제정된 것이 아님(소제목). 갈 3장 10-12절에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고 하였는데, 이 말씀은 율법이 제정된 것이 인간에게 의를 주기 위함이 아님을 잘 밝혀준다. 구약 자체가 인간이 율법으로 의를 얻을 소망이 없음에 대하여 역설하는 동시에, 믿음으로만 영생을 얻는 사실을 고조한다.”(박윤선, <계시의존 사백>에서)
 


"율법의 기능은 죄를 알게 해주는 것이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 준다. 율법은 이러이러한 것을 행하면 범죄하고 지적하고 교훈한다. 그러므로 내 죄가 얼마나 크고 무서운 것인지를 율법이 알려준다. 내 양심에 가책을 일으켜서 죄를 알도록 하고,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알게 한다 ... 율법은 살리고 구원하는 기능은 없고 정죄하고 죽이는 기능을 갖는다. 사람은 그 죄성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요구와 명령을 지킬 수가 없다. 그련데 율법의 명령을 지키지 않으면 율법은 사람을 정죄하고 저주한다. 이 정죄와 저주가 어떠한 것임을 율법은 밝힌다."(하교리 해설, 48-49)
 


"율법은 거울과 같다. 그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무력함과, 무력에서 생기는 죄악을, 그리고 결국은 그 두 가지에서 오는 저주를 본다. 거울이 우리 얼굴에 있는 오점들을 보여 주는 것과 똑같다. 왜냐하면 의를 따라가는 능력이 없을 때에, 인간은 죄의 수렁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죄악의 뒤를 곧 따라오는 것이 저주다. 그러므로 율법이 우리를 유죄로 인정하는 범행이 중대한 것일수록 우리의 책임을 묻는 심판도 더욱 엄중하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고 한 사도의 발언은 여기 해당한다"(기독교강요 2.7.7)
 

3)하나님의 성육신 자(그리스도)가 율법 조문들을 지켜서 영생의 의를 얻게 될 것이라는 메시야 사상이 구약 성경에서 일체 발견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도래를 예언하는 구약 성경의 메시야 사상은 고난 받으시는 하나님의 종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만족하고 영원히 하나님 섬김을 본분으로 알고 살아야 할 아담이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기 위해 반역하여 회개해도 소용없는 영원한 저주를 받았다. 아담과 아담의 후손들 가운데서 이 저주를 해결할 사람이 나올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이 아담의 죗값을 대신 지불하기 위해 위해 스스로 사람이 되시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구약 성경은 메시야가 아담의 죗값을 대신 지불하기 위해 대신 고난을 받으시는 분으로 예언하였다. 왜냐하면 죗값을 지불하여 죄의 정죄에서 해방됨이 곧 의로워짐이고 구원이기 때문이다. 구약 성경에서 우리에게 의를 주기 위해 율법 조문들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메시야에 대한 예언은 없다.

신약 성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죄없는 사람으로 오신 메시야가 죄인들을 대신하여 고난과 죽음으로 속죄하심이 곧 칭의이고 구원이라고 신약의 사도들은 가르쳤다. 신약의 사도들에게 그리스도가 율법 조문을 지켜서 영생의 의를 얻어 전가하였다는 사상은 일체 없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 5:9)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고전 1:30)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 5:9)
 

청교도 운동 시대에 작성된 대부분의 신앙고백서들도 그리스도가 일평생의 순종의 삶으로 죄사함을 우리에게 주시었다고 가르친다.

“자신의 모든 공로와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성취하신 많은 거룩한 사역들은 우리에게 전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이다”(벨직 신앙고백서 22항, 1561년)

이 내용은 그리스도의 율법준수로 얻은 영생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다는 내용이 아니다. 우리의 죄용서는 단지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일평생의 순종과 고난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평생 동안 행하신 모든 것은 결국 우리의 죄용서를 위함이었다. 그리스도가 자신과 우리의 영생의 자격(의)를 취득하시고자 율법의 행함으로 의를 얻으신 것이 아니다. 율법에게는 처음부터 그리스도에게나 우리에게 영생의 의를 주는 기능이 없었다. 

“하나님은 나의 모든 공로가 전혀 없이, 순전히 은혜로 그리스도의 완전한 만족과 의와 거룩을 내게 선사하시고 마치 내가 전혀 죄를 범한 적이 없고 죄가 전혀 없는 것처럼 또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이루신 모든 순종을 나 자신이 성취한 것처럼 여겨 주십니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 60문, 1563년)

이 내용도 그리스도의 율법 순종의 공로가 우리에게 전가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아무런 영생의 자격이나 공로가 없는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대신 우리의 죗값, 아담의 반역한 죗값을 갚으시기 위해 하나님의 모든 요구에 순종하심으로 얻어주신 죄용서를 마치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요구에 직접 순종하여 얻은 것처럼 하나님께서 여겨주신다는 내용일 뿐이다.
 

4)그리스도께서 영생의 의를 획득하시기 위해 율법 조문들을 지키시려는 강한 의지를 보이신 적이 없다. 유아 시절에 어머니의 품에 안기어 성전에 가시어 결례를 치르신 것 외에 율법의 조문들을 지키신 내용을 성경에서 찾을 수 없다. 그리스도는 사람의 방식으로 율법은 지키시지 않았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의 완전성을 계시한 율법의 모든 내용과 정신과 요구가 다 이루어진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람으로 오셨다. 그리스도는 이미 율법이 100% 완전하게 실현된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이셨다. 율법은 그리스도를 준비하는 몽학선생에 불과했고, 그리스도를 예시하는 그림자에 불과했다.

우리 죄인들과 그리스도에게 동일한 율법의 조문들 준수를 강요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그리스도에게 율법 조문들 준수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가 율법 조문들을 지켜서 의를 얻었다는 것은 거짓 신학이다. 그리스도는 율법이 완전하게 실현된 거룩하고 의로우신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이다. 죄와 무관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인들을 향한 율법의 의로운 요구를 대신 충족시켜 주심으로 우리에게 의와 구원을 주셨다. 언약을 파기한 반역죄인은 하나님 앞에서 결코 살 수 없으므로 죗값을 갚으라는 율법의 요구대로 자기의 목숨과 피를 바치셨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으로 우리의 죗값이 지불됨으로 우리가 의로워졌다.

지금까지 아무도 (사람이나 그리스도나) 율법을 지키면 영생의 의를 획득할 수 있다는 성경의 증거, 그리고 그리스도가 영생의 의를 획득하기 위해 실제로 율법의 조문들을 하나씩 지키려고 노력했다는 성경의 증거를 찾지 못했다. 합신 신학위원회가 반구절만 찾아내면, 세계 기독교 역사에 큰 획을 긋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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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