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신 신학위원회 보고서 2항에 대한 첫번째 반박

합동신학교 전경
합동신학교 전경

(이 글은 합신 신학위 보고서 2항에 대한 첫번째 질문과 반박이다.) 합신 신학위원회의 <바른믿음>과 정이철 목사에 대한 보고서가 드디어 나왔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공교단의 신학자들의 연구물이라고 하기에는 매우 궁색해 보인다. 그리스도의 능동순종 교리, 즉 그리스도가 율법을 지켜서 의로움을 얻었다는 문제의 거짓된 교리의 성경적인 근거를 전혀 제시하지 못했다. 그 근거를 성경에서 한줄도 찾지 못했다. 대신 칼빈의 모호한 말을 악용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논리를 전개했다.

무엇보다 문제를 일으킨 합신의 인물들, 그리스도가 율법을 지켜 스스로 영생을 얻었다고 주장한 합신의 김병훈 교수와 노승수 목사의 이단 사상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합신은 그리스도가 율법을 지켜 스스로 영생을 얻었다고 믿는 모양이다. 참으로 걱정된다. 

합신의 신학위원회가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지켜 스스로 영생을 얻으셨다고 주장한 합신의 두 사람을 비판한 정이철 목사의 주장들에 대해 어떻게 반박하였는지 이제부터 차근차근 살펴볼 것이다. 오늘은 칼빈의 신학이 그리스도의 능동순종 교리와 무관하다는 정이철 목사의 주장에 대해 합신 신학위가 어떻게 반박하였는지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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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목사 주장>
“성경이 부정하는 행위언약 사상과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사상이 칼빈에게는 없다”

 

합신 신학위 반박>
“칼빈이 행위언약 사상을 부정하거나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의한 의 교리를 부정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칼빈의 다음과 같은 말을 볼 때, 아담이 율법을 지키지 못해 자력으로 영생 획득에 실패하여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았고, 그리스도가 아담을 대신하여 율법을 순종하여 자역으로 자신의 영생의 의를 획득하여 우리에게 전가한 그리스도의 율법 순종의 의를 배제시키지 않았습니다.

‘이러한(아담의 최초의) 순전한 상태에서 사람은 원하기만 하면 자유의지로서 영생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기독교강요 1.15.8).”

‘그가 무흠하게 머물렀더라면 첫 사람은 더 낳은 생명으로 넘어갔을 것이다.’(고린도주석 23:77).”(합신 신학위원회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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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정이철 목사가 청교도 신학의 능동순종 교리의 거짓됨을 증명할 때 가장 빈번하게, 사실상 거의 모든 글에서 제시했던 반박의 증거는 언제나 성경이었다. 처음부터 율법에게 영생의 의를 줄 수 있는 자격이나 기능이 있다는 가르침이 성경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었다.

율법은 사람에게 죄가 넘치고 있고, 사람의 방법으로는 율법의 의로운 요구를 충족하여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알게하였을 뿐이다. 하나님의 인격을 가진 완전하고 흠이 없는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의 성육신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인들의 죗값을 대신 십자가에서 지불하여 죄인들을 향한 율법의 의로운 요구가 충족됨으로써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게하는 것이 율법의 목적이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갈 3:19)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갈 3:11)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갈 3:21)

정이철 목사는 완전히 의로운 분으로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이 발생한다고 계속 주장하였다. 율법을 준수하여 의로움을 얻으신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의로움을 전가해 주시는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의로우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 발생한 하나님의 죄 용서가 곧 우리의 칭의라고 주장하였다. 정이철 목사의 주장의 근거는 언제나 다음과 같은 수 많은 성경 구절이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 5:9)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히 10:19)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사 53:11)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렘 23:6)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고전 1:30)
 

성경은 시종일관 의로우신 그리스도의 대속에서 우리의 의로움이 발생되었다고 하지, 그리스도가 율법을 지켜 의로움을 얻으신 후 우리에게 그것을 전가했다고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능동순종 교리가 거짓 신학이 아니고 성경적인 신학이라고 주장되려면 단 하나의 성경 구절만이라도 근거로 제시해야 한다. 그러면 그것으로 충분하고 족하다.

그러나 합신 신학위는 자신들의 주장을 돕는 단 하나의 성경 구절도 제시하지 못했다. 칼빈이 했던 말 가운데 모호하거나 비성경적인 말 한 두 마디를 찾아 고래심줄 같이 여기고 의지한다. 또는 청교도 운동 시대에 나타난 신앙고백서들의 애매한 한두 문장들을 큰 우군으로 삼는다. 

청교도 시대의 산물인 행위언약 사상이나 그리스도의 능동순종 교리는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인간의 철학적 사변의 산물이다. 미국의 칼빈신학교에서 청교도 신학을 전파하였던 리차드 멀러까지도 행위언약 사상이 성경에 근거하지 않고 교리들과 교리들의 관계를 유추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된 추정의 산물이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행위언약 교리는 17세기 개혁주의 신학 체계 속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교리로서 단순히 성경에 밝히 언급된 교리가 아니라 연관된 성경적 논제들 혹은 교리의 항목들을 조사하고 비교한 결과로 산출된 교리의 사례를 보여 준다.”(리차드 멀러, 칼빈 이후 개혁신학, 429)

1800년대의 장로교 신학자 윌리엄 커닝햄도 그리스도의 능동순종 교리가 칼빈의 저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칭의 교리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나타난 사색의 산물이라고 말했다.

"우리의 죄 용서의 근거가 되는 수동적 의 개념과 우리가 하나님께로 받아드려지는 능동적 의 개념은 칼빈의 책들을 통해 공식적으로 등장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칭의 교리의 뒤를 따르는 더 섬세하고 구체적인 사색으로부터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그러한 구분이 지극히 합당한 신앙적 유추라고 믿었고, 명확하고 분명한 개념 형성을 돕기 위해 유용할 수 있었다."(William Cunningham, The Reformers and the Theology of the Reformatiom (Carlisle, PA: The Canner of Truth Trust, 1979), 404.)

성경에서 직접 근거를 찾지 않고 철학적 사변을 통해 교리를 세우는 것은 중세 천주교의 스콜라 신학의 특징이고 아주 위험한 신학방식이다. 이것은 종교개혁 이후 다시 등장한 개신교 스쿨라주의(개신교 정통주의, 청교도 신학)의 특징이다. 행위언약 사상과 그리스도의 능동순종 교리는 개신교 스콜라주의의 산물이지 신약 성경과 사도들과 종교개혁자 칼빈의 신학이 아니다.

성경과 신약의 사도들에게 곧 죽을 사람으로 창조된 아담이 율법을 잘지키면 하나님이 영생을 주겠다고 언약했다는 행위언약 개념은 없었다. 아담이 못지킨 율법을 그리스도가 대신지켜 그리스도 자신이 먼저 영생을 얻었고, 우리 성도들에게도 그 영생이 주어졌다는 능동순종 교리의 개념이 없었다.

그래서 합신의 신학위원회 교수들은 자신들을 돕는 성경의 말씀을 전혀 찾아서 동원하지 못했다. 대신 뜻이 모호한 칼빈의 한 두 마디의 말을 찾아서 그것에 올인(all in)하고 있다. 과연 칼빈은 행위언약 사상과 능동순종 교리의 근거가 되는 신학 개념을 가지고 있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다음의 칼빈의 말들을 보면, 칼빈에게 그런 사상이 있었다고 볼 수가 없다.
 

“그러므로 아담이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하여 벌을 받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참으로 교만이 모든 악의 처음이었다는 어거스틴의 단정은 옳다. 사람이 자기의 처지에 만족하고 바른 한계를 넘으려고 하지 않았더라면, 태초의 상태에 머무를 수 있었을 것이다.”(기독교강요, 2.1.4)

칼빈은 아담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만족하고 하나님 백성으로 살기를 즐거워하였다면, 지금까지 처음의 영생의 상태가 지속되고 있을 것이라고 가르쳤다. 영생과 무관하게 창조된 아담이 노력(율법의 선행)하여 영생의 자격을 갖추었어야 했다는 이해는 칼빈에게 없었다.

“아담에게서 영생의 은사를 빼앗고 주지 않으셨을 때에 주께서는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고 하셨다(창 3:22). 이것은 무슨 뜻인가? 아담이 잃어버린 불멸성을 그 과실이 회복할 수 있었을까?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여호와의 이 말씀을 다른 말로 옮긴다면, ‘나의 약속의 상징에 집착해서 헛된 확신을 즐기지 못하도록 불멸에 대한 소망을 그에게 줄 수 있는 것을 그에게서 빼앗으리라’는 말이 될 것이다.”(기독교강요, 4.14.12)

칼빈은 영생을 소유했던 아담이 하나님께 반역했으므로 영생을 박탈당하였다고 했다. 임시적이고 불완전하게 창조된 아담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영생을 얻어 완전에 도달했어야 했다는 행위언약 사상은 칼빈에게 없었다.

그렇다면 칼빈에게 그리스도가 아담 대신 율법순종하여 영생의 자격(의)를 획득했다는 능동순종 개념은 있었을까? 성경 어디에도 율법에게 율법을 지키는 사람에게 의로움을 준다는 가르침이 없다. 칼빈도 율법에게 영생의 의를 주는 자격이나 기능이 없다고 보았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대신 죗값을 지불하심으로 주어진 죄 용서가 곧 우리의 칭의라고 칼빈은 가르쳤다.

“율법은 거울과 같다. 그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무력함과 무력에서 생기는 죄악들, 그리고 결국은 그 두 가지에서 오는 저주를 본다. 거울이 우리 얼굴에 있는 오점들을 보여 주는 것과 똑같다. 왜냐하면 의를 따라가는 능력이 없을 때에, 인간은 죄의 수렁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죄악의 뒤를 곧 따라오는 것이 저주다. 그러므로 율법이 우리를 유죄로 인정하는 범행이 중대한 것일수록 우리의 책임을 묻는 심판도 더욱 엄중하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고 한 사도의 발언은 여기 해당한다.”(기독교강요, 2.7.7.)

이와 같이 율법의 기능은 오직 인간이 자신의 죄악된 상태를 깨닫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라고 칼빈은 가르쳤다.

“율법은 앞으로 이 주제에 대해 논하게 될 때 더 명백하게 볼 수 있겠지만 그 유용성이 다양할지라도 특별히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의 방법을 가르치기 위해서 모세와 모든 선지자에게 맡겨진 것이었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율법의 마침’(롬 10:4)이라고 부른 것은 여기서 기인된 것이다.”(기독교강요, 1.6.2.)

이와 같이 성경과 칼빈의 신학이 정확하게 일치한다. 아담의 타락과 칭의를 얻는 방법에 관한 성경과 칼빈의 가르침은 동일한다. 칼빈은 율법이 주어진 목적은 오직 죄인이 하나님과 화해해야 할 필요성과 그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했다. 사람이나 그리스도가 율법을 지켜서 영생을 위한 의로움을 얻을 수 있다는 주장은 칼빈에게서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칼빈의 많은 말들 가운데 그 뜻과 의미가 모호하여 청교도주의자들이 좋게 써먹을 만한 내용이 있기도 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합신 신학위 교수들이 써먹은 다음의 이 말이다. 

"이러한(아담의 최초의) 순전한 상태에서 사람은 원하기만 하면 자유의지로서 영생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기독교강요 1.15.8).”

이 내용을 얼피 보면 칼빈이 하나님의 아담 창조의 완전성을 부정한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이 아담을 불완전하게 창조하였고 아담이 노력하여 스스로 영생을 얻음으로 완전해 지기를 요구하였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칼빈의 그 다음의 내용을 보면, 칼빈의 의도는 아담이 반역하기로 결단하지 않았으면 처음의 그 영생의 상태가 이후 계속 지속되었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바로 다음에서 칼빈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아담은 자기가 원하기만 했더라면 넘어지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그는 다만 자신의 의지로 타락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의지는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 질 수 있었으며 따라서 항구적인 인내성을 받지 못했던 까닭으로, 그는 아주 쉽게 타락하였던 것이다.”(기독교강요 1.15.8)

합신 신학위 교수들은 칼빈의 말을 교묘히 오용하였다. 그런데 합신 신학위 교수들이 이용한 칼빈의 또 다른 말은 좀 더 심각해 보인다. 마치 칼빈이 바르트처럼 인간이 불완전하고 임시적으로 창조되었으므로 필연적으로 존재의 완성이 요구되는 존재였다고 주장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무흠하게 머물렀더라면 첫 사람은 더 낳은 생명으로 넘어갔을 것이다."(CO 23:77).”

칼빈의 이 말은 마치 하나님이 교제와 사랑의 대상을 가지고자 아담을 불완전하게 창조하시었고,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나 무슨 다른 방법으로 인간의 존재를 하나님의 존재의 완전한 수준, 즉 신인합일의 수준으로 격상시키려고 계획했다는 주장처럼 보인다. 마치 아담이 더 완전한 생명으로 넘어가기 위해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는 것이 요구되었다는 것처럼 보이는 칼빈의 이 말은 꼭 바르트의 이단 사상을 카피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실 행위언약을 지지하면 필연적으로 이 같은 현상이 벌어진다고 서철원 박사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행위언약에 매이면 발트 신학에 귀결하는 것이 필연적인 사항이라고 할 것이다. 발트의 신학에 의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교제의 대상자를 갖기 위해 사람을 지으시고, 그와 교제하신 후, 그를 자기의 존재에까지 끌어올려 자기의 존재에 동참하게 하신다 ... 하나님은 이런 완성된 인간 존재를 가지시기 위해 처음 창조시 그를 파편적이고 임시적으로 지으셨다. 이 임시성의 제거를 위해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이루시고 그 성육신을 통하여 신인합일을 성취하신다.”(서철원, 하나님의 구속경륜, 14)

“개혁 신학자인 헤르만 바빙크도 그의 신학적 논의를 전개할 때 인간이 임시적으로 창조되어 완전한 상태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영생을 주시기 위해 언약을 체결하셨다고 가르치므로 발트 신학에 귀결하도록 개진하였다. 이런 신학적 귀결들은 행위 언약의 잘못된 설정헤 기인한다.”(서철원, 하나님의 구속경륜, 14)
 

과연 칼빈은 하나님이 아담이 불완전하고 임시적인 존재로 창조하시고 아담에게 스스로 노력하여 완전한 존재가 되기를 명령하였다고 이해하였을까?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이 부분을 정리해야 할 것이다. 

1) (그런 경우는 없지만 혹시) 만일 칼빈이 성경대로 가르치지 않고 어떤 이단적인 자들이 가르치는 내용과 유사한 말을 한 줄이라도 말했다면, 우리는 칼빈의 말이라도 성경에 근거하여 바르게 정리하여야 한다. 칼빈의 말 가운데 이해하기 어렵고 무슨 의도로 한 말인지 알기 어려운 내용이 있으면, 특히 그의 대표작 <기독교강요> 전체 내용에 비추어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아무리 유명한 신학자의 말이라도 반드시 성경의 빛에 비추어서 분별해야 한다. 신학은 성경에만 근거해야 하고, 성경에 근거하지 않으면 무조건 성경을 택하고 신학을 버려야 한다.

2) 만일 칼빈이 행위언약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면 필연적으로 행위언약을 완성하는 그리스도의 능동순종, 즉 그리스도가 사람 대신 율법을 지켜서 영생의 의를 취득했다는 주장이 나와야 한다. 그러나 칼빈은 어디에서도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가르쳤다면, 우리가 그를 추앙하고 존경할 이유도 없다. 그러나 칼빈은 언제나 그리스도 그 자신이 우리의 의라고 가르쳤다.

“의가 그리스도 안에 본질로서 존재하는데 바로 이 그리스도께 본질로 속한 의가 우리에게로 전가된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칼빈의 로마서 주석/신호섭 교수의 책 <전가교리> 68 페이지)

“믿음의 의는 죄의 사면과 무조건적 받아 주심에 있으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두 가지를 모두 받는다.”(칼빈의 고린도전서 1:30절 주석/신호섭 교수의 책 <전가교리> 70페이지)
 

맺는 말>

칼빈의 전체적인 가르침, 특히 그의 대표적 신학저작인 <기독교강요>의 가르침들을 보면 칼빈은 행위언약-능동순종 개념과 무관하다. 합신 신학위는 자신들의 거짓 사상을 옹호하기 위해 칼빈을 바르트주의자로 몰아가려고 한다. 칼빈이나 서철원이나 그 누구의 말이라도 성경과 다르며 무조건 버려야 한다는 신학의 대원칙을 따라야 마땅하다. 그런데 합신 신학위는 자신들의 그릇된 교리를 옹호하기 위해 일부러 성경을 도외시했고, 또한 칼빈의 많은 말들 가운데 이상한 것 하나를 찾아서 이용하려고 하니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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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