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난해한 구절에 대한 자의적이고 무책임한 억지해석

오늘 날의 여러 종교에서 나타나는 옹알거림이 성경의 방언이고, 또한 그것이 사람이 모르는 ‘영계의 신령한 언어’라는 주장의 근거로 사용되는 성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A. ‘천사의 말’(고전 13: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고전 13:1)

사도 바울이 언급한 ‘천사의 말’이 영계의 언어라고 주장되는 현대의 옹알거림 현상을 뜻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전후 문맥을 볼 때, 이 내용은 그 어떤 놀라운 능력과 은사를 가졌다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놓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사랑이 최고의 덕목임을 강조하기 위해 나타난 은유적인 표현이다. 실제로 천사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있다는 것인지? 천사들끼리 의사소통할 때 사용되는 영의 언어가 성도에게까지 주어지기도 한다는 것에 대한 논의를 전개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그리고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천사의 말’이 오늘 날의 옹알거리는 방언이라면 바로 그 앞의 ‘사람의 방언’은 또 무엇이라고 해석해야 하는가? 여기의 방언이라는 단어 ‘글롯사’는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의 성령의 은사로 나타나는 초자연적인 외국어 방언을 표기하는 바로 그 단어이다.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의 방언 이외에 천사들의 말 방언도 따로 있다는 것인가? 

B. ‘방언으로 기도하면’(고전 14:14)

▲ 사도 바울, 4세기 작품

바울이 ‘방언으로 기도하면’이라고 표현한 내용이 영계의 언어인 현대의 옹알거림의 근거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문맥의 전후를 자세히 살피면, 성경의 방언의 은사과 기도를 혼용하지 말라는 바울의 역설적이 책망이다. 기도 시간에는 정당한 성경의 방언을 풀지 말라는 바울의 책망이 도리어 기도의 방언이 있다는 억지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성경과 방언과 무관한 옹알거림 현상을 옹호하는데 사용되고 있으니, 더욱 한심한 일이다. 어쩌면 고린도 인근의 델피 신전의 여 사제들에게서 흔히 나타났던 신비적인 옹알거리는 현상이 고린도 교회 속으로 침투한 것에 대한 사도 바울의 심각한 책망이라는 의견도 많다. 방언기도 자체를 부정하는 말씀이 근거없는 영계의 언어인 옹알거림 현상을 옹호하는 주장하는 근거로 사용되는 것은 당치 않다.

C. ‘영으로 기도하고’(고전 14:15)

바울이 ‘영으로 기도하고’라는 표현한 것이 영계의 언어로서의 방언의 기도를 뜻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바울은 다른 곳에서 ‘성령으로 봉사하며’(빌 3:3)라고도 말했다. 두 곳에서 같은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영으로 봉사하며’로 다시 해석되는 될 부분이다. 성령으로 봉사하라는 말씀이 ‘방언으로 봉사하라’는 뜻이 아닌 것처럼, ‘영으로 기도하고’라는 내용도 방언으로 기도하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없다. 또한 조금 뒤에서 나타나는 ‘영으로 찬미하고’(고전 14:15)라는 문구도 방언으로 찬미하라는 내용이라고 볼 수 없다. 영으로 기도하라는 것은 이방인들의 주문을 암송하는 것처럼 기도하지 말고, 성령의 도우심 안에서 정성과 지성과 인격을 담아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D. ‘영이 기도하거니와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고전 14:14)

바울이 방언에 대해 설명하면서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라고 말한 내용을 가지고 지금의 옹알걸리는 현상이 비록 신자의 인격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할지라도 그 신자의 영혼에게는 신령한 힘을 미치는 능력있는 기도이므로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는 바울이 말하는 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이다. 이방종교들은 인간을 이원론적으로 이해한다. 인간에게 의지적(지성적)인 영역과 영적인 영역이 구분되어 존재한다고 생각하면서, 인간 안에서 영혼과 마음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여긴다. 많은 이방 종교들이 인간의 영혼이 육체(마음)와는 별도로 사고하고 활동한다고도 가르친다.

그러나 성경적인 관점에서 보는 인간은 영혼과 육체가 완전하게 결합되어 탄생하는 하나의 인격체이다. 영혼과 육체의 완전한 결합으로 인해 발생한 인격이 곧 인간이라는 존재이다. 성경 어디에도 영혼이 육신(마음)으로부터 독립하여 고유한 사고 체계를 별도로 가지고 있다고 암시하지 않는다. 우리의 몸은 부모로부터 유전되어 만들어졌고, 영혼은 하나님이 손수 지으시어 우리의 몸 속으로 넣어주셨다. 임신 과정의 어느 때에 영혼과 육체의 결합이 이루어지는지를 알 수 없으나, 영혼과 몸이 완전하게 연합됨으로 인해 살아있는 인격체가 되었다.

인격이라는 말 속에는 몸과 영혼이 모두 내포되어있다. 그리고 숨이 끊어지기 전에는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지 않는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언제나 영혼과 육체가 결합되어 나타나는 인격으로 존재한다. 오직 숨이 끊어지는 순간 영혼은 육체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육체는 부패 과정을 거쳐서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 그 전에는 잠시도 영혼만의 별도의 활동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방언 기도가 인간의 마음에는 유익이 없으나 영혼에는 큰 유익이 되는 신령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위험스러운 것이다. 자칫 저급한 육신보다는 고급스러운 영혼을 직접 보양하는 특별한 신앙활동이 존재한다는 주장으로 연결될 수도 있다. 

그러면 바울 사도는 왜 이렇게 표현하였던 것일까? 과연 바울 사도는 육신과 영혼을 위하는 각각의 신앙활동이 따로 있다는 사상을 가졌던 사람이었던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사도 바울의 글 어디에도 그런 사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이 이 문장을 통하여 강조한 것은 비인격인 옹알거리는 현상, 또는 성경의 진짜 방언을 기도 시간에 풀어놓는 행동이 그 신자에게 전혀 유익이 되지 못하고, 그런 행동이 정상적인 기독교 신앙의 범주에 속하지 못한다는 것을 특별하게 강조한 것으로 이해 할 일이다. 결코 마음에 아무 작용도 못하는 옹알거리는 소리 현상이 영혼에게 신령한 힘을 미치는 성령의 은사라고 가르친 것이 아니었다. 이방종교인들이 하고있는 쓸잘떼기 없는 짓거리를 즐기지 말라는 말이었다고 이해되어야 한다.

E.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고전 14:2)

이 내용을 근거로 현대의 방언기도가 성경의 방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그리고 이 주장이 가장 옹알거림을 성경의 방언으로 미화하기 위한 가장 그럴싸한 논리적 근거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바울은 말하는 ‘비밀’이란 무엇일까? 바울에게 ‘비밀’이라는 단어은 사람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에게 속하여 있는 것, 즉 그 당시 사도들을 통해 드러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구원계시를 뜻하는 말이었다. 바울은 이 단어를 다음과 같이 사용하였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고전 4:1)

바울에게 비밀은 하나님 편에서 사람에게로 계시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사람이 하나님에게 비밀을 알려준다고 한다. 대체 하나님이 모르시는 사람의 비밀은 무엇일까? 하나님이 모르시므로 사람이 하나님께 알려주어야 할 비밀은 과연 무엇일까? 과연 누가 이 내용의 뜻을 속 시원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정확하게 알 수 없는 난해구절을 자기의 주장을 위해 억지로 푸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이단들이 사용하는 대표적인 수법이다.

그리고 여기서도 바울은 사람이 보편적인 언어를 다른 사람에게 구사함을 뜻하는 단어를 사용하여 ‘말한다’고 하였다.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한다고 하지 않았다. 성경에는 기도를 의미하는 분명한 단어가 있으나, 여기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다. 이렇게 어색하게 풀면서 현대의 옹알거림 현상이 영계의 언어인 성경의 방언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옳지 못하다. 정확한 뜻을 모르면서 억지로 풀면 미혹하는 사탄에게 큰 기회를 주게 된다. 지금 나타나는 방언의 99.99%는 성경이 명백하게 말씀하는 외국어가 아닌 영계의 언어라고 주장되는 지극히 주관적인 소리현상이다. 이렇게 흔한 옹알거리는 소리현상의 근거를 성경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F.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 14:39)

바울이 방언 말하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말한 내용이 오늘 날의 옹알거리는 현상을 옹호하는 근거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사람이 사람을 향하여 말하는 성경의 방언 현상을 금하지 말라고 하였지,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복음이 사람에게 설명되는 성경적 방언의 은사를 활용하여 사람들에게 복음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을 주는 귀중한 신앙활동을 금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이 당시에는 아직 성경이 완성되지 못했다. 아직 복음의 계기가 모두 명료하게 교회에 드러나지 못했다. 계시가 주어지고 있는 과도기적인 상황에서 임시적이고 계시적인 방언 은사를 통하여 복음계시가 보충되고 있었다. 그런 상황이었으므로 마땅히 방언의 은사가 활발하게 사용되어야 했고, 신자들을 그것을 통해 복음의 원리를 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방언을 통역과 함께 사람에게 말해지는 것을 막지 말았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성경이 완성되었고,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차별없이 한 몸이 되는 하나님의 교회가 설립되었다. 그래서 성경의 방언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언제부터 방언이 사라질 것이지 더 이상 기대하지 말라는 명료한 말씀이 없으므로 지금 성경의 방언을 사모한다고 하여 책망당하거나 그릇되었다고 비판받을 수는 없다. 중요한 사실은 무의미한 옹알거림을 성경의 방언이라고 우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G.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고전 14:18)

바울이 다른 사람들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감사한다고 말한 이 내용이 지금의 옹알거림 현상의 근거라고 주장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바울은 사람이 사람을 향하여 실제 언어를 구사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는 옹알거리는 소리를 뜻 한다면 ‘비밀의 방언으로 기도하므로’라고 하였을 것이다. 바울은 최소한 로마어, 헬라어, 터어키어, 히브리어를 맘대로 구사하면서 복음을 전했고, 또한 스페인까지 가서 선교하기를 소원했으므로 스페인어에도 능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H.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고전 14:28)

이 내용이 영계의 언어로 기도한다는 현대의 옹알거림 현상의 근거라고 주장되고 있으나, 이 내용은 통역없이 일방적으로 풀어대는 무절제한 방언이 교회에 유익되지 못하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대목이다. 통역이 없는 방언은 교회를 어지럽게 할 뿐이니 그리하지 말라는 것이다. 실제로 방언을 자신과 하나님께 하라는 뜻이라 보기 어렵고, 성경에서 그런 방언 활용에 대한 가르침을 일체 찾을 수 없다. 이 내용은 사도 바울이 방언을 남용하는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조롱하는 역설적인 말투로 심히 책망하는 내용이다. “통역없는 방언을 교회에서 떠들지 말라! 굳이 하고 싶다면 네 집으로 가서 혼자서 맘대로 해 라!”라는 핀잔의 말이다. 이는 성경의 방언이 공개적으로 반드시 통역과 함께 활용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가 함께 누리게 만드는 계시를 보충하는 은사였음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정이철 / 앤아버 반석장로교회 목사, 바른믿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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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