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일 목사
김현일 목사

우리가 흔히 교회 생활 가운데 자연스럽게 각자에게 붙은 단어가 바로 ‘믿음’이라는 단어이다. 그리고 이 믿음을 세 부류로 분류하는데 솔직한 심정으로 이것은 어찌 보면 아주 조심스러운 부분이고 지극히 주관적이거나 아니면 신학의 부재에서 정해진 분류라고 보고 싶다. 좌우지간 그 첫째는 믿음이 없는 사람이며 다음은 믿음이 적은 사람 마지막으로는 믿음이 많은 사람 혹은 좋은 사람이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잘 알아야 하는데 믿음의 기준과 그 수위를 정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릇된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고 성령을 훼방하는 자라고 하는 말들을 어색하지 않게 사용함과 유사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피조물인 인간이 식별하거나 판단해서 그 수위와 형량을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믿음의 유무를 결코 단언하는 일을 금해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믿음이라는 말은 '지식'이라는 것보다 경미한 상태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 본다면 어떤 이에게 무슨 일에 관하여 말을 하고 나서 막상 그 말이 다른 사람에게 전해지기를 원치 않는데 직접 그런 요구를 하기는 어려우니까 돌려 말하기를 “이 말을 다른 사람에게는 전하지 아니할 줄로 제가 믿습니다” 하고 완곡하게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사람이 절대로 그 말을 하지 않을 줄 알았다면 굳이 돌려서 말을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는다는 말의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의미는 이런 것이지만 성경에서는 그렇게 쓰지 않는다. 적어도 신앙(信仰)이라고 해서 한자로는 우러러볼 앙(仰) 자를 붙여서 쓸 때는 훨씬 중요한 종교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다. 종교적이라는 말은 인간 마음에 내재 되어 있는 종교적 요구에 저촉되어서 나오는 내용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성경에 나오는 '믿는다'라는 말이 항상 믿음과 관계되어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결과를 표시하는 것은 아니다.

믿음과 관계되어있는 사실로 성경에서 가르친 가장 중요한 결과는 바로 이 '멸망하지 않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한마디로 믿음이라는 말은 멸망하지 않는다, 혹은 영생을 얻는다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성경은 '믿음을 대가로 멸망을 면케 되고 영생을 얻는다'는 관념을 절대로 가르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믿음이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어떤 실질적인 능력이 그 사람에게 있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말에서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말은 구원의 사실이 거기 있다는 것을 실증해주는 구체적인 내용이 바로 믿음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믿음이 네게 있으니까 그것을 자본 삼아서 구원을 취득할 수 있다든지 그것과 바꾸어서 구원을 네게 오게 할 수 있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여기서 '믿으면' 이라는 말 때문에 그 말을 오해하기가 쉬운데, 개혁교회가 가지고 있는 명확한 정신은 “믿음은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것"이라는 말씀(참조 유 1:3)에서 보듯이, 믿음은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주셔서 그것으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확신하게 한다는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지 믿음으로 산 것이 아니다. 구원의 사실과 동시에 그의 영혼의 기능 가운데 믿음이라는 중요한 현상이 벌써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모든 것들이 드러난 현상(現想)적 세계에서는 그것을 가지고 구원의 중요한 증거로 삼는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히 11:1)

이렇게 믿음이라는 것이 증거라고 가르친 것이다. 이런 까닭에 '믿으면'이라는 말은 이 조건을 구비 한 것으로 인하여, 그것을 대가로 해서 너에게 구원이 온다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믿으면 거기에 구원의 사실이 있다는 것을 실증하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는 것임을 강조하고 싶다.

복음주의를 표방하는 어떤 교회에서는 믿음을 대가로 생각해서 “믿으시오. 믿으면 그것 때문에 구원받습니다" 하고 사람이 믿음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처럼 말을 하는데 개혁교회가 가지고 있는 중요한 교리는 그것이 아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고 하나님이 구원하셨으면 그것 때문에 그의 영혼의 기능에는 믿음이라는 확실한 능력의 작용이 있어서 다른 사람 앞에 구원받은 자라는 것을 증거 하기도 하고, 구원받은 자로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구원받지 못한 이 세상 사람과는 어떻게 다른가를 증거 하기도 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여러 가지 약속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약속에 따라서 하나님이 특별히 돌아보시고 주장해 주신다는 사실을 표시해 나가는 의미이다. 이런 것들이 믿음이라는 말과 관련하여 이주 중요하게 살펴서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믿음에 관한 단어를 잘 이해하고 구분하여 사용하여야 할 것이다.

칼빈은 믿음을 이렇게 정의한다.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어진 약속의 진리에 근거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의에 대한 확고하고 확실한 지식으로, 성령에 의해 우리 정신에 계시 되고 우리 마음에 인쳐진 것”이다(기독교강요 3,2,7) 라고 하였다. 그러기에 믿음은 복음의 내용, 복음에 관한 교리나 사실에 평범하게 동의하는 것 아니다. 믿음은 오직 그리스도에만 근거한다.

믿음이란 유일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 17:3)이다. 나아가서는 우리의 행위가 아닌 마음에 지,정,의가 ‘좌소’(座所) 하고 있어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신앙으로 자리 잡고 있을 때 그것이 바로 구원받은 자로서의 믿음을 소유한 자라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믿음은 단순한 견해이나 평범한 신념이 아니므로 구별되어야 한다. 단순한 신념에는 구원이 없으므로 구별되어야 한다. 믿음을 이렇게 바로 이해할 때, 우리는 ‘오직 믿음’과 관련된 여러 가지 오해들을 쉽게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이신칭의의 교리가 성도로 하여금 윤리적 나타나 복음 전도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진다는 비판은 ‘오직 믿음’에서 ‘오직’만 보고 ‘믿음’의 성격에 대해서는 충분히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것을 발전시키자면 “오직 믿음”은 “오직 (전도하는) 믿음”이라고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야고보가 말했을 때, 이 믿음은 믿음이라고 부르지만 믿음이 아니라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

결국 모든 교회가 보다 더욱 신중해야 할 문제는 믿음의 척도를 행함에 두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믿음에 행함은 믿음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행함을 강조한다고 해서 성도들이 선행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거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믿음을 일으키기 위해서 무엇보다 강단에서 말씀의 선포가 바르고 깊이 있게 성도들에게 전해져야 할 것이다.

”믿음은 두루뭉술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지식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안타까운 현실은 개혁교회라 하는 교회들마저도 생명력을 잃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설교 안에 여러 가지 비 복음적인 요소들이 많이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성도들을 즐겁게 하고 감동과 놀라움을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들은 구원에 이르는 신앙을 일으키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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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일 목사는 중앙대학교 법학 수학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법학(B.A) 호서신학대학원 & 개신원(M.Div) 총회신학연구원 (Th.M) 에서 공부를 하였고 경북 영주 현대중앙교회(예장 백석 ) (1993~현재) 개척하여 담임하고 있고, 성경 중심적 칼빈주의 개혁주의 교회를 지향하여 바른신학, 바른믿음, 바른생활의 공동체를 세워 가고자 정진하고 있고, 늦은감은 있지만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해설집 공동 집필 및 기타 칼빈주의 정론에 관한 서적 집필에도 신학자들과 동역하며 연구하는 사역에도 주력하고자 뜻을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