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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서울시장 박 씨의 갑작스런 자살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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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서울시장 박 씨의 갑작스런 자살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 정양호
  • 승인 2020.07.15 11:5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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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전 서울시장 박씨의 갑작스런 자살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님의 뜻을 기억하겠다. 너무 맑은 분이라서 그랬다. 성문제로 자살한 사람을 영웅시하여 정치적으로 이용한다“ 는 등 말이 많다. 미국 감리교회 K목사가 최근 자살한 고 박 서울시장에 대한 추모하는 글을 올렸다

“북한산에 오르는 길…한 때 치열했고 한 때 빛났던 그의 생을 그렇게 마감하려할 때 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사랑하는 사람들이 받을 상처, 기대했던 사람들이 받을 실망, 상처 주었던 사람들이 겪을 고통을 모르지 않았을 터인데 그렇게 가기로 결심했을 때 그의 마음이 어떠 했을까?”

2019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우리나라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36개국 가운데 1위로 하루 평균 37.5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는 것을 보면 한국교회에 대한 그 책임이 크게 다가온다. 그리스도인은 주님 말씀에 절대 순종하고 따라가는 앵무새이다. 우리 주님이 싫어하면 싫어하고, 좋아한다면 좋아하고 미워한다면 미워해야하고, 정죄(定罪)한다면 마땅히 정죄(定罪)해야 한다. “악은 어떤 모양(模樣, 흉내)이라도 버리라”(살전5:22) 했다면 버려야만 한다. 그 믿음이 과연 건강한 믿음인지, 아니면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찰은 달았지만 건강치 못한 가룟유다과인지 분별(分別)하려하지 않고, 자살이든 뭐든 구원 전선에 이상이 없다고 공공연하게 떠들어대는 왜곡된 이신칭의의 신학 논증으로 인해, 행여라도 한국 교회 안에 자살자가 만연하는 사태가 오는 것을 우려하는 것이다.

40년전 교사시절 성락교회 김기동목사 뵈뢰아에서 성경공부를 열심히 다니던 여선생님 두 분이 어느날, “정 선생님, 알고 계셔요?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도록 하여 구속에 일조한 공로자이기 때문에 그 공로로 인해 자살했지만 그는 틀림없이 구원을 받았습니다.”라는 엉뚱한 이야기를 너무 확신있게 하였다. 당시 신우회 책인자로서 흔들리는 신우회를 위해 결국 그들의 모임을 학교밖에서 갖도록 쫓아냈지만 이 문제로 많이 놀라고 고민하였었다. 그후 자살에 대한 수수께끼를 한번 풀어보려고 읽고 쓰면서 정리하고 있지만 아직도 현재진행형 수수께끼이다.

I. 가롯유다의 자살 미스터리

성경은 소설이 아니지만 수수께끼의 한 인물이 등장한다. 배신자(背信者)의 대명사로 꼬리표가 붙은 가룟 사람 유다의 삶을 추적해보는 것은 참 재미있는 일이다. 그는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 영광스런 부름을 받았고 공생애(公生涯)기간 동안 주님과 생사고락을 같이 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복음서 기자들은 한결같이 그에 대한 코멘트를 시작할 때 언제나 직설적으로 유다라 말하지 않고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라고 길게 좀 껄끄러운 단서를 붙여 표현한다.

아마 그는 다른 제자들처럼 중심으로 예수님을 따른 것이 아니라, 단순히 질이 다른 한 멤버로 가담(加擔)되었음을 강하게 고발하고 싶은 의도로 보인다. 가룟 유다는 기록 서열상 맨 마지막으로 제자들의 공금을 관리하는 회계 역할을 하였다.

아마 그는 계산도, 동작도 빨라 제자들의 살림살이를 조달할 때 살짝 살짝 거짓말을 둘러대 공금을 유용하거나 횡령하는 것은 물론 그럴 듯한 명분을 내세워 자기 이익과 출세의 발판으로 연결하는 남다른 수완가(手腕家)였을지 모른다. 옛말에 아무리 없이 사는 집이라도 도둑놈은 훔쳐갈 것이 있다고 한다. 머리 둘 곳도 없으셨던 예수님과 제자들의 형편을 생각해 본다면 변변치 않은 것이라 해도 그에게는 벼룩이 빈대의 간을 훔쳐 먹는 재미라도 있었던 모양이다. 요한은 가룟유다를 가리켜 아예 도적(盜賊)이라고까지 표현하였다. (요 12:6)

그런 면에서 아마 따돌림을 당했을 수 있고 그로 인한 갈등(stress) 상황은 정신분열증(精神分裂症)을 초래하여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예수를 팔았고 마침내 자신을 자살로 몰아갔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도 없다. 여기에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를 늘 방해하는 사탄의 사주(instigation)가 가담되어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되듯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생명을 훔치는 데까지 가고 말았다(눅 22:3.요 13:2,27).

한번은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예수님을 위해 향유를 부었다. 노동자 1년 치에 상당하는 돈이 순식간에 땅바닥에 쏟아지는 것을 보고 그는 “왜 저 큰돈을 가난한 사람을 위해 쓰지 않고 허비하는가?”라며 상당히 분노하였다. 그가 만약 열심당원으로 정치적인 야욕을 품고 있었다면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 비폭력주의자인 예수님의 말씀이나 창녀나 부녀자들에게 친절한 행동이 사사건건 더 큰 분노의 감정으로 축적되었을 개연성이 엿보인다.

아마 그 분노의 감정으로 예수를 팔았다손 치더라도 3년간 예수님의 뒤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따라다니면서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예수는 죄가 전혀 없다!”는 사실의 발견이었다. 이점은 당대의 최고 정보통이었던 로마 총독 빌라도도 이 사실에 동의하고 있었다.(눅23:4) 유다는 예수님의 어떤 범죄 사실을 빌미로 그의 스승을 넘긴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설령 그가 유대주의자들에게 예수님을 파는 대가로 돈을 조금 챙겼다 해도 죄형법정주의(罪刑法定主義)로 유명했던 현명한 로마의 총독 빌라도 법정에서 당연히 예수님은 무죄(無罪)로 판명될 것이 분명하고, 장사꾼에게 남는 것은 일확천금(一攫千金) 노다지요, 그 후 예수님과 관계를 적당히 청산한다 해도 별무리가 없을 것이라는 머리를 굴리면서 법정 한쪽 구석에서 판결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가룟유다의 치밀한 시나리오와는 달리 빌라도는 정상적이고 합법적인 절차를 깡그리 무시한 채 유대주의자들의 음모와 권모술수의 여론 정치 각본에 떠밀려 빌라도 답지않게 예상치 못한 사형 선고를 내리고 말았다. 사형 언도에 충격을 받은 이 일말(一抹)의 양심은 즉각 뉘우침과 동시에 스승을 넘겨준 대가로 받은 본전만이라도 돌려준다면 사태를 원상태로 수습할 수 있으리라고 순진한 발상까지도 시도했지만, 한갓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성경은 이런 사실을 다음과 같이 시사한다. "그때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는 예수님에게 사형선고가 내린 것을 보고 뉘우쳐 은화 30개를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돌려주며 내가 죄 없는 사람을 죽이려고 팔았으니 정말 큰 죄를 지었소“하였다(마 27:3~4, 현대인의 성경 인용)고 기록되었다.

아마 바로 ”죄없는 사람을 죽이려고 팔았으니“ 이 거짓말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 그의 양심을 두드릴 때 얼마나 괴로워했을까? 이에 그는 “내가 무죄(無罪)한 피를 팔았도다!”라고 한탄하며 마침내 자기 자신을 향해 용서 못할 분노의 불을 내 뿜었던 것이 아닐까(마27:3~5)가룟유다가 자신의 죄를 통회 자복하며 주님께 돌이켰다면 두말할 여지없이 베드로처럼 위대한 사명자가 되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다"(막 14:21).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눅 22:22).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등 배신의 최후 순간까지 여러 차례 약하게 또는 강하게 회개를 촉구하셨던 사랑하는 우리 주님의 간곡한 음성마저 거절한 그는 결국 회개의 기회마저 상실한 채 동정의 여지 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행1:25) 돈도, 명예도, 목숨도, 더 나아가 영원한 생명까지 한꺼번에 날리고 말았다.

참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하나님나라의 일에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며 참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한 교인들에게, 전도자의 간곡한 구원 메시지를 듣고도 도무지 회개할 줄 모르는 이들에게, 세상 지혜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무결하심을 의심하는 이들에게, 신앙양심마저 내팽개치고 예수 이름을 이용하여 세상정치와 자기 명성과 사업을 위해 한 몫 챙겨보겠다는 야망가들에게, 날마다 알게 모르게 자기 의(義)의 바벨탑을 쌓으면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뻔뻔스런 우리 모두를 위해 성경이 계시한 가룟 유다의 사건은 타산지석(他山之石)의 나침반이 분명하다.

II. 가룟유다 자살에 대한 진실 공방 해석

A. 어떤 이단에 속한 사람들은, “예수가 가룟유다의 연인 마리아를 연모했으나 마리아가 거부하자 실망한 예수는 가룟유다를 배신자로 몰았다”라고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말한다.

B. 가룟유다는 구속사의 희생양

많은 논란과 충격을 준 영지주의 문서인 “유다 복음서 (위경(僞經)이 1976년 이집트의 한 골동품 시장에서 발견되었다. 가룟유다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유다 복음서”에서는, “가룟유다가 예언의 실현 도구, 구속사를 성취하기 위해 총대를 멘 희생양인 것이다. 예수의 부탁을 받고 배신하고 자살을 했기 때문에 유다의 행위는 배신이 아니라 순종이다.” 그러기 때문에 ‘유다의 자살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고 유다는 구속사의 영웅이다’라고 해석한다.

C. 가룟유다의 성인화 작업

제2차세계대전을 일으켰던 독일의 나찌스 히틀러(로만카톨릭 예수회맴버)는 강제수용소를 만들어 게르만 민족을 단합시켜 전쟁의 지지를 얻기 위해 유대인들을 반나찌스라는 딱지를 붙여 600만명을 학살하였다. 이유는 불분명하나 대학살 후 독일 예수회를 중심으로 예수를 배반한 가룟유다의 성인화 작업을 시도함으로 유대인들을 무참하게 학살한 자신들의 죄를 무마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엿보인다.

D. 가룟유다를 성인 반열로 재평가

예수를 배반해 기독교계 최대 죄인으로 낙인 찍혀있는 예수의 제자 가룟유다가 교황청 학자들에 의해 재평가될 전망이라고 보도(2006.1.19. ENI)하였다. 유다의 명예 회복을 추진 중인 바티칸 학자들은 겟세마네동산에서 은화 30냥을 받고 예수를 로마 군인들에게 넘긴 것이 고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하나님의 사역을 수행하였다고 전제한다. 결국 어떤면에서 하나님이 모든 죄를 조장했기 때문에 그의 도구로서 충실한 가룟유다에게 형벌을 내리는 것은 가혹한 처사이며 부당한 형벌은 철회되어야 마땅하다는 발상을 하였다. 비토리오 메소리라는 바티칸 학자는 가룟유다는 예수로부터 용서를 이미 받았으며 사막에서 영적 수행(Spiritual exercise)을 통해 스스로 죄를 씻을 것을 명령 받아 연옥에서 천국으로 이동하였다고 함으로 소위 위경인 유다 복음서의 내용과 일치하는 주장을 하였다. 1,2세기 영지주의자들이 예수를 복음의 중심에서 빼고 유다가 그 중심에 들어가게 함으로 이미 복권(復權)을 시도하였었는데 로마 가톨릭의 성인의 반열에 올리려고 현대판 복권을 저울질하는 것은 종교와 정치의 야누스의 두얼굴을 가진 로만카톨릭이 이스라엘과의 정치적 관계 개선을 목적으로 성경을 왜곡하여 이용한다는 반증이기도하다. 기타 성공회나 자유주의 신학계통에서도 비슷한 현상을 보이고있는 것이 사실이다. 익나티우스로룔라(Ignatius Rocha,예수회)는, “ 만일 카톨릭 교회가 성경말씀과 상관없이 ”검다“라고 확정한다면, 설령 흰색이 사실일지라도 그것은 ”검다“라고 확신하는 그런 자세를 지녀야 한다.”라고 말한 것을 보면 충분히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E. 약자로 둔갑한 가룟유다의 영웅화

항간에 어떤 사람들은 기득권 금수저 세력인 복음서 기자들이 흙수저 소외 세력인 가룟유다를 사회적 약자, 못된 사람으로 몰고 간다고 볼멘소리를 터뜨린다. 이런 면에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타도의 대상이요, 오히려 약자로 둔갑한 가룟유다는 배신자가 아니라 자기 사명에 충실한 영웅으로 부각되어 상당히 지지세를 넓히고 있는 것 같다. 거짓의 명수인 사탄은 성경에 그려진 모습 그대로 받으려 하지 않고 예나 지금이나 탁월한 왜곡, 날조, 변조 해석으로 여전히 가룟유다 자살 바이러스 중후군 환자들을 대량 재생산하고 있다.

F. 최악의 왜곡은 생명의 주권이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라,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개인의 선택권리임으로 자살을 동조, 옹호하는 비성경적 사상의 문제이다.“주님의 구속사를 완성하기위해 최선을 다한 가룟유다의 자살이 죄가 아니며, 설령 죄를 지었다해도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구원 받았다”는 김기동 뵈뢰아나 천주교의 해석 논리를 지적할 수있다.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듯 제3자가 이해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자살은 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III. 그리스도인의 자살과 구원문제

본질적으로 선택받은 그리스도인과 자살은 결코 양립할 수 없다. “오직 산 자 곧 산 자는 오늘 내가 하는 것과 같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신실을 아버지가 그의 자녀에게 알게 하리이다.”(사38:19) 이사야의 고백처럼 두말할 필요 없이 생명의 주권은 인간 개인의 선택 권리에 의해 이땅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주신 우리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속한다. 전도를 하다보면 예수 안믿는 사람들은 이 기본적인 사실을 믿지 않고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살 것인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 영광이 목표인데 그럼에도불구하고, 실제적으로(practically) 죄인이면서 의인(positionally)인 그리스도인의 현재 상황은 사도바울 같은 고백을 할 수밖에 없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육신을 입은 연약한 인간에게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요일2:16)이 끊임없이 유혹하기 때문이다. 특히 자살의 욕망 역시 결코 예외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다가오는 어떤 문제, 내 자신이나 타인이나 교회, 선교 필드의 국가와 사회문제를 진단할 때 본질적으로 보이지 않는 영의 문제가 결국은 육체의 보이는 문제로 표출된다고 판단하고 진단해야 한다. 누구말대로 "제정신으로 자살을 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한순간 저주에 배신을 쏟았던 베드로는" 닭울기 전에 네가나를 세번 부인하리라"라는 말씀이 생각나서, 생각나서, 생각나서...통곡하며 돌이켰다고 하였다.

그러나 사탄이 들어가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던 가룟유다는 베드로나 피장파장 오십보 백보의 같은 배신의 상황에서 창조주의 절대주권을 무시하고 목을 매 죽을 생각을 하고 자살을 실행하였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제 길로 가버렸다. 예수님 말씀이 생각도 안나고, 생각을 할 수 없는 상태로 마치 심각한 우울증, 강박관념, 죄책감, 심리압박 등 심리적, 영적 병든 상태가 된 것이다. 자살을 연구한 심리학자들은 지적하기를 자살하는 사람의 대부분은 생각이 마비된다고 진단한다.

성경은 성도들을 위해 참 그리스도인의 승리하는 모습을 여러 각도에서 생생하게 그려놓았다. 의인 욥은 “내가 복을 바랐더니 화가 왔고, 광명을 기다렸더니 흑암이 왔구나.”(욥30:26) 재물과 가족을 다 잃는 온갖 고난이 와도, 친구들이 다 버려도, 하나님의 응답이 눈에 보이지 아니해도 인생의 걸음걸이를 다 세시는 주권자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승리하였다. “그 후에 욥이 140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4대를 보았고, 나이 늙고 기한(期限)이 차서 죽었더라”(욥42:17)라고 기록한다. 가룟 유다를 제외한 예수님의 제자들, 사도바울도 역시 엄청난 핍박과 죽음의 고난을 통과하며 결코 生命을 포기하지 아니하고, 영원한 生命의 복음을 위해, 하늘의 신령한 복을 더 사모하며 자신들의 생애를 불태웠다.자기의 어떤 유익과 인간적인 목적을 위해 주님을 3년간 따라다녔던 거짓 제자의 대표 브렌드 가룟 유다의 자살 사건은 오늘 그리스도인에게 경고로 주신 산교육 교제이다.

목회현장에서 종종 경험한다는 알츠하이머나 치매, 정신분열증 등으로 목사, 권사 등이 예수를 모른다며 자살하는 분들의 그 순간, 마지막을 아무도 알지 못한다. 만약 어떤 자살자가 마지막 순간에 베드로처럼 주의 말씀이 생각나서 “살자!”로 돌이킬 수 있다면 얼마나 큰 은혜인가? 더 이상 삶을 돌이킬 수 없는 벼랑 끝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그 순간 “상한 갈대,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시는 주의 은혜를 입었다면 아마, “...구원은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전3:15) 한 인생의 죽음이 자살이든 타살이든 자연사이든 어떤 형태의 죽음이든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가 있음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믿음으로 잘사는 것도 복이지만 믿음으로 잘 죽는 것도 엄청난 축복이다.

IV. 자살을 예방하기위한 노력들

현대 심리학에서는 자살을 정신적 갈등, 죄책감, 우울증 등 정신적인 질병의 결과로 해석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현대 과학의 연구 성과도 하나님께서 주신 일반 은총으로 잘 활용하는 것이 지혜이다. 그러나 자살을 단순히 마음이나 정신적인 질병의 한 결과로 국한 시킨다면 자칫 영적인 질병을 간과할 수 있다. 본질적으로 자살의 원인은 죄로부터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이 마귀의 역사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가룟 유다의 마음속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 바이러스를 집어넣었다(요13:2,마22:3)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갔다(요13:27)는 표현은 자살이 단순히 정신 병리학의 차원이 아니라 영적인 차원임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러므로 정신적인 문제는 심리학적으로 접근하더라도 영적인 문제는 영적인 접근 방법이 옳고 복합적으로 전인 구원의 차원에서 치료하려는 통찰력이 필요하다.

요즘 자살을 예방하려는 다양한 접근 방법을 시도하고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본질적으로 하나님은 인간의 생(生, 새싹)을 명(命, 명령)하셨다. 생명의 소유가 하나님 자신의 절대주권임을 말한다. 하나님이 사람을 의지가 없는 로버트로 만들지 않고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신 뜻이 있다.

더구나 십자가에 목숨 버린 사랑으로 죄에서 우리를 건져 영원한 새 생명을 주셨는데 자살은 어떤 경우에도 그리스도인에게는 합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죄로 타락한 이 지구촌의 인생이라면 누구에게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삶의 고난과 각종 질병이 불가피하다. 하나님께서는 그 고난을 극복할 힘도 주셨다고 믿는다. 자살이야말로 최대 최적의 도피처라고 속삭이는 거짓말 자살 바이러스는 고난 앞에 좌절함으로 우리의 귀한 목숨까지 송두리째 빼앗아 간다.

“파란하늘, 맑은 공기 이런 걸 느끼기만 해도 큰 행복이란 걸. 살아 숨 쉬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라고 고백하는 백혈병 소년과 엄마가 둘이 함께 쓴 “정표이야기”라든지 “내가 온 힘을 다해 암과 싸웠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주세요. 내게는 아직 한쪽 다리가 있다” 면서 꺼져가는 마지막 생의 작은 불꽃이라도 너무 귀하고 소중한 것임을 일깨워주는 주변의 이야기는 무수히 많다.

예수를 팔고 빌라도 법정의 사형언도를 본 가룟 유다는 “무죄한 피를 팔았다”는 자학과 절망의 고통 가운데 몸부림치며 일말의 기대를 걸고 대제사장들에게 찾아갔었지만 그들에게는 피도 눈물도 한 방울의 동정도 찾을 수 없었다. 무죄한 예수를 죽여 인간적인 기득권을 움켜쥐는데 혈안이 된 이들에게서 꺼져가는 한 생명을 돌봐줄 그 어떤 여력도 찾을 수 없었다. 죽어버린 종교의 한 단면이다. 안타깝게도 예수의 수난으로 수라장이 되어버린 제자들 역시 예수님의 예언대로 베드로는 세 번이나 부인을 하는 구렁텅이에 빠져 허우적거렸고 다들 자기 살겠다고 뿔뿔이 흩어졌다. 만약 제자들 공동체에서 허우적거리는 가룟 유다를 보듬어줄 만한 좋은 맨토라도 있었더라면 사정이 달라졌을 수도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넋두리를 해본다.

최근 교회 안에 벌어지고 있는 자살 뉴스를 들으며 오늘의 교회가 마치 화석화 되어버린 유대교처럼 교회나 노회 안에서, 총회 안에서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살리려는 노력보다는 어떤 인간적인 이권을 위해 생사람을 잡는 인권의 사각지대는 없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타문화권에서 일하는 선교사들에게는 남모를 고독의 병이 많다. 특히 사모님들이 우울증으로 시달리는 것을 많이 본다. 선교비 보내는 데 믿음 없이 무슨 고급 병이냐고 핀잔하기 전에 “참 수고한다”는 따스한 위로 한마디가 저들을 감동하게 한다.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고 설교하는 목사님들, 사모님들도 예외는 아니다. 성도들이 알아줄 이 없고 누구에게도 말 못할 스트레스도 이만저만이 아닌 것 같다. 최저 생계비는 말할 것도 없고 끼니를 걱정하는 개척교회 목사님들의 눈물겨운 삶이 우리 주변에는 없는 지 돌아봐야 한다. 지상교회는 너나 할 것 없이 영육의 크고 적은 상처로 신음하는 병원과 같다. 모두가 서로서로 격려와 위로가 필요하다.

한 인생의 죽음이 자살이든 타살이든 자연사이든 어떤 형태의 죽음이든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가 있음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믿음으로 잘사는 것도 복이지만 믿음으로 잘 죽는 것도 엄청난 축복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다 헤아릴 수 없듯이 가룟 유다의 자살 미스터리는 아직도 많은 미스터리이다.

자살이라는 바이러스는 전염성이 강하여 자살 모방 신드롬 현상을 일으킨다고 한다. 구원 받은 성도라고 자만하거나 방심은 금물이다. 이런 자살 유혹의 마수가 어느 순간에 찾아올지 모른다는 경각심을 갖고 말씀 안에 깨어 있어야한다. 가룟 유다를 정죄하는 것은 자유지만 그가 어떤 면에서 인간적으로 양심적인 부분이 있다고 해서 그의 자살을 미화하거나 동정해서는 결코 안 된다. 예수님의 애절한 여러 번의 경고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제 곳으로 가버린(행1:25) 사람에게 구원을 얻었다고 억지를 부린 다해도 다 소용없는 일이다. 사탄이 얼마나 잔인하게 역사하는지 밝히 드러내어 가룟 유다와 같은 그런 탐욕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고 분별하는 것이 더욱 긴요한 일이다.

어쨌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인된 성도가 가룟유다의 자살, 살인죄 행태에 대해 옳지 않음을 비판할 수 있지만 돌을 던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고 가룟유다의 자살을 정죄하지 않고 양심적인 행동이라고 정당화해주고 동정하거나 옹호, 미화해서는 결코 안 된다. 민주화 운동이나 민족주의 사회개혁이나 정의를 대의명분으로 자살을 방조하고 미화하여 열사로, 의사로, 영웅으로 치켜세우고 생명을 경시하는 사회적 신학적 태도는, 심각한 가룟유다 증후군에 걸린 비성경적, 반기독사상이다. 교회지도자라는 이름표를 달고 순수한 말씀지기의 사명을 망각한 채 세상적인 정의와 분노로 치장하고 가장 인간적인 것처럼, 가장 진실하고 정의로운 것처럼 보이는 그런 자들에게 예외 없이 가룟유다 바이러스가 잘 기생하는 것 같다.

정양호 선교사는 고신에서 공부하고 안수받았으며, 현재 KPM(고신총회세계선교회)와 NGO Good Partners(김인중 목사, 이사장)의 파송을 받아 우간다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 천주교와 오순절 운동 신학 류에 오염되지 않은 순결한 성경적 복음을 우간다의 원주민들에게 전하고자 애쓴다. 우간다의 낙후된 여러 지역들을 순회하면서 복음과 함께 의료 봉사로 영혼들을 섬기고 있고, 늘 기독교의 세계적 동향을 살피고 연구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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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리훈 2020-07-15 23:36:31
아멘 할렐루야 !!! 좋은 글 감사합니다. Jonathan Edwards의 ‘놀라운 부흥과 회심 이야기’ 글에서도 우울증에 걸린 성도들을 영적으로 치유하기가 제일 힘들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단지 성경에 나타난 어느 인물들의 결과를 통해서만 우리는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선택과 유기)을 알 수 있는것입니다. 가롯유다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 시점에서 우리가 A에 대한 구원의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모독하는 파렴치한 행위 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는 거짓선생 입니다. 이것이 구원파 입니다. 어느 사람은 구원 받았다고 하나 개인 종말시 예수님을 부인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성경에 나온 하나님의 백성 중 자살한 사람은 한명도 없었습니다. 단테의 신곡 중 자살한 사람의 영혼은 무저갱의 가장 밑바닥에 처해 진다고 하였습니다. 자살은 살인행위요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물론 그 배후에는 사단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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