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개 월 전부터 어떤 미국의 인터넷 도서관(Academia)에서 자주 신학 논문들을 소개하는 메일을 나에게 보냈다. 언젠가 방문하여 그곳의 회원가입을 한 것 같은데, 그 이후 메일을 보내기 시작한 것 같다. 항상 영어 논문들을 소개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한국의 우병훈 교수의 논문 "스코틀랜드 최초의 언약신학자, 로버트 롤록의 생애와 신학"을 소개하는 메일이 왔었다. 우 교수의 그 논문의 주제가 하필이면 그때 관심을 가지게 된 스코틀랜드 최초의 언약신학자 로버트 롤록의 언약 신학에 대한 내용이었다.

우병훈 교수의 논문을 다운 받았다. 돈을 지불하는 페이지로 넘어갔는데 얼마를 청구하는지 말하지 안했다. 아무리 비싸도 10불 미만이려니 생각하고 크릭했다. 우병훈 교수의 롤록의 언약신학에 대한 한글 논문 하나와 영어 논문 몇 개를 다운받게 해 주었다. 얼마를 가져갔는지 통장을 확인하고 크게 놀랬다.

“이 어려운 시절에 ... 세상에!”

보통 책 세권을 살 수 있는 금액이었고 앞으로 6개월 동안 자신들이 제공하는 자료를 이용할 수 있는 금액이라는 것 같았다. 보낸 메일에 연락처가 있기는 하나, 메일을 보내도 답장을 하지 않는다고 표기되어 있었습니다. 우병훈 교수의 논문을 통해 그 이상의 소중한 것을 배우면 된다고 생각하고 진정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롤록에 대해 매우 실망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얼마 되지도 않아서 종교개혁을 망치는 신학이 들어섰음을 알게 되었다.
 

롤록의 행위언약 개념

롤록은 언약을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으로 나누었다. 우병훈 교수가 주로 다룬 롤록의 책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몇몇 질문들과 대답들>은 1596년에 나왔고, 그때는 잉글랜드 회중교회파 청교도 조상 윌리암 퍼킨스가 행위언약 사상을 이미 본격적으로 도입하였을 때이다. 퍼킨스의 대표작 <황금사슬>이 1591년에 나왔고, 퍼킨스의 제자들과 후배들이 그의 언약신학을 배우고 부지런히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1590년대는 잉글랜드 회중교회파 청교도 선구자들이 비성경적인 행위언약 신학을 자신들의 기독교 신앙의 중심축으로 세우는 작업을 활발하게 했던 때이다. 합신의 교회사 교수 안상혁의 책에도 그 사실이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16세기 말부터 언약 신학은 본격적으로 영국 청교도들 사시에 가장 주목받는 주제가 되었다. 예를 들어, 윌리엄 퍼킨스를 비롯하여 윌리엄 에임스, 존 볼, 그리고 존 프레스톤 등과 같은 청교도 운동의 지도자들은 모두 언약 신학에 관한 중요한 저서들을 출판했다.”(안상혁, <언약신학, 쟁점으로 읽는다>, 108)

스코틀랜드 최초의 언약신학자라고 평가받는 롤록이 1596년에 쓴 자신의 책에서 잉글랜드 회중교회파 청교도들이 발전시키는 동일한 행위언약 신학을 기술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수십 년 전부터 ‘자연언약’ 등의 명칭으로 회중교회파 청교도들의 행위언약의 바탕이 되는 이론이 이미 존재하였으니 롤록이 자연스럽게 그런 사상들을 접하였을 것이고, 또한 잉글랜드 회중교회파 청교도들의 책들이 스코틀랜드에도 전파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우병훈 교수의 설명에 의하면, 롤록은 타락전의 아담과의 하나님의 첫 언약을 행위언약이라고 했다. 롤록은 다음과 같이 행위언약을 설명했다. 

 “하나님께서 특정 조건하에서 인간에게 선한 것을 약속하시는 것으로서 인간은 그 조건을 수락한다”(롤록)

 “선행을 조건으로 하여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영생을 주기로 한 언약이다”(롤록)

롤록은 국왕 제임스 6세의 요구를 따라 결국 감독제도를 수용한 인물이니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를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스크틀랜드 장로교회의 총회장까지 했던 사람이다. 그런 인물이 아담의 선행을 조건으로 하나님이 그에게 영생을 주기로 언약을 맺었다고 창세기를 이해했다는 것은 황당하고 또한 서글프다. 왜 그렇게 성경을 보는 눈이 없었을까?

1)하나님이 자기의 형상대로 만드시어 피조 세계를 다스리게 한 자기의 백성에게 영생을 주시지 않았을까?

2)하나님이 흙으로 몸을 만드시고 친히 입으로 생기를 부어 살게 하신 자기 백성에게 영생이 없었을까?

3)생명나무는 하나님을 섬기면 죽지 않고 영원히 생명을 누린다는 하나님의 언약의 담보물이었는데, 아담이 영생 없이 창조되었다면 왜 생명나무를 에덴동산에 세우셨을까?

4)아담에게 영생이 없었고 어차피 죽을 운명이었다면 왜 선악과를 담보로 삼아 하나님을 배반하면 정녕 죽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을까?

5)영생이 없는 아담이 영생을 얻기에 실패했으면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는 것이 순리인데, 왜 회개해도 소용없는 저주와 영원한 죽음을 내리셨을까?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이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인데 벌써 성경을 허물고 종교개혁 무효로 만드는 거짓 신학이 장로교 속에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다. <기독교강요>를 보면, 언약에 대해 칼빈은 언제나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을 강조하였다. 칼빈은 성경의 모든 언약들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하나의 언약이라고 보았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구약시대의 언약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모든 족장들과 맺어진 언약과 우리와의 언약은 그 실질과 실상이 매우 동일하기 때문에, 사실상 이 둘이 하나다. 다만 처리 방법이 다르다 ... 그들을 주에게 묶어 놓은 언약은 그들 자신의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들을 부르신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 유지되었다.”(기독교강요, 2.10.2.)

구약의 족장들과 맺으신 언약이나 십자가를 증거삼아 우리와 맺은 새언약이나 본질적으로 하나의 언약이고, 모두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한다고 칼빈은 가르쳤다. 타락 전 아담의 상태에 대해서도 행위언약을 주장했던 롤록이나 그 시대의 다른 신학자들의 이해와 완전히 달랐다. 칼빈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은혜와 영생 안에서 자기의 백성으로 창조했고, 아담이 교만한 맘을 먹고 하나님을 배반했으므로 영생과 모든 은혜를 잃고 죽음에 처해졌다고 가르쳤다.

“성례는 우리의 믿음을 더욱더 강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주께서는 어떤 때에는 성례로 약속하신 일을 우리가 믿지 못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성례 자체를 우리에게서 빼앗으신다. 아담에게서 영생의 은사를 빼앗고 주지 않으셨을 때에 주께서는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고 하셨다(창 3:22). 이것은 무슨 뜻인가? 아담이 잃어버린 불멸성을 그 과실이 회복할 수 있었을까?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여호와의 이 말씀을 다른 말로 옮긴다면, ‘나의 약속의 상징에 집착해서 헛된 확신을 즐기지 못하도록 불멸에 대한 소망을 그에게 줄 수 있는 것을 그에게서 빼앗으리라’는 말이 될 것이다.”(기독교강요, 4.14.12)
 

롤록의 능동적 순종 개념

우병훈 교수의 설명에 의하면, 롤록은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능동적인 선행으로 우리의 구원의 근거를 만드셨다고 했다. 또한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위한 공로를 만드셨다고 했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선행으로 우리의 구원의 근거를 만드셨다는 가르침이 가능한 내용을 성경에서 한 줄도 발견할 수 없다. 칼빈과 종교개혁자들이 일체 가르치지 않았던 이런 주장은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을까?

잉글랜드의 장로교회파 청교도들이 주장했던 장로제도를 국교회 속으로 도입하려는 개혁은 불가능한 것으로 결론났고, 1580년대 말부터 부득이 제도의 개혁을 포기하고 개인의 경건과 헌신을 장려하는 방향으로 청교도 개혁운동의 강조점이 바뀌기 시작했다. 이것을 위한 신학적 작업으로 등장한 것이 아담이 못한 선행(율법준수)을 그리스도가 대신하여 자신과 우리의 구원을 위한 자격(의)를 마련하셨다는 능동적 순종의 의 신학이었다. 그 출발점은 행위언약 사상이었다. 그래서 행위언약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도 함께 있다. 영생을 얻기 위해 아담이 성공했었어야 할 ‘선행’을 그리스도가 대행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선행으로 구원의 자격(의)를 얻었다는 신학은 사도들과 칼빈에게서 전혀 볼 수 없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제도개혁을 포기하고 개인의 경건과 헌신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바뀐 잉글랜드 회중교회파 청교도 운동을 위해 그리스도의 올바른 행위를 강조하는 신학이 필요했다. 그리고 우리가 못할 선행을 그리스도가 대신하여 구원을 얻었으니 우리도 마땅히 그리스도를 본 받아 선행(헌신, 경건)에 힘써야 한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안상혁 교수의 책을 보면, 1594년에 죽은 회중교회파 청교도 목회의 선구자 리차드 그린햄(Richard Greenham, 1542-1594)도 그렇게 가르쳤다고 한다.

“만일 원수가 우리에게는 율법의 의가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성취하셨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다고 대답해야 합니다.”(안상혁, <언약신학, 쟁점으로 읽는다>, 106)

구원을 받기 위해서 반드시 율법을 지켜 얻는 의가 필요하다는 사상이 그린햄의 머리에 깊이 박혔음을 보여준다. 구원 받기 위해 필요한 것은 아브라함과 기생 라합처럼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 은혜를 따라 하나님을 믿게 하심이다. 율법이 있지도 않았던 시대의 사람들이 이미 그렇게 구원을 받았다. 모세를 통해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 이전에 이미 유월절 예식을 통해 훗날의 그리스도의 은혜를 소급하여 적용받았다. 사도 바울은 그들의 홍해도하를 신약 교회의 세례로, 광야의 만나와 생수를 신약 교회의 성찬에 비유하였다. 먼저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았다. 율법은 이미 은혜로 구원 받은 하나님 백성들의 하나님 섬김의 원리로 온 것이다.

회중교회파 청교도들은 이리 간단하고 중요한 성경의 진리를 몰랐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율법을 지킴으로 '율법의 의'를 얻어야 한다는 이단 사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담이 율법의 의를 얻지 못해 영원히 심판받고 죽었다고 보았다. 그 자신들도 율법의 의를 얻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등장시킨 것이 율법을 지키려고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가 대신 율법의 의를 얻어 자신들에게 전가하여 주었다고 했다.

대체 왜 그런 엉터리 이단 사상을 수립했을까? 엘리자베스 여왕의 비협조와 박해로 국교회를 장로교회로 바꾸는 제도개혁이 불가능해졌으므로 구원을 위한 개인의 경건과 헌신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자신들의 청교도 개혁운동을 수정했기 때문이다. 개인의 경건과 헌신은 곧 구원을 위한 선행이다. 아담부터 선행이 부족하여 영구한 저주를 받은 것으로 각색했다. 하나님께서도 아담을 대신하여 선행으로 율법의 의를 얻으시려고 성육신하신 것으로 기독교를 조작하였다. 결국 청교도들의 기독교는 '율법의 의'를 최고로 여기는 종교로 변했다. 성육신도 '율법의 의'를 만들어 우리에게 선물하려고 일어난 것으로 가르치는 거짓 종교를 만들어 신봉했다. 금송아지를 만들고서 "이것이 하나님이다"라고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과 비슷하다.

그들은 왜 그렇게 변질되었을까? 잉글랜드에서 태어나는 모든 사람을 교인으로 간주하는 국교회와 다른 종교를 만들기 원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기의 신앙과 종교와 구원을 위해 국교회처럼 피동적인 자세가 아닌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자세를 가진 교인들을 만들어 내고 싶었다. 그런데 구원에 대해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을 강조하는 칼빈의 신학으로는 그것이 되기 어려웠다. 그래서 새로운 청교도 개혁운동 사상을 위해 율법의 의, 즉 선행을 중시하는 하나님 종교를 만들어 낸 것이다. 1594년에 죽은 회중교회파 청교도 목회의 선구자 그린햄에게서도 이미 그 같은  주장이 나타났으니, 16세기 말에 회중교회파 청교도들을 통해 얼마나 많은 기독교 변질이 일어났는지 대략 가늠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행위언약과 율법 안으로 들어오셨고, 그 둘을 능동적으로 또한 수동적으로 성취하셨다.”(롤록)

“그리스도의 선행은 우리 구원을 이루기 위한 근거가 되며, 그의 수난과 죽음은 우리 구원을 위한 공로가 된다.”(롤록)

우병훈 교수의 설명에 의하면, 이와 같이 롤록은 그리스도가 아담이 실패한 율법적 선행에 성공했고 그것으로 우리의 구원을 위한 근거를 만드셨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런 내용은 사도들과 칼빈에서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주장이다.

“이것들(안식일 등의 율법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 2:17)

모세를 통해 주신 모든 율법들은 장차 오실 하나님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였다. 율법들은 죄가 없으시고 완전히 의로우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육신자 예수 그리스도의 특성과 필요성을 흐릿하게 계시하였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율법이 원칙적으로 지시하고 요구하는 모든 자격과 조건들을 완전하게 구비하신 완전한 사람으로 오셨다.

그리스도가 사람처럼 율법을 지키려고 오셨다거나, 죄인들의 방식으로 율법 조항들을 하나씩 완전하게 지켜서 '율법의 의'를 획득하였다는 주장은 그리스도에 대한 모욕이다. 또한 구원의 은혜에 대한 악담이다. 대체 율법의 요구와 정신이 완전하게 이루어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의 성육신자가 오래전에 자기를 예고한 그림자에게 어떤 방식으로 허리를 굽히고 순종한다는 것인가? 회중교회파 청교도들이 장로교회로의 제도개혁이 불가능하여 구원을 위한 개인의 헌신과 경건을 강조하는 새로운 개혁운동을 위한 신학적 전략으로 만들어 낸 행위언약과 그리스도의 능동순종은 이와 같이 성경과 기독교를 파괴한다.
 

아담의 마음에 기록된 율법

우병훈 교수의 설명에 의하면, 롤록은 다른 청교도들처럼 영생을 위해 아담이 지켰어야 할 율법이 아담의 마음에 기록되어 있었고, 그것이 훗날 시내산에서 돌판에 기록되었다고 했다.

“이 언약은 인간이 창조되었을 때 곧장 체결되었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율법을 새기시고, 그것을 지키게 하셨는데, 인간은 그 조건을 수락했다.”(롤록)

“행위언약의 조건의 주요한 요소들은 십계명의 개별 항목들이다. 그런 까닭에, 율법이 새겨진 돌판들이 ‘언약의 돌판들’이라고 불리는 것이다.”(롤록)

그런데 성경 어디에도 아담의 마음에 영생을 얻게 하는 율법이 기록되었다는 말씀이 없고, 또한 그것이 나중에 시내산에서 돌판에 기록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졌다는 말씀도 없다. 모두 인간의 상상의 산물이고 사변이다. 십계명이 아담의 마음에 먼저 기록된 것의 재판이었다면, 대체 아담이 공경하고 효도해야 할 부모는 에덴 동산의 어디에 있었는가? 아담의 주의해야 할 우상은 에덴 동산의 어디에 있었고 누가 만들었는가? 아담이 십계명 같은 것들을 몇년 동안 잘지켜서 선행을 쌓으면 영생을 얻을 수 있었는가?

‘그 마음에 새긴 율법’(롬 2:15)

청교도주의자들은 바울의 이 말이 아담에게 영생을 주기 위해 하나님이 그의 마음에 기록하신 율법의 증거라고 한다. 그러나 바울은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여전히 양심, 즉 하나님의 형상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뜻으로 이 말을 했다. 만일 청교도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지금도 불신자들과 인류에게 영생을 주는 율법이 정말 마음에 기록되어 있다면, 전 인류에게 구원을 위한 특별계시가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사람들이 마음의 본성과 양심을 따라 살면 구원의 길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다.
 

좌측에서 세번째가 우병훈 교수. 개혁주의학
사진 속의 다른 분들은 이 기사와 아무 관련이 없음을 말씀드립니다. 좌측에서 세 번째 분이 우병훈 교수이고, 지난 해 한국개혁신학 학술상을 받을 때의 모습입니다(2019년 11월)

 

맺는 말

롤록의 언약신학은 성경을 파괴하고 기독교를 무너뜨린다. 궁금한 것은 고신에서 신학생들을 가르치는 우병훈 교수가 롤록의 언약 신학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이다. 우병훈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마무리했다.

“이 글에서는 스코틀랜드 최초의 언약신학자라고 불리기에 전혀 손색이 없는 롤록의 생애와 신학에 대해서 다루었다.”(우병훈 교수)

 

-----------

우병훈 교수의 이 논문이 다음의 책(p.103-130)에 수록되어 있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바른믿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