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모 목사의 성경 오역(誤譯), 오석(誤釋) 바로잡기(11)

글을 시작하며

막5:1-20에 기록된 예수님의 축귀 사건은 4복음서 기록된 예수님의 축귀 사건들 중 가장 길게 기록된 사건이다. 물론 길게 기록되었다고 해서 꼭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길게 기록된 막5:1-20의 예수님의 축귀 사건은 당시의 예수님(하나님 나라)과 귀신들(사탄의 나라)과의 긴장관계를 더욱 실감나게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역과 당시의 관습을 놓친 번역의 실수로 인해, 독자들은 본문에 흐르고 있는 예수님과 귀신들 사이의 긴장관계와 처절한 전투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그러므로 막5:1-20의 성경공부와 설교도 본문의 원래 상황과는 상당히 동떨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성경교사와 설교자들은 텍스트 본문에 대한 원문 검토는 물론이고, 텍스트 본문의 배경이 되는 당시의 삶의 정황까지 신중하게 고려해야만 실수를 최대한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막5:1-20의 “거라사 군대 귀신” 사건은 번역자가 시작에부터 번역 실수를 범한다.
 

막5:1-20은 1절부터 번역 실수로 시작한다

번역자의 실수는 1절(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에서부터 시작된다. 1절에서 “건너편”으로 번역된 “eivj to. pe,ran”(에이스 토 페란)은 바로 이전의 막4:35(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에서 “저편으로”로 번역한 원문(eivj to. pe,ran/에이스 토 페란)과 동일하다. 마가가 막4:35의 “저편으로”(eivj to. pe,ran/에이스 토 페란)와 동일한 문구를 여기서도 사용한 까닭은, 큰 광풍이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방해하려고 했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저편으로(eivj to. pe,ran/에이스 토 페란) 가자”(막4:35)고 말씀하신대로 “저편으로”(eivj to. pe,ran/에이스 토 페란), 즉 예수님이 가시고자 한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하신 것을 독자들에게 분명히 보여줌으로써. “예수님은 광풍도 그의 길을 막을 수 없는 하나님이시다”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번역 성경은 저자의 의도대로 막4:35의 “저편으로”와 막5:1의 “건너편”을 아래와 같이 같은 표현으로 통일해야 한다.

막4:35/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에 건너가자 하시니

막5:1/ 예수께서 바다 저편에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불행하게도 한글 성경들, 한글개역(저편으로-건너편), 개역개정(저편으로-건너편), 공동번역(저편으로-건너편), 현대인의성경(저편으로-건너편), 새번역(저쪽으로-건너편), NIV(to the other side-across)로 서로 다르게 번역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번역 성경들 중에 KJV(unto the other side-unto the other side)와 NASB(to the other side-to the other side)는 같은 표현으로 제대로 번역했다.
 

막5:1-20은 처음부터 귀신들이 예수님을 공격하는 내용으로 일관된다

“거라사 군대 귀신 사건”에서 번역자의 결정적인 실수는 2절(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의 “만나니라”이다. 여기서 ‘현재시제’로 번역한 “만나니라”의 원문 “u`ph,nthsen”(휘펜텐센)은 ‘단순과거’이다. 거기에다 “u`ph,nthsen”(휘펜텐센)의 원형 “u`panta,w”(휘판타오)는 보통 전쟁을 묘사하는 문맥에서 사용되며, 그 의미는 “싸우다, 대항하다”이다(눅14:31/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u`panth/sai/휘판테사이/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다시 말하면, “만나니라”로 번역한 “u`ph,nthsen”(휘펜텐센)은 “만나다”의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번역자들이 “만나니라”로 번역한 것은 아마도 그 뒤에 나오는 사건과 연결시켜 시간적인 흐름을 자연스럽게 하려고 원문의 ‘과거’를 ‘현재’로 번역했을 것이며, 또 번역자가 뒤의 사건에서 귀신이 격렬하게 예수님을 대항하여 싸우고 있는 상황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원문의 “대항했다“, 또는 ”싸웠다“를 “만나니라”로 잘못 의역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만나니라“는 원문에는 없는 의미로서 결정적인 오역이다. 따라서 ”만나니라“로 번역한 “u`ph,nthsen”(휘펜텐센)은 반드시 원문대로 “대항했다” 또는 “싸웠다”로 번역해야 한다. 왜냐하면 원문의 “u`ph,nthsen”(휘펜텐센)은 마가가 독자들에게 귀신들린 자가 무덤 사이에서 나와서 예수를 “대항해서 싸웠음”을 알리고 있음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거의 모든 번역 성경에서 “u`ph,nthsen”(휘펜텐센)을 “만나다”(meet), 또는 “만났다”(met)로 오역하고 말았다.

마가는 2절을, 그 뒤의 전체 사건의 제목으로 제시하고 있음을 번역자들은 눈치 채야 한다. 예를 들면 신문 기사의 내용을 한 눈에 알 수 있도록 기사 전면에 내세운 큰 제목처럼, 마가는 7절 이하에서 귀신들이 예수님을 대항하는 긴박한 전투 상황을 기록하기 전에 전체 사건에 대한 제목의 성격으로 2절을 기록한 것이다. 이는 앞으로 일어나는 사건의 성격을 독자들에게 미리 알려줌으로써, 예수님과 귀신들의 대결을 더욱 극적으로 나타내려는 까닭일 것이다. 이 싸움은 7절 이하에서 적나라하게 시작된다. 그러나 번역 성경들은 안타깝게도 이 싸움의 분위기를 제대로 나타내지 못했다.

마가는 막5:1-20 전체의 내용이 귀신이 예수님께 격렬하게 대항하고 있는 것임을 2절에서 제목 성격으로 독자들에게 미리 알리고, 3-5절에서 귀신들린 자의 심각한 상태를 언급함으로써 인간의 능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귀신이 지닌 강력한 힘을 묘사하고 있다. 이 귀신은 예수님이 배에서 내리신 것을 보고 달려와 예수께 절한다(6절/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여기서 “절하며”로 번역된 “proseku,nhsen”(프로세퀴네센)의 원형 “proskune,w”(프로스퀴네오)의 의미는 “경배하다, 예배하다”이다. 그러나 귀신은 하나님께 대해 무서워서 떨기는 하지만(약2:19/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하나님(예수님)을 진심으로 예배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본문에서 귀신이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두려워서 절하고 있지만, 이 행위는 귀신들이 예수께 굴복한 것이 아니라 굴복한 것처럼 위장해서 예수님을 방심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이 모든 것들을 다 아시고,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귀신에게 명령하신다(8절/이는 예수께서 이미 그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여기서 사건이 일어난 시간적인 순서를 정리하면, 예수님이 배에서 내리시자(2절), 멀리서 귀신이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귀신에게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하시자, 그때부터 귀신은 자신의 본색을 드러내며 격렬하게 예수님께 대항하여 싸움을 걸기 시작한다. 7절과 9절 이하가 그 내용이다. 따라서 7절에서 “큰 소리로 부르짖어”는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며”로 번역해야 한다. 왜냐하면 “부르짖어”는 귀신이 예수님 앞에 저자세로 있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 까닭은 여기서부터 귀신은 예수님을 위협하며 예수님을 제압하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귀신이 큰 소리로 예수께 고함을 지른 것은 먼저 큰 소리로 예수의 기선을 제압하려고 한 것이다. 이는 바로 다음에서 귀신이 예수의 정체를 밝히는 데서 더욱 분명해 진다. 그래서 “큰 소리로 부르짖어”를 필자가 번역한다면 “큰 소리의 고함으로 윽박지르며”로 의역할 것이다.
 

귀신은 큰 소리로 예수님을 위협하면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7절)하면서 예수님의 정체를 밝힌다.

고대 사회에서 상대방이 자신의 이름을 묻든지 묻지 않든지 간에, 자신의 이름을 먼저 상대방에게 밝히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항복’(굴복)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자신이 상대방보다 낮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행위이다. 그래서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먼저 자신의 이름을 고하거나, 아니면 높은 자가 먼저 낮은 자의 이름을 부르거나, 이름을 모른다면 낮은 자의 이름을 묻는 것이 일반적이다. 막5:9(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가로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에서 예수님이 귀신들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물으신 것도 예수님이 귀신들의 이름을 몰라서가 아니라, 귀신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말하게 함으로써, 귀신의 낮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예수님께 항복하라는 압박이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귀신이 먼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님의 정체까지 밝힌다. 이것은 예수님께 쓸데없는 짓을 한 것이지만, 귀신이 예수님보다 자신이 우위에 있다는 것을 애써 나타내려는 의도에서 나온 말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귀신은 ‘내가 너의 정체를 알고 있으니 나를 우습게보지 말라. 내가 너보다 한 수 위야!’라고 하는 경고성 메시지이다. 그러므로 귀신이 예수께 말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는 예수님에 대한 존경의 표시가 아니라 위협의 표시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예수여”를 “예수야”로 번역해야 이 험악한 분위를 독자들에게 제대로 전달할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귀신이 외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예수님의 정체를 드러냄으로써 자신이 만만치 않은 존재임을 과시해서 예수님을 위협하려는 목적에서이다. 따라서 뒤 이어 나오는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도 존댓말이 아니라 반말 형태로 “나와 네가 무슨 상관이 있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낫다.1)

이렇게 귀신이 예수님에게 ‘나와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한 말은 결국 자신에 대한 예수님의 통치권을 부인하는 것으로서,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귀신의 이 말, 즉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정체를 드러냄으로써 자신이 만만치 않은 존재임을 과시하며 예수님을 위협하려는 목적에서이다.
 

또 하나의 결정적인 오역, 이것은 지독한 악역이다

“나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에 이어지는 “원컨대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7절)는 오역 정도를 한참 넘어서는 지독한 악역이다. 왜냐하면 이 본문의 헬라어 원문 “o`rki,zw se to.n qeo,n( mh, me basani,sh|j”(호르키조 세 톤 데온 메 메 바사니세스)를 직역하면 “내가 하나님(의 이름)에 의하여 네게 명령한다. 나를 괴롭게 말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원컨대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는 원문과 터무니없이 다른 지독한 악역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헬라어 원문에서 ‘맹세하고’를 의미하는 단어는 없다. 그리고 “원컨대”로 번역한 “o`rki,zw”(호르키조)는 “명령하다”의 의미로, 축귀하는 자가 쓰는 전문 용어이다(행19:13/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적으로 악귀 들린 자들에게 대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o`rki,zw/호르키조/ 하더라). 그럼에도 본문에서 귀신이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예수님께 오히려 축귀 용어로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주객이 전도된 양상으로서, 지금 귀신은 예수께서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8절)고 명령하신 것에 대해 얼마나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는 지를 실감나게 볼 수 있는 장면이다. 따라서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의 존댓말도 “나를 괴롭게 말라”로 바꾸어 번역하면 더욱 현장감이 살아날 것이다.

고대 사회에서 축귀자가 귀신의 정체를 아는 것은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 꼭 거쳐야 하는 절차였다(마술 본문들에 따르면, 신이나 악령들의 이름을 알게 되면 그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하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귀신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물으신 것은 예수님이 귀신들의 정체를 몰라서가 아니라(예수님은 이미 귀신의 정체를 알고 계신다), 귀신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말하게 함으로써 나에게 항복하라는 압박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질문은 7절에서 귀신들이 먼저 예수의 정체를 밝힘으로써, 귀신들이 예수님보다 우위에 있음을 시위하는 것에 대해, 예수님이 그들 위에 있는 주권자임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귀신은 “내 이름은 군대니 많음이니이다”(9절)라고 대답한다. 이 장면은 귀신들이 예수께 자신의 이름을 고하므로 항복하는 장면이 아니다. 지금 귀신들은 당시 데가볼리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천하무적의 로마 군대의 단위인 “레기온”2)이라고 함으로써, 끝까지 자신들이 로마제국의 막강한 군대처럼 강하다는 것을 시위하면서 예수님을 위협하고 있다(“레기온”은 고유명사로서의 귀신의 이름이 로마 군대의 병력 단위를 나타내는 보통 명사이다). 그래서 귀신들은 “많음이니이다”(9절)라는 말로 다시 한 번 예수님께 자신들의 숫자가 많음을 강조한다.

이는 귀신들이 예수께 굴복하지 않았음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며, 오히려 자신의 숫자가 대단히 많음을 과시함으로써 예수님을 힘으로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로마 군단 ‘레기온’은 천하무적의 군대로서 당시 데가볼리에도 주둔해 있었다고 한다. 귀신들은 예수님에게 자신들을 ‘레기온’이라고 말한 까닭은 자신들이 로마 군단 ‘레기온’처럼 천하무적이므로 자신들을 함부로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를 예수님에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7절의 귀신의 말을 존댓말로 번역하면 안 되듯이, 여기서도 귀신의 말을 존댓말로 번역하는 것은 지금의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한 오역이다. 왜냐하면 지금 귀신은 예수님께 거칠게 저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많음이니이다”는 “많도다” 정도로 번역하면 좋을 것이다(더 많은 오역들이 즐비하지만, 지면 관계상 나머지는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이쯤에서 접어야겠다).
 

글을 마치며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복음서의 시대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모든 면에서 넘을 수 없는 엄청난 갭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복음서도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기에는 너무 엄청난 갭이 존재한다. 먼저는 2000년 이상의 시간적인 갭이며, 또 하나는 1세기에 사용되었던 코이네 헬라어로 복음서가 기록되었다는 것과 그것마저도 당시 유대인의 문화적인 배경과 삶의 관습(정황)이 그 배경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의 바른 번역은 복음서를 기록한 당시의 코이네 헬라어에 대한 바른 이해와 가능한 한(이 부분은 우리가 정말 잘 모르고 있는 부분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의 정황 자료들이 너무 제한적이어서 2000년 이상 이전의 고대 근동 사람들의 삶의 정황을 제대로 알기란 너무 어렵다. 그래서 케네스 E. 베일리 같은 학자가 많이 나와서 이 부분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풍성했으면 하는 바램이 필자에게 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 사회의 유대 사회의 삶의 정황을 잘 살펴서 코미디 같은 번역을 최대한 피하므로, 애써서 번역한 노력물이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아무튼 예수님께 끝까지 저항한 거라사 지방의 악랄한 귀신들은, 번역자의 오역으로 말미암아 약간은 착한 귀신들이 되고 말았다.

 

--- 각 주 ---

1) “나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로 번역된 “ti, evmoi. kai. soi,,”(티 에모이 카이 소이)를 직역하면 “나와 당신이 (사이에) 무엇(이 있는가)?”이다. 이것은 히브리어의 관용어로, “왜 당신은 나를 방해하고 있는가?” 또는 “당신은 내 일에 상관하지 말라!”가 될 것이다.

2) “군대”로 번역된 “legiw.n”(레기온)은 라틴어에서 유래된 군사 용어로서 로마 군대의 ‘군단’을 의미한다. “legiw.n”(레기온)의 규모는 최대한 6천 명 정도의 규모였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3, 4천 명 정도가 보통이었으며, 13절에서 익사했다고 묘사되는 돼지들의 숫자인 2천 명 정도의 “legiw.n”(레기온)도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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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