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기 상 4장에 나오는 ‘야베스의 기도’는 ‘축복의 기도’라고 불려지고 있습니다. 브루스 윌킨스가 2001년도에 쓴 ‘야베스의 기도’가 bestseller가 되어 한국에 sensations을 불러 일으켜 주기도문 다음으로 많이 알려지게 되었고 복음성가에도 여러 version 으로 나올 만큼 많은 기독인들에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그 기도가 너무 기복적으로 쓰여 번영의 신학을 강조하는 분들에게 악용되었다는 점입니다. 마치 사람들이 지금까지 복을 받지 못한 이유가 ‘야베스의 기도’를 하지 않아서 인 것처럼 인식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의 내용을 깊이 묵상하며 살펴보면 그 기도는 이 세상의 축복보다는 가장 중요한 복이 무엇이며 우리 믿음의 결국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기도입니다. 역대기 4장을 읽어보면 유다지파의 족보가 나오다가 4:9에 뜬금없이 ‘야베스’라고 하는 인물이 나옵니다. 그 아비가 없는지 그의 이름은 아예 거론도 되지 않았고 그 어미가 나오지만 그녀 역시 이름은 기록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야베스와 그의 조상은 그다지 중요한 가문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야베스’란 뜻은 ‘수고’, ‘슬픔’, ‘고통’이라는 말입니다. 그 어미가 이름하여 ‘야베스’라 한 것을 보아 아비는 없으며 매우 힘들고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대상 4:9에, ‘수고로이 낳았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의 의미는 창 3:16에서, “아담이 범죄한 이후 하와에게 내렸던 임신하는 고통을 더하여 수고하여 자식을 낳는다”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야베스의 어미가 야베스를 낳을 때 출산의 고통이 유난히 심했다고 해석하기 보다는 그 어미가 야베스를 낳았을 때 야베스의 가정 환경이 고난과 슬픔 가운데 처해졌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가 성장해서도 그의 형편이 어려웠음을 우리는 그의 기도의 내용, (“지경을 넓혀 달라”,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해 달라”)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유독 야베스의 기도를 들으시고 허락해 주셨을까요? 이 세상에는 야베스와 같은 형편에 있는 사람들이 매우 많은데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다 들어주십니까? 어느 분의 기도는 들어주시고 다른 분의 기도는 허락해 주지는 않거든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불공평한 분이 아니십니까?

천지의 주재이신(행 17:24)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대상 4:9에, “야베스는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존귀한 자는 이 세상의 권력과 명예와 돈으로 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존귀한 자라 칭함을 받는 자가 몇이나 있겠습니까? 성경에서 존귀한 자라 칭함을 받는 대표적인 인물은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성육신으로부터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까지 사랑과 희생과 섬김과 고난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또한 사도바울도 예수님의 흔적을 마음속에 새기며 이방인의 사도로 죽는 그 순간까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웠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핍박과 고통을 당하였고(딤후 3:12), 고난 받는 종(고후 4:5)으로서의 사명을 다한 것입니다. 존귀한 자란, 예수님의 성품을 닮은 자, 자기의 유익보다는 남의 유익을 위해 사는 자, 즉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경건한 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이하는 이것이니라 “(약 1:27)

롬 2:10에서 존귀한 자는 선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오직 선을 행하고 나눠주는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신다”(히 13:6)고 하였습니다.

선을 행하는 존귀한 사람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고 남을 위해 즐거이 주는 사람입니다.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찌니라.”(행 20:35).

또한 존귀한 자는 아무리 불같은 시련이 있다 할찌라도 그 시련을 통해 금같이 단련된 믿음을 소유한 자 입니다(벧전 1:7). 그러면 야베스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사도 바울처럼, 야베스는 고통과 슬픔이 있는 현실 속에서도 그것에 굴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유익보다는 남의 유익을 위해 사는 사람이었고, 선을 행하고 나눠주는 사람이었으며, 고난가운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지켰던 존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야베스의 기도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야베스는 간구하는 대상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막연한 신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십니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아브라함을 불러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셔서 출애굽 하게 하시고 또한 유다지파 중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십니다.

둘째로 야베스가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으며(아뢰어 가로되) 기도했습니다. 이는 마치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예레미야(렘 33:),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던 엘리야(야고보서 5:16-17),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께서 큰소리로 불러 외치셨던 말씀(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가상칠언 중 마지막 말씀:눅 23:46), 십자가에 달린 우편 강도(“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가상의 두번째 말씀), 돌로 맞아 죽어가면서도,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행 7:59) 크게 불러 외친 스데반집사의 기도처럼 야베스는 간절히 부르짖으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셋째로 야베스는 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믿었습니다. 그만큼 그는 복에 복을 더해 달라는 이중적 복을 구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복을 달라고 하는 기도는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열심히 구해 하늘의 영적인 것과 땅의 기름진 것으로 채워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복을 구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이 복을 어떻게 누리면서 청지기적 삶을 살아야할 것인가가 문제인 것입니다. 이 복을 우리의 이익과 정욕만을 위해서 산다면 이것은 복이 아니라 화가되어 결국은 멸망하는 불행을 맞게 될 것입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9-10).

넷째로 야베스는 자기의 지경을 넓혀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여기서 ‘나의 지경’은 땅과, 자기의 소유와, 자기의 영향력 등을 의미 합니다. 고대로 부터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땅은 부와 생명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앞에서 말한 존귀한 야베스가 이 세상의 소유만을 구했을까요? 자기의 형편이 너무 비참하다 보니 세상의 물질만을 구하여 세상의 복만을 추구하였다고 보십니까? 구약의 복이 물질적인 것에 치중하였다면 신약의 복은 영적인 것에 있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도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5-17).

도대체 야베스는 얼마만큼의 지경을 넓혀 달라고 구한 것입니까?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려고요? 인간은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물질을 더 많이 소유하면 소유할수록 더 갖고 싶고 결국은 물질(돈)이 우상이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한때 영향력이 있었던 주님의 종들이 돈과 명예와 권력에 물들다 보니 하나님과 멀어지고 타락하는 것 아닙니까? 이러한 현상들이 현대교회에 비일비재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경건했던 야베스가 말하는 ‘나의 지경’은 무엇을 말할까요? 그것은 하늘나라, 즉 영생을 말합니다. 야베스에게 하늘나라는 복중의 복이었습니다. 하늘나라, 즉 영생(구원)은 하나님의 신적 성품과 하나님의 무궁무진한 신적 자원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수학공식에, 무한대에 아무것을 더해도 혹은 아무것을 빼도 그 결과는 무한대가 될 뿐입니다.

Infinity + A = Infinity

Infinity - A = Infinity

Infinity를 영생이라고 하고, A를 이 세상의 물질적 가치라고 가정했을 때 그 가치의 여부와 상관없이, 그 가치의 크기와 상관없이 그 결과는 영생 일 뿐입니다. 즉 이 세상의 가치는 영생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존귀한 야베스가 이 세상의 썩어 없어질 가치를 추구했을까요? 야베스는 무한한 가치 즉 영생, 하늘나라를 추구한 것입니다.

A를 공력이라고 가정할 때, 우리의 공력(행위)도 천국 가는데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많은 한국교회는 이 세상에서 열심히 공력을 쌓아 천국에서 상급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 세상에서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부끄러운 구원을 받아 천국에서 상급이 없다고 합니다. 천국이 과연 그런 곳입니까? 이 세상의 원리가 천국에도 적용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세상은 그 사람의 능력(돈과 명예와 권력)에 따라 계급이 설정이 됩니다. 상급이 있다는 것은 천국에도 계급이 있다는 것이 아닙니까?

도대체 ‘부끄러운 구원’ 이라는 말이 성립이 됩니까? ‘부끄러운 구원’이란 구원은 받되 천국에서 상급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아무리 자기의 공력이 많다고 할지라도 영생이외의 상급은 없습니다. 영생은 무한한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상급사상을 논하는 것은 구원의 의미를 모르고 하는 헛소리일 뿐입니다. 구원은 영생이요 하늘나라 입니다. 영생에 그 어떤 것이 가감될 찌라도 그것은 영생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구원은 상급에 상관없이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나의 지경을 넓혀 달라”는 야베스의 간구는 그의 지경이 무한히 넓은 하늘나라 이었습니다. 그는 영생, 즉 하나님의 무궁한 자원을 소유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다음의 간구가 이것을 확정 짓습니다.

다섯째, 그가 간구한 것은,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입니다. 성도가 하늘나라 갈 때에는 예수님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님은 중보자로서 당신의 백성을 변호 하신 후에 천국으로 들여 보내십니다.

죤 번연의 ‘천로역정’ 마지막 부분에서 기독도가 사망의 강을 건널 때 예수님의 도움으로 사망의 강을 건너 하늘나라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야베스는 그의 인생 마지막에 그러한 주님의 손길을 간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환난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해 달라’고 간구 했습니다. 이 간구의 의미는 환난을 벗어나는 정도가 아니라 환난을 완전히 없애서 끝내달라는 간청입니다. 인생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생로병사’를 겪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인간은 누구나 질병, 고통, 슬픔으로 부터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존귀한 야베스는 예수님처럼, 사도바울처럼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경건한 삶을 살면서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 3:12).

야베스가 마지막으로 구한 것은 고통과 슬픔이 없는 하늘나라(천국) 이었습니다.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들어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십자가에 달린 우편 강도가 그의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에게 천국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을 때 예수님께서 낙원을 허락해 주신 사건과 같은 것입니다.

아무리 이 세상에서 A가 성공하고 무병장수할 찌라도 그가 죽어 그의 영혼이 음부에 떨어진다면 그의 인생은 실패한 인생입니다. 시편 73장에서, 악인이 이 땅에서 형통하고 무병장수 하고 평안하고 재물이 더하는 것을 아삽은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불평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 악인의 결국이 파멸함을 보고 하나님과 함께 함이 복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야베스는 아무리 불행한 가정에서 태어났을 찌라도 하나님께서 그를 존귀히 선택하셔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경건하게 살다가 그의 인생의 막바지에 이르러 하나님께 천국을 간구하는 ‘종말론적 기도’를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야베스의 기도를 들으시고 지경이 무한히 넓고, 슬픔과 고통이 없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곳 천국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축복입니다. 우리 믿음의 결국은 ‘영혼구원’입니다.

“종말론적 기도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행 2:21)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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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리훈 장로는 Nevada주의 Las Vegas에 거주하며, 갈보리장로교회(협동장로)에 출석한다. 직업은 치과의사이고, 라스베가스의 '김리훈 보철치과'의 원장이다. 남가주대학(USC), 캘리포니아대학(UCLA, 치의학박사), 미시간대학(U of M, 보철전문의 석사)에서 의학을 공부하였다. 또한 미주 총신(M.Div)에서 개혁신학을 공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