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7-15 14:31 (수)
교파들 사이에 신앙고백적 차이가 없다는 위험한 생각 팽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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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파들 사이에 신앙고백적 차이가 없다는 위험한 생각 팽배
  • 최덕성
  • 승인 2020.06.13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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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신학적 정체성이 모호해지고 있는 증상은 여러 면에서 나타난다. 강단에서 외치는 설교에 응집력과 일관성 있는 교리가 없다. 확실성을 가진 진리체계를 제시하지 않는다. 축복, 은혜, 위로, 평안, 윤리, 은사 이야기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복음, 예수 진리를 담은 메시지나 세상의 문화와 세계관과 비전으로부터 구별되는 신앙의 명백한 서술은 찾아보기 어렵다. 교회가 교리교육을 등한히 하고 있다. 공적인 신앙고백문서들은 골동품처럼 취급당하고 있다.

한국교회 안에는 교파와 교파 사이에 신앙고백적인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팽배해져 가고 있다. 자유주의 신학의 해독과 위험성에 대한 경계심이 풀어지고 있다. 진리에 대한 민감성은 둔화되고 있다. 자유주의 신학과 정통신학이 상호보완적으로 병존할 수 있는 것으로 보는 인식이 팽배하고 있다. 신학적 한계를 넓히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에 대해 거의 무감각하다. 신세대는 세상 사람처럼 편하게 살고자 부모들이 건설한 신앙공동체를 등한히 하고 있다.

증후군(syndrome)처럼 일어나는 신학적 다원주의, 포용주의적 연합일치운동은 한국교회의 신학적 정체성이 모호한 데 대한 가장 극명한 증거이다. 자유주의 신학과 정통신학을 묶는 것을 “성령이 하나 되게 한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3)는 말씀의 적용으로 본다. 성경말씀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여 오늘날의 무분별한 에큐메니칼 활동에 적용시킨다. 종교개혁자 칼빈의 에큐니즘을 오용(誤用)하여 오늘날의 연합운동, 일치운동을 정당화 하려고 한다.

헌국기독교는 교회의 생명력을 앗아가는 자유주의, 현대주의, 세속주의에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화평을 진리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다. 평안하다, 평안하다 하는 말로 사람들을 안심시킨다. 교회가 거짓교사, 이단자, 세속주의에 경계심을 풀고 있는 동안에 기독교 자체를 위협하는 사조들은 성큼 교회 안에 자리를 잡고 있다.

미국교회는 신학적 정체성의 상실을 현대주의―근본주의 논쟁(1920년대와 1930년대)과 그 이후로 이미 경험한 바 있다. 미국장로교회의 갈등과 그 결과를 연구한 브래들리 롱필드는 명확한 교리적 한계가 없는 교회의 세속화에 대한 그레샴 메이첸 박사의 두려움과 판단이 옳았다고 결론짓는다. 다원주의, 포용주의라는 우상 앞에 무릅을 꿇은 에큐메니칼운동이 가져다 준 비극이 무엇인가를 밝혀준다. 프린스톤신학교의 좌경화 과정은 아울러 정통신앙에 대한 단호한 태도를 갖지 않은 신학교 교장 한 사람의 영향이 얼마나 파괴적인가를 밝혀준다.

교회가 뚜렷한 신학적 정체성을 가지지 않고서 세상에 대한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어렵다. 신학노선을 확고하게 하지 않으면 기독교의 근본도리들을 부정하는 사조가 부지중에 교회를 장악하게 되고 신앙고백공동체는 저항력을 상실하게 한다. 반기독교적인 세속주의가 교회를 독차지할 수 있다. 자유주의자들은 기독교의 문화적 탁월성과 동시대성을 강조하고 복음이 과학에 부합해야 한다고 하면서 주변 문화의 이상과 구별되는 명백한 신학적 경계선을 설정하지 않았다. 그 결과로 점차 세속 문화의 흐름에 종속되어 왔다. 자유주의 신학에 포용적인 태도를 취한 미국교회는 세상과 문화에 대한 교회의 사명이라는 미명하에 교리와 신학의 한계를 넓혔다.

이 과정에서 주객이 전도되었다. 기독교가 문화를 변혁시킨 것이 아니라 문화가 기독교를 바꾸어 놓은 것이다. 콘텍스트가 텍스트의 자리를 차지했다. 교회는 문화의 옷을 복음인 것처럼 붙잡게 되었다. 믿는 바가 확실하지 않은 별종 기독교가 성경적인 기독교를 몰아내고 교회와 신학교와 선교부를 차지한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 추종자들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를 구분한다. “성경말씀만 믿으면 되지 신조나 교리가 그처럼 중요한가,” “교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고 말한다. 교리무용론, 신조무용론을 펼친다. 사도신경을 고백하면 고백공동체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신학의 다양성을 서로 인정하자는 것이다. 교리가 교회의 분규를 조장하고 교회연합을 방해하고 신학의 발전을 제한하고 양심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본다. 종교, 종파를 초월하여 다양한 사상과 교리들을 모두 아름다운 신앙의 유산으로 받아들이고 하나가 되자고 한다.

이러한 주장은 상당히 그를 듯해 보인다. 유한한 인간이 어찌 자기 것만을 절대화 할 수 있는가. 인간의 사상 그 어떤 것도 절대적일 수 없지 않은가. 그러나 여기에는 독버섯 같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기독교 신앙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그 하나님의 말씀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개신교회의 신앙고백과 교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간략하게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들이다.

교리, 신앙고백, 신학이 없이 각자의 생각대로 가르치고 믿고 이것저것을 몽땅 수용하는 것은 주관주의, 상대주의, 인본주의 발상이다. 하나님의 계시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토대를 허문다. 기독교의 정체성을 앗아가고 교회의 생명력 위협한다. 중국지하교회의 사역자로 사도행전적인 역사를 일으키던 윈 형제가 독일교회를 방문하고서 “영적으로 죽은 교회”라고 말했다. 무엇이 독일기독교를 송장이 되도록 만들었는가? 무엇의 유럽을 기독교의 불모지로 만들었는가? 자유주의 신학, 세속주의 신학 그리고 그러한 신학에 교회의 문을 개방한 신학적 다원주의이다. 교리 없는 교회, 십자가 없는 기독교, 믿는 바가 확실하지 않는 신앙공동체, 존재의의가 불분명한 종교가 생명력을 가질 수 없다.

신앙고백서는 성경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는데 필요한 열쇠(clue)이다. 바울 서신의 약 3분의 2가 교리에 대한 내용이다. 나머지 3분의 1은 생활과 윤리에 대한 것이다. 장로교회와 개혁교회가 사용하는 웨스트민스터 대·소교리문답과 하이델베르크교리문답은 위대한 신앙고백서이다. 성경에 충실한 신앙고백서는 모두 훌륭한 신앙유산이다.

신학적 다원주의가 신앙공동체의 통일성을 위협하고 분파를 조장하는 반면에, 순수한 신앙에 대한 공적인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 중심의 교회의 일치성을 보전한다. 비진리와 이단의 확장을 배격하게 하고, 믿고 고백하는 바를 명확하게 만든다.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서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도록 한다. 사도들이 전한 복음에 충실하게 한다.

한국교회의 과제 중 하나는 분열을 치유하는 일이다. 교회의 일치는 효과적인 선교, 교제, 진리파수, 교회성장, 교육을 가능케 한다. 지구상의 마지막 분단민국 국가에 “화평케 하는 자”다운 모범이다. 그러나 교회의 연합과 일치에는 “최소한의 조건”이 있다. 그것은 성경이 제시하는 중추적인 교리에 대한 신앙고백적 일치이다. 일치된 신앙고백이 공동체를 하나로 묶을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외적인 연합은 회칠한 무덤이다. 교회연합과 일치의 조건이 될 교리의 범위를 정하는 것은 신학자들의 논의의 과제로 남겨져 있다.

성별(聖別)은 중추적인 교리를 둘러싼 신학 문제로 생기는 갈등을 해결하는 최후의 해결책이다. 주객이 전도되어 교회와 그 지도자들이 성경이 제시하는 기독교를 부정하거나 반기독교적 사상을 선전하면서 사도적 복음에 충실한 신자들을 제재하고 핍박할 때 신실한 신자들이 취할 수 있는 최후의 방법이다. 칼빈과 루터가 그 모범을 보였다. 나치치하의 독일고백교회와 일제말기의 신사참배거부운동교회가 그 전례를 따랐다.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기독교의 중추적인 교리를 거부하는 집단에서 이탈하여 참된 가견적 신앙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은 분리주의 행동이 아니다. 중추적인 진리에서 이탈한 교회, 거짓교회에서 분리하는 것은 보편적 그리스도의 교회에 일치하는 행동이다. 이것이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기본 원리이다. 성별과 분열(分裂)은 구분된다.

분리주의자들은 완전주의 개념을 가지고 개혁을 시도해 보지도 않고 교회를 떠난다. 매사에 분리적 심성을 가진다. 결함이 있다는 이유로 자기가 속했던 신앙공동체를 안일하게 내어버리고 영혼의 새로운 초막을 찾아간다. 교회 안에 말씀(진리, 교리, 고백)이 있는 한 결함이 있다고 하여 떠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사소한 교리의 차이를 빌미로 그 신앙공동체의 교제에서 자신을 단절시키는 것은 완전주의 태도이다.

그러나 교회가 공적 신앙고백문서에서 이단 교리를 천명하지는 않으면서도 기독교의 중추적 교리를 불신하는 사람을 목사로 안수하고 양떼를 가르치도록 묵인, 방조할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십자가 없는 기독교, 불가지론, 상대주의, 종교다원주의를 우상처럼 떠받드는 신학자를 제재하지 않는 경우는 어떻게 할 것인가? 교회의 생명력을 파괴하고 정체성을 말살시키는 자유주의 신학, 세속주의, 신학적 다원주의, 종교다원주의를 포용하는 교회와 일치를 도모하는 것은 정당한가?

진보계 신학자들은 “성경적”이라는 말과 “진리”라는 표현을 극도로 싫어한다. 반지성적이며 천박한 근본주의 용어라고 생각한다. 성경이 신앙행위의 최종규범이라는 사실을 내심 부정한다. 성경이 가라는 데까지 가고 멈추라는 곳에서 멈추고 돌아서라고 하는 데서 돌아서야 한다는 종교개혁자들이 중요하게 여겼던 오직성경(sola scriptura)의 원리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다.

개혁된 교회(ecclesia reformanda)와 개혁주의 정통신학의 관점에서 보면 신학적 다원주의, 포용주의를 지향하는 교회와 일치를 도모하는 것은 기독교의 생명력과 정체성 상실을 가져오는 폭탄장치를 허용하는 것과 같다. 주의 포도원을 여우에게 개방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한 교회, 교단과 교제를 삼가 해야 하는 것은 그들 가운데 구원받을 하나님의 백성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그 교회의 공적 고백문서가 이단사설과 거짓교리를 표방하기 때문도 아니다. 그 집단 안에 미국장로교회의 매카트니 같은 정통신학을 가진 목사나 신자가 전혀 없기 때문이 아니다.

자유주의 신학은 새로운 안목을 가지고 기독교의 지평을 넓히는 데 다소 기여했다. 구제, 인종차별 철폐, 빈민, 억눌린 자에 대한 관심, 사회악, 구조악의 타파, 사회문제 등에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기여한 것 보다는 손실이 더 컸다. 기독교의 토대를 부정하고 교회의 생명을 앗아가는 파괴적인 사상들을 주입시켰다. 자연주의적 전제에 기초한 사변적 이론을 가지고 초자연적 기독교의 복음을 평가절하 했다. 교회를 혼란시키고, 정박지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그리스도의 역사성과 성경의 무오성을 부정하고 상대주의 신념을 절대화 했다. 진리를 양보하여 하나 됨을 얻고자 하며, 기구적인 통일성을 얻고자 교리를 희생시켜 왔다.

신학적 다원주의를 지향하는 교회들의 큰 특징은 공적 고백문서 내용과 실제고백이 다르다는 점이다. 공식문서에서는 진리를 표방하지만 이단사설과 거짓교사를 제재하지 않는다. 세상철학과 이방지혜를 복음처럼 받든다. 맑은 물이 흐르는 강과 탁류가 흐르는 강이 합쳐지면 탁류의 강이 된다. 교회가 기구적 일치와 평화 유지를 위해 자유주의 신학을 수용하면 불원간에 생명력을 잃게 된다. 교회사는 신학적 다원주의를 지향하는 교회와 일치를 도모하는 것이 생명을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은 엄중하게 경고한다.

탁류의 강에 뛰어들어 정화하면 될 게 아닌가 하고 반문할 수 있다. 에큐메니칼운동을 주도하여 정통신학으로 방향을 선회하도록 하면 될 게 아니냐고 말할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바람직하다. 그러나 미국장로교회의 좌경화 과정에서 이러한 태도를 가졌던 어드만, 스피어 같은 중도파 인사들과 매카트니 같은 보수파 지도자들이 주는 교훈은 그것이 하나의 이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근년의 한국교회의 연합일치운동에 앞장서는 정통신학 노선의 신학자, 목회자들이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 교회를 “오직성경”의 원리로 회귀하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학적 다원주의, 포용주의를 주창하고 있지 않은가.

교회가 여러 교단으로 나뉘어 존재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것은 기독교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신학사상의 교회 유입이다. 현대주의 에큐메니칼 신학, 신학적 다원주의, 종교다원주의 등을 묵인하면서 교회의 연합이나 일치를 도모하는 것은 스스로 생명력을 포기하는 것이다.

진리와 비진리는 양립될 수 없다. 연합일치운동은 “진리 안에서의 일치”가 전제되어야 한다. 이것이 불가능한 경우는 독자적인 교단을 보존하고 성경적 신앙고백과 역사적 독특성을 고유하게 유지하는 것이 보편적인 그리스도의 교회에 이바지하는 것이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사랑하여 자신을 주시고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여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게 하셨다.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셨다(엡1:4).

자유주의 신학을 수용하거나 신학적 다원주의를 지향하는 교회들과 일치는 무조건 반대해야 하는가? 이 책의 논의는 그러한 교단과 일치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사도신경을 고백하면 신앙고백공동체로 충분하고, 그것에 기초하여 교단통합을 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진리를 거역하는 일이다. 생명력과 정체성을 상실한 유럽과 미국의 교회들의 전철을 답습하는 것이다.

높은 성경관과 전통적 기독교 교리에 기초한 교회들의 연합활동은 바람직하다. 전통적 기독교의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며, 성경 가르침에 충실한 교회쇄신운동을 전개하고 이단에 대응하는 연합활동은 긍정적이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그러한 활동을 일부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려되는 것은 이 단체가 자유주의 신학을 수용하고 신학적 다원주의 태도를 가진 교회들을 회원교회로 받아들이며 세계교회협의회 한국 지부 성격을 지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단일화를 추구하고 있는 점이다. 신학적 정체성에 대한 회의를 갖게 한다.

자유주의 신학을 수용하고 신학적 다원주의 태도를 가진 교단과 연합활동을 하는 것은 무방한가? 사안에 따라서 선택적으로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공동으로 번역하는 등 자신의 신앙고백, 교리,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그렇게 할 수 있다. 화이부동(和而不同), 어울리면서도 동화되지 않는 태도를 가지고 하면 된다. 불교승려와 손을 맞잡고 남북통일과 사회정화와 구제를 논해야 하는 상황에 기독교라는 이름을 가진 집단과 협력하는 것을 마다할 까닭이 없다.

보수계 교회로 알려진 한국의 대신교단과 합동정통교단이 장로교연합회를 통해 신학적 다원주의를 지향하는 기장교단과 통합교단 지도자들과 한국장로교연합회 활동을 중심으로 어울리다가 자유주의계 에큐메니칼 단체인 세계개혁교회 연맹(WARC)에 가입했다.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화이부동의 태도로 함께 일하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연합활동을 하는 동안 진리에 대한 민감성은 상실되고, 거짓교사에 대한 긴장과 경계심은 서서히 풀어진다.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3:15)이다. 한국교회는 예배당 강대상의 높이를 낮추고, 영상시설을 설치하고, 현대풍의 다소 세련된 예배를 드리는 것에 열중하고 있다. 도덕성을 고양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노력들을 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의 개혁은 그 차원을 넘어서야 한다. 교회와 신자와 세상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다스림을 받도록 해야 한다. 교회의 생명과 사활이 걸린 중대한 신학 문제를 정치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입을 열어 말을 해야 할 지식인들이 권력자의 비호를 기대하고 눈치나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목회자, 신학자들은 성경적 기독교의 토착화를 위한 노력, 교회의 생명력을 보장하는 정통신학을 보급, 확산시키고 그것을 후대에 물려주려고 하는 노력은 어느 정도로 하고 있는가? 진리파수를 교회의 의무가 아닌 선택사항으로 보는 것은 아닌가? 일반신도들은 자유주의 신학, 신신학, 종교다원주의, 신학적 다원주의를 논박할 수 있는 눈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보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거짓교사를 분별할 수 있도록 진리를 부지런히 가르쳐야 하지 않는가?  

교회개혁자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이다. 신앙의 선조들처럼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담자답게 강건”(고전16:13)해야 한다. 엘리야, 아모스, 예례미야, 요한, 바울은 진리파수의 사명에 목숨을 걸었다. 진리가 공격을 받고, 교회가 저항력을 상실하고 있는데도 이를 방관하는 것은 교회 돌봄의 과업을 유기(遺棄)하는 것이다. 나팔은 분명한 소리를 낼 때에만 가치를 가진다. 침묵은 인정하거나 동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칼빈은 하나님의 진리가 공격을 당하는 것과 관련하여, “개는 그 주인이 공격을 받을 때 짖는다. 만일 하나님의 진리가 공격을 받는데도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침묵한다면 나는 개만도 못한 겁쟁이가 될 것이다”(나바르의 마가렛에게 보낸 편지)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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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최덕성 교수가 2004년 <에큐메니칼운동의 우상> 출판을 앞두고 쓴 글이다. 
원제: 화이부동(和而不同)은 가능한가?(최덕성 교수, 리포르만다)

최덕성 교수는 고신대학교, 리폼드신학교(M.Div, M.C.ED), 예일대학교(STM), 에모리대학교(Ph.D)에서 연구하였고, 고려신학대학원의 교수였고 하버드대학교의 객원교수였으며, 현재는 브니엘신학교의 총장이다. ‘신학자대상작’으로 선정된「한국교회 친일파 전통」과 「개혁주의 신학의 활력」,「에큐메니칼 운동과 다원주의」을 비롯한 약 20여권의 귀중한 신학 작품들을 저술하였다. 신학-복음전문방송 <빵티비>(BREADTV)의 대표이며, 온라인 신학저널 <리포르만다>(REFORMANDA)를 운영하며 한국 교회에 개혁신학을 공급하기 위해 정열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신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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