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회중교회와 장로교회의 차이점에 대해, 그리고 미국에서 회중교회가 어떻게 발전되었는 설명해 주십시오. 

 

 

답변>
회중교회와 장로교회는 너무도 다른 내용의 신앙과 정치 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 두 교회가 정치 제도에서만 다르고 내부 신앙(신학)에서는 동일하다고 알려졌습니다. 서로의 차이를 비교해 보겠습니다.

 

1. 교회 정치

장로교회는 기본적으로 교인들이 선출한 목사와 장로들로 구성되는 당회의 정치입니다. 그리고 당회들로 구성된 노회, 노회들로 총회가 전국의 장로교회들을 통치합니다. 회중교회는 구원받은 신자들의 모임인 한 회중에게 교회를 스스로 다스리고 통치할 수 있는 모든 권한을 그리스도께서 위임했다고 가르칩니다. 회중교회는 교회의 모든 중대사를 회중이 직접 결정하고, 외부의 누구도 회중의 결정을 침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회중교회주의(congregationalism)가 미국의 민주주의 모토가 되었습니다. 교회의 회원 한 사람 한 사람을 중시하는 회중교회 사상이 초기 미국의 사회, 정치, 문화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장로교회는 교인들이 선출한 장로들로 구성되는 당회, 노회, 총회 중심의 교회 정치가 성경적이라고 가르쳤고, 군주 제도를 몸서리치게 거부한 회중교회와 달리 장로교회는 왕의 세속 통치를 바람직하게 여겼습니다.

세속 군주에 대한 상반된 태도로 인해 초기부터 영국에서 장로교와 회중교는 서로 죽기 살기로 싸웠습니다. 이 둘의 분열은 결국 장로교 청교도 운동과 회중교 청교도 운동을 포함한 전체 청교도 운동 자체를 몰락시켰고 대신 영국 국교회가 영원히 국가 종교로 자리잡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2. 지상교회

장로교와 회중교는 눈에 보이는 지상 교회에 대한 관점에서도 완전히 달랐습니다. 장로교회(칼빈)는 순수하게 구원 받은 자들로만 지상 교회를 세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칼빈은 눈에 보이는 교회 안에 이리가 있고, 현재 교회에 잘 다니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양의 우리를 떠날 사람도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가를 아는 것은 하나님만이 가지신 특권이다(딤후 2:19) ... 완전히 멸망해서 아무 소망도 없는 것처럼 보이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해 부름을 받아 바른 길로 돌아오며, 누구보다도 굳건히 서 있는 것처럼 보이던 사람들이 넘어 진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이 말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은밀한 섭리에 따라 ‘밖에도 양이 많고 안에도 이리가 많다.’”(기독교강요, 4,1,8)

회중교회는 처음부터 오직 구원 받은 사람들로만 교회를 구성해야 한다는데 역점을 두었습니다. 그것은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을 교회의 회원으로 간주하는 잉글랜드의 국가교회(국교회)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난 현상이었습니다. 영국의 국교회를 사탄의 집단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에 의해 가장 먼저 회중교회 운동이 일어났는데, 자연히 국가교회 개념을 부정하는 사상이 가장 먼저 출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회중교회는 자신의 회심 체험을 공개적으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하고, 그리고 하나님께 충성하고 교인으로서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맹세(서약, 서명, 언약)하는 사람들만 교회의 회원이 되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회중교회의 ‘교회언약’ 사상입니다.

장로교회에서는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 받은 사람이 교회 회원이 됩니다. 회중교회는 믿고 세례를 받을 뿐 아니라, 자신의 구원에 대해 고백할 수 있어야 하고 하나님과 교회, 그리고 회중 가운데서 목회자로 선출되어 사역하는 목사에 대하여 충성, 헌신, 순종의 의무를 수행하겠다는 내용에 서명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습니다. 교회의 정회원이 되기 위해 각 사람이 이런 내용을 하나님께 언약(맹세, 서약)하는 것을 의무로 가르쳤는데, 이것이 회중교회의 특징인 교회언약입니다.

회중교회의 교회언약 속에는 각 자가 율법을 잘 준수함으로 하나님께 충성하겠다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신약 성경 어디에도 율법을 준수함으로 하나님께 충성하라는 가르침이 없습니다. 오히려 신약 성경은 율법 준수를 강조하는 것을 이단으로 정죄하였습니다. 회중교회는 구원 받기 전에 율법을 준수하면서 성령의 회심 체험을 기다려야 한다고 가르쳤고, 구원 받은 후에는 더욱 율법을 준수함으로 하나님께 충성하라고 가르쳤습니다. 특히 주일성수를 구약의 안식실 준수 정신으로 강조했습니다. 회중교회의 구약의 안식일 개념의 주일 성수는 회중교회 신앙과 경건의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청교도 운동의 경건 사상은 심각한 율법주의였습니다. 박윤선 박사가 주일 오후 예배를 드리지 않고 외국인 선교사를 배웅하려고 택시를 타고 갔다고 해서 당시 고신교단의 사람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는 사실은 미국 선교사들을 통해 유입된 청교도적(회중교회) 경건이 사실상 비성경적인 율법주의였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합니다.

현재 한국에서 칭송되는 청교도 신학, 사상, 서적들 99% 정도가 회중교회가 발전시킨 것들입니다. 한국에서 존경받고 있는 400년 전의 영국과 미국의 청교도들의 명단을 추려보면, 거의 전부 회중교회 인물들입니다. 예를 들자면, 퍼킨스, 에임스, 존 오웬, 에드워드 ...
 

3.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장로교회의 발상지는 스코틀랜드이고 회중교회의 발상지는 잉글랜드입니다. 존 낙스에 의해 시작된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은 사실상 로마교회를 물리치고 장로교회를 세우는 운동이었습니다. 낙스가 칼빈에게서 배웠고, 칼빈의 기독교강요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영국의 국가교회(국교회, 성공회)를 강요하는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통합군주 찰스 1세에 맞서 반드시 장로교회를 지키겠다고 대다수 국민들이 하나님께 언약하는 ‘국민언약 운동’을 전개했고, 장로교회를 지키기 위한 찰스 1세의 군대와 전쟁까지도 불사하였습니다. 그래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언약도’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잉글랜드 국가교회(성공회)안에서 일어난 청교도 운동의 초기 목표는 국교회의 감독 제도를 없애고 장로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었습니다. 1669년 케임브리지 대학의 교수였던 토마스 카트라이트에 의해 최초로 주장되었는데, 엘리자베스 여왕과 국교회의 감독들이 단결하여 탄압함으로 장로교 도입운동은 1680년대 들어서 사실상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습니다. 잉글랜드 청교도들에게서 장로교회를 세우려는 운동이 거의 좌절되던 1680년대 초에 회중교회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국교회를 교회로 인정하지 않고 새로운 회중교회를 세우려는 사람들(분리파, separatists)이 먼저 출현했고, 국교회를 교회로 인정하면서 국교회와 형제 관계 속에서 새로운 회중교회(독립파, independents) 세우려는 사람들이 나중에 출현했습니다.
 

4. 웨신서와 사보이 선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이후 ‘웨신서’)가 탄생하게 된 시대적 배경은 잉글랜드 내전이었습니다. 다수의 청교도 운동 지자자들로 구성된 의회와 국교회를 지지하는 왕당파 간의 전쟁(1642년부터)이 벌어졌습니다. 의회는 국교회를 반대하는 하나의 통합된 청교도 교회를 세우려는 목표 하에 여러 청교도 종파들의 대표들을 소집하여 웨스트민스터 총회(1643년, 이후 ‘웨총회’)을 개최하였습니다. 웨총회는 청교도 통합 교회를 세우기 위해 가장 먼저 신앙고백서를 작업을 시작했고, 그 결과로서 웨신서가 1647년에 의회의 승인을 받았습니다.

웨신서는 하나의 통합된 청교도 교회를 위한 신앙고백서였으므로 각 종파들은 자신들의 중요한 사상을 그 속에 심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다수의 장로교 대표들과 소수의 회중교 대표들 간에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습니다. 외국의 한 연구자는 웨총회에서 벌어진 장로교 대표들과 회중교 대표들 간의 논쟁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게 우려스럽고 혐오스러웠던 독립-회중교회주의(회중교 청교도)가 잉글랜드에서 부상한 것이 잉글랜드의 장로교주의의 운명을 결정하고 말았습니다.”(Robert Letham, The Westminster Assembly, 43)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조들의 눈에 그 당시 회중파들의 신앙과 사상이 ‘우려와 혐오’의 대상이었다는 것입니다. 칼빈의 사상과 반대인 ‘행위언약-능동순종’ 등 기독교 신앙의 기둥을 흔드는 이단적인 요소들을 회중교회 사람들이 발전시키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웨신서에는 칼빈의 신학과 다른 회중교 조상들이 발전시킨 행위언약 사상(웨신서 7,19장)이 기술되었습니다. 그리고 행위언약에 맞는 거짓 구원론인 능동순종 교리도 은근하게 암시되었습니다.

회중교 사람들이 능동순종 사상을 주장할 때, 장로교 대표들은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그리고 능동순종 사상을 가르치지 말라는 제임스 1세의 명령을 담은 글도 회의장에서 낭독되었습니다. 제임스 1세는 역사적으로 어떤 공의회에서도 능동순종 사상을 수용하지 않았고, 어떤 교부들도 능동순종을 가르친 적이 없으므로 능동순종 사상에 대한 논의를 자신이 통치하는 땅에서 허용하지 않는다고 말했었습니다.(Robert Letham, The Westminster Assembly, 39)

우리는 지금까지 웨신서가 순수하게 장로교 선조들이 장로교를 위해서 작성한 것으로 배웠습니다. 청교도와 국교회의 전쟁 중에 국교회를 대체할 하나의 통합 청교도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장로교와 회중교 등의 신앙을 섞어서 만들어 낸 공동의 신앙고백서로서 웨신서가 탄생했다는 사실을 가르치지 않았으므로 저를 비롯한 대부분이 오해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는 청교도와 국교회 간의 전쟁 상황이었고, 군사적 힘을 가지는 사람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군대를 이끌면서 국교회 군대를 물리치고 청교도 측이 승리하게 한 사람은 올리버 크롬웰이었는데, 어떤 외국 학자의 글을 보니 당시 크롬웰과 그의 군대는 회중교인들로 구성된 군대였다고 합니다.

“크롬웰과 그의 군대의 대부분의 병사들은 독립-회중교회파들이었지 장로교인들이 아니었습니다. 권력이 크롬웰과 회중교회 파들에게로 이동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습니다.”(Robert Letham, The Westminster Assembly, 43)

웨총회를 소집한 잉글랜드 의회를 움직이는 사람들 다수는 장로교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청교도 군대를 이끌고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과 병사들 대부분은 회중교인들이었습니다. 영국의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낼 수 있는 힘이 다수의 장로교인들로 구성된 의회에서 다수의 회중교 신자들로 구성된 크롬웰의 군대로 이동된 것입니다. 더 이상 회중파 청교도들이 장로교 청교도들과 함께 어렵게 만든 웨신서를 따를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웨신서를 만들기 위해 함께 서로 합의했던 '엄숙동맹'(1643)과 웨총회가 진행하는 일들의 의미는 약화되기 시작했고, 심지어 크롬웰이 의회를 군대로 장악하고 장로교회 파들은 모두 추방하였습니다. 

이후 군주 제도에 대한 이견으로 인해 양측의 갈등은 더 심해졌고, 크롬웰의 군대가 1648년, 1650년, 1651년 걸쳐 세 번이나 스코틀랜드를 점령하여 장로교회를 말살하였습니다. 장로교와 회중교 사이가 이렇게 되어버린 이유는 처음부터 장로교와 회중교 신앙의 DNA가 마치 개와 고양이 같았기 때문입니다. 1)회중교는 그리스도가 율법을 지켜 구원에 필요한 의를 얻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했다는 성경에서 전혀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이단 사상을 가르쳤습니다. 2)회중교는 구원 전에는 율법을 지키면서 구원을 준비해야 하고, 구원 후에는 율법을 지키면서 하나님께 충성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회중교의 사상은 신약 성경이 가르치지 않는, 오히려 오히려 신약 성경이 정죄하는 이단적인 사상입니다. 

처음부터 장로교와 회중교는 영적으로 다른 길을 개척했습니다. 하나는 정통이고 하나는 거의 이단의 길입니다. 회중교가 세속적인 힘을 가졌을 때 장로교를 말살하였던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회중교는 1658년 자신들만의 사보이 선언(Savoy Declaration)을 작성함으로 장로교와 함께 만들었던 웨신서를 사실상 버렸습니다. 후에 크롬웰이 죽고 회중교 세상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스코틀랜드 장로교 사람들은 다시 국왕(찰스 2세)을 추대하는데 앞장섰습니다. 그런데 왕이 된 찰스 2세는 기대와 달리 국교회를 국가종교로 지정하고 다른 모든 종교들을 불법으로 만들었습니다. 장로교와 회중교는 서로 싸우다가 함께 망한 것입니다.
 

5. 미국을 세운 회중교회

현재의 미국을 건설한 초기 사람들은 회중교인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620년 메이 플라워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넌 사람들은 국교회를 부정하고 새로운 회중교회를 세운 사람들입니다. 국교회를 부정하는 회중교인들에게는 다른 선택의 길이 없었습니다. 국교회를 인정하면서 회중교회를 지향하였던 사람들도 결국에는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 미국의 회중교회로 합류하였습니다.

이후 100년 동안 회중교회는 신대륙에서 하바드, 예일 대학 등을 세우면서 미국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1700년대 초부터 스코틀랜드 장로교인들도 신대륙으로 이주하였는데, 장로교회 기반이 없어서 모두 회중교회에 출석했습니다. 장로교회가 생겨도 마땅한 목회자가 없어 회중교회 신학교(하바드, 예일) 출신을 청빙했습니다. 영국과 달리 미국에서는 회중교회와 장로교가 개와 강아지(고양이가 아닌) 같이 서로 섞여졌습니다.

회중교회 목사이고 마지막 청교도라 불리우는 에드워즈의 부흥 운동 속에 지금의 신사도 운동 집회 현상들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큰 이단 논쟁이 일어나서 신대륙의 교회가 양분되었습니다. 소수가 된 에드워즈의 대각성 지지파들, 장로교 목사들과 회중교 목사들이 새로운 신학교(지금의 프린스턴)을 만들었고, 훗날 그곳에 자유주의가 침투하자 지금의 웨민신학교가 그곳에서 다시 갈라져서 나왔습니다. 문제는 미국에서는 한 번도 장로교 속에 회중교 신학이 자리 잡았다는 사실에 대해 각성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최초의 장로교 신학교의 이름이 장로교와 회중교가 함께 만든 신앙고백서의 이름을 따서 'Westminster Seminary'라고 지어졌다는 사실 하나만 보아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6. 미국과 한국의 회중교회 역사

회중교회는 초기 미국의 민주주의와 인권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동시에 미국 교회를 이단의 온상으로 만드는 데에도 크게 공헌했습니다. 회중교회의 목사이고 미국의 마지막 청교도라 불리우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대각성은 1)구원을 위한 사람의 역할과 준비를 가르치는 회심준비주의, 2)그리스도의 구속을 적용하는 것과 무관한 괴상한 성령신학(쓰러짐, 몸의 마비, 환상, 입신), 3)신인합일 신비주의를 교회에 도입하여 이후 오순절 운동 등의 거짓 부흥이 일어나는 토양을 제공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제자들 통하여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을 부정하고 보편구원을 주장하는 이단 사상이 형성되었습니다. 그것은 유니테리안 사상과도 연관이 있었는데, 회중교회를 통해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유니테리안주의가 미국에 급속하게 전파되었습니다. 라은성 교수도 회중교회가 유니테리안 이단과 깊은 연관을 가진다고 다음과 같이 평가했습니다.
 

“회중파는 칼빈주의에서 떠나 유니테리언(Unitarianism), 일신론, 또는 유신론을 채택하고 보편구원설 또는 보편주의(Universalism)를 고수했습니다.”(라은성, 이것이 교회사다, 294)

미국의 최대 교단이었던 회중교회는 1929년 ‘그리스도인 교회’(the Christian Churches)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인 회중의 교회’(Congregational Christian Churches)가 되었고, 1957년 ‘복음주의 개혁교회’(Evangelical and Reformed Church)와 연합하여 지금의 ‘그리스도 연합교회’로 변하였습니다.

회중교회는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지 않았습니다. 회중교회는 1886년 일본에서 '조합교회'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어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서울, 평양에 몇 개의 조합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조합교회는 조선 복음화 명분 아래 일본의 황국신민화 정책의 앞잡이 역할을 했고, 1921년 '조선 회중교회'라고 이름을 변경하였습니다. 일본 조합교회는 1941년에 다른 교단으로 흡수되었고, 한국에서도 1945년 일본의 패망과 함께 회중교회들도 해체되었습니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바른믿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