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혁 교수의 '언약신학' 2장 : 윌리엄 퍼킨스 부분에 대한 여덟 번째 소감

안상혁 교수(합신, 교회사)의 저서 <언약신학>을 독서하는 이유는 잉글랜드 회중교회파 청교도들의 신앙이 기독교에 해를 미치기 때문이고, 특히 안 교수가 옹호하는 그들의 언약 신학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현저하게 훼손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글은 안 교수의 책 2장의 윌리엄 퍼킨스(행위계약 입안자) 부분에 대한 여덟 번째 소감이다. 퍼킨스의 행위계약 사상은 청교도 신학에서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1)퍼킨스의 행위계약 사상은 엘리자베스 여왕 치세 후반기부터 본격적으로 발전된 청교도주의의 출발점이었다.

2)퍼킨스의 행위계약 사상 때문에 그리스도의 구원의 방식이 비틀어졌다. 행위계약에 맞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방식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하여 영생을 얻지 못하고 저주 받았다는 아담을 대신하여 그리스도가 완전하게 율법을 준수하여 구원에 필요한 의를 획득하였다는 비성경적인 능동순종 교리를 만들었다.

3)퍼킨스의 행위계약-은혜계약은 사람이 철저히 자신의 죄와 영혼의 비참함을 깨닫고,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공로를 갈망하고, 율법을 준수하고, 예배드리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구원을 사모하여야 성령의 회심이 일어난다는 회심준비론 목회를 유발하였다. 회심준비론은 아무 공로없는 죄인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를 얻는다는 성경과 종교개혁의 핵심을 파괴한다. 회심준비론 목회는 예수 믿는 신자들이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지게 만들었다. 

“퍼킨스 목사님, 저는 구원을 받도록 예정된 사람이 맞을까요?”

퍼킨스의 행위계약 사상에 대해서 아무리 살펴도 결코 과하다 할 수는 없다. 오늘의 글은 안 교수의 책 2장의 퍼킨스 부분의 두 번째 파트의 마지막이고, 앞으로 또 한 파트가 남아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그린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퍼킨스 역시 선택과 예정에 관한 문제를 두고 고뇌하는 행위와 상태 즉 ‘통회하는 심령’, ‘하나님께 대한 개별적인 범죄로 인한 한탄함’, ‘육과 더불어 투쟁하며 비통해 함’,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공로를 진실하게 갈망함’ 등을 일종의 성화의 효과들 혹은 선택의 지표들 가운데 하나로 포함시킨다는 사실이다.”(안 교수의 말/ 118 페이지)

청교도주의의 아버지 퍼킨스가 다음과 같은 일들이 구원에 이르도록 선택받은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통회하는 심령’
‘하나님께 대한 개별적인 범죄로 인한 한탄함’
‘육과 더불어 투쟁하며 비통해 함’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공로를 진실하게 갈망함’

퍼킨스와 청교도 신학은 성령의 회심의 은혜가 나타나기 위해 사람이 먼저 이와 같은 상태에 도달하여 머무르고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퍼킨스와 청교도들은 사람에게서 이와 같은 구원을 위한 준비가 먼저 이루어지기 위해 반드시 율법의 저주를 알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지 말고 율법의 저주를 먼저 전해야 사람에게서 이러한 준비가 되어진다고 했다.

“퍼킨스는 번민하는 교인들을 위해 목회자는 율법과 복음을 능숙하게 다루어 적용해야 한다는 그린햄의 주장에 동의한다. 여기서 율법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복음은 위로와 치료의 말씀으로서의 복음을 의미한다.”(안 교수의 말/ 119 페이지)

퍼킨스도 사람이 준비되게 하려고 율법을 먼저 전했고 준비가 이루어진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다. 퍼킨스와 청교도들의 복음전파와 영혼구원에 대한 이해는 성경의 가르침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신약의 사도들이 어떤 방식으로 영혼들을 구원했는지 살펴보자.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사도 바울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했다고 한다. 바울 사도는 언제, 어디서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시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성령은 복음이 증거될 때 역사하시어 택하신 자들이 믿음고백에 이르게 하여 구원하신다. 먼저 율법을 전하여 준비시키고 준비되었을 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성경에 없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 새”(행 8:4)

“두 사도가 주의 말씀을 증거하여 ... 여러 촌에서 복음을 전하니라”(행 8:25)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행 8:35)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행 8:40)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행 10:36)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행 14:7)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행 14:21)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행 16:10)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제자들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 먼저 구약의 율법을 전하여 사람들을 준비시킨 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구원받게 하지 않았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 4:2)

성경은 오직 언제나 그리스도의 복음(말씀)을 전파하라고 가르친다. 말씀이 전파되는 곳에서 성령이 함께 역사하시어 듣는 사람들 가운데 택하신 자들이 믿음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말씀 전파는 성경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하고 선포하는 것이다. 구약의 율법, 제사, 절기, 음식 규례 등 모든 것들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하여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면 성령이 택하신 자들에게 역사하여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구약의 율법을 먼저 전하여 준비시키고 신약의 복음을 나중에 전한다는 청교도들의 사상은 성경으로 성경을 공격하고 예수로 예수를 구타하는 교묘한 사상이다. 퍼킨스와 그 후배 청교도들의 이런 비성경적인 회심준비론을 주장했던 이유는 사람이 스스로 자기의 구원을 위해 몸부림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당시 엘리자베스 여왕이 국교회를 감싸고 돌면서 청교도 운동에 협조하지 않고 오히려 핍박하였으므로 국민들이 스스로 자기의 구원을 위해 노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안상혁 교수/ 합신 교회사
안상혁 교수/ 합신 교회사


“이처럼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과 거저 베푸시는 그리스도의 구원을 소개한 후, 퍼킨스는 이와 더불어 언약의 조건적 측면 역시 강조한다. 회개와 믿음은 가장 중요한 언약의 두 조건이다. 성도는 ‘믿음과 회개를 통해 그리스도를 받는다.’ 첫째,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요구되는 조건이 있는데 이것은 바로 믿음이다. 언약의 조건으로서의 믿음을 말하면서 동시에 퍼킨스는 이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강조한다.”(안 교수의 말/ 120)

“회개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퍼킨스에 따르면 (믿음과 마찬가지로) 회개 역시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반드시 요구되는 우리의 ‘의무’이기도 하다. 이러한 회개에 앞서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가 선행한다. ‘그 어느 누구도 회개를 자신의 힘에 의지하거나 자기의 힘으로 이행할 수 없다.’”(안 교수가 인용한 퍼킨스의 말/ 122)

퍼킨스의 주장은 사람이 구원 받기 위해 먼저 믿음과 회개를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회개가 먼저 이루어져야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구원을 받기 위해 회개를 먼저 보여야 한다는 것은 죽은 사람이 살기 위해 스스로 죄를 고백해야 한다는 것과 같다. 퍼킨스의 주장이 성경적인지 진위를 검증해 보자. 십자가에 달린 상태에서 구원 받은 강도의 사례를 보자. 퍼킨스의 말처럼, 그 강도가 하나님의 은혜(선물)를 따라 미리 자신의 죄를 통회하고 한탄하는 과정을 거치고 난 후에 구원을 받았는가? 그 강도가 자신의 지옥 갈 운명을 깨닫고 한탄하면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갈망하는 준비 상태를 지나온 적이 있었는가? 성경은 전혀 그런 내용을 말하지 않는다. 그 강도는 단지 하나님의 택하심과 섭리 가운데 죽음의 날에 그리스도를 만났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그리스도를 믿었을 뿐이다. 그 외에 그의 구원을 설명할 수 있는 다른 정보는 없다. 

안 교수의 다음의 말을 보자. 퍼킨스와 청교도들의 구원론이 장로교 신학으로 채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퍼킨스의 신학은 감리-성결-순복음 교회들의 구원론으로만 남았어야 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만 가지고 따지자면, 언제나 회개가 다른 모든 은혜에 앞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안 교수의 말/ 123)

“이 쌍둥이 은혜, 중생과 회개 가운데 무엇이 외면적으로 먼저 드러나는지의 여부를 논하자면, 언제나 회개가 다른 모든 은혜에 앞서 이루어진다. 외면적으로 가장 먼저 드러나는 것이 회개인 것이다 ... 구원에 필요한 다른 모든 마음에서 일어나는 은혜들은 회개를 통해 겉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회개가 가장 먼저 선포되는 것이다.”(안 교수가 인용한 퍼킨스의 말/ 123 페이지)

퍼킨스와 안 교수의 주장은 구원 받을 사람에게서 가장 먼저 나타나는 현상이 회개라는 것이다. 회개가 구원의 언약을 완성하기 위해 사람에게 요구되는 조건이라는 것이다. 먼저 회개하여 구원 받을 조건을 만든 후 그리스도의 공로를 적용 받아 구원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구원 받은 사람의 실제 사례를 성경에서 단 한 건이라고 발견할 수 있을까? 십자가상에서 구원 받은 강도의 경우를 한번 더 생각해 보자. 그리스도께서는 대략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셨고 오후 3시 경에 운명하셨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그날 정오에 하늘이 깜깜해졌는데 그 강도는 그 이전에 구원 받았다(눅 23:43,44). 퍼킨스의 이론에 의하면, 9시 경부터 정오 사이에 그 강도에게서 회심준비와 실제 구원이 모두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강도에게 그런 과정이 있었다고 성경은 전혀 말하지 않는다.  

퍼킨스와 청교도들의 신학은 앞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을 말하면서 칼빈주의의 구색을 갖춘다. 그러나 뒤에서는 구원을 위한 사람의 조건과 역할을 강조한다. 겉으로는 칼빈주의 모양새이지만, 속으로 들어가면 펠라기우스주의와 천주교와 알미니안주의와 웨슬리안의 냄새가 난다. 지금까지 우리는 그들의 앞 모습만보고 청교도 신학이 최고의 개혁신학이라는 그들의 모략에 꼴딱 넘어갔다. 청교도 신학은 정체 불명의 괴상한 신학이다. 앞에서는 이 말을 하고 뒤에서는 저 말을 한다. 그래서 마이클 맥기퍼트가 퍼킨스의 신학이 모호하다고 바르게 지적하였다. 그러나 안 교수는 맥기퍼트의 지적이 옳지 않다고 했다. 

“필자는 퍼킨스의 모호함 혹은 소위 ‘두 생각’을 지적한 마이클 맥기퍼트(Michael McGiffert)의 비판이 정당하지 못하다고 생각된다. 맥기퍼트에 따르면 퍼킨스는 자신의 저서 <황금사슬>(A Golden Chain)에서는 일방적 은혜 언약의 수호자로 주장하지만, 그의 갈라디아서 설교에서는 사람 편의 회개를 강조하면서 양자 사이에서 일종의 모호함을 드러냈다는 것이다.”(안 교수의 말/ 123)

맥기퍼트의 지적이 정당했으나, 안 교수는 청교도 히로뽕에 취했으므로 맥기퍼트가 오해했다고 평가했다. 안 교수는 되려 다음과 같이 청교도 사상을 미화하였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밝힌 바와 같이, 퍼킨스의 언약 신학은 애초부터 하나님의 절대적이면 일방적인 은혜는 물론 이와 더불어 회개를 통해 언약의 조건을 만족시킬 사람 편의 의무 또한 강조했다.”(안 교수의 말/ 124 페이지)

그러나 회개를 통해 구원 언약에서 사람에게 요구되는 조건을 충족시키라는 가르침은 성경에 없다. 구원을 받기 전에 사람이 손톱만큼이라도 회개를 하여 구원 언약의 효력을 완성시켜야 한다면, 구원 받을 사람은 없다. 이미 죽은 사람(엡 2:1)이 자기의 죄를 깨닫고 회개한다는 말은 금시초문이다.  

“결국 그리햄과 퍼킨스가 가르친 확신 교리에 있어 공통적으로 또한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가장 확실하고 무오한 토대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 그리스도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이다.”(안 교수/ 125 페이지)

구원이 오직 하나님은 은혜와 그리스도의 공로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이것마져 건드리면 청교도 신학은 이단 사상이다. 이것을 건드리는 신학은 없다. 단지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는 구원을 얻기 위해 사람이 준비하고 협력해야 함을 주장하는 펠라기안, 천주교, 알미니안 신학이 있을 뿐인데, 퍼킨스와 청교도 신학도 같은 내용을 주장한다. 
 

맺는 말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였고 동시에 먼저 회개하여 준비된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공로를 적용시켜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퍼킨스와 청교도들의 신학은 종교개혁 신학이 아니고, 장로교 신학도 아니고, 칼빈주의도 아니다. 청교도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청교도하는 사람아! 대체 너의 정체는 무엇이냐? 칼빈주의냐? 알미니안주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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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