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모 목사의 성경 오역(誤譯), 오석(誤釋) 바로잡기(10)

 

들어가는 말

번역 성경은 원문 성경의 의미를 100% 다 전달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오죽했으면 “번역은 반역이다”라는 자괴적인 말까지 나왔을까! 그럼에도 번역자들은 “번역은 반역이다”라는 말이 번역을 잘못하면 반역의 짓을 할 수 있다는 경고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특히 성경을 번역하는 자들은 “번역은 반역이다”라는 경고를 가슴 속 깊이 새기고 최대한 원문에 가깝도록 정밀하게 번역하려고 애써야 한다. 왜냐하면 번역하는 자들이 자칫 원문과 거리가 먼 번역을 함으로써 하나님을 반역하는 짓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오늘 필자가 다루려고 하는 부분은 접속사의 번역에 대한 반역 문제이다. 번역자들이 성경 원문에 있는 접속사를 빠뜨리거나 잘못 번역함으로써 자주 하나님께 반역을 저지르곤 한다. 원문의 접속사를 오역하므로 생기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의 문제는 영어 성경에서보다 한글 성경에서 더욱 빈번히 나타난다.

한글 성경에서 가장 많이 빠뜨리는 원문의 접속사는 신약 성경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접속사 “kai.”(카이/그리고)와 “de.”(데/그러나), 그리고 “ga.r”(가르/왜냐하면)일 것이다. 물론 이 접속사들 중에 “kai.”(카이)는 순접 기능의 접속사이므로 번역하지 않고 빠뜨려도 대부분 원문의 의미를 거의 그대로 반영한다. 그러나 역접의 기능의 접속사 “de.”(데)를 “그리고”로 오역하거나(고전14장 4절/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de/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이 여기에 해당한다) 생략해 버리면, 심각한 반역의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왜냐하면 원문에서 “A but B”는 ‘A’와 ‘B’가 서로 동류라는 의미를 내포하는 “A and B”와는 다르게, ‘A’와 ‘B’가 서로 대립되는 반대의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A’와 ‘B’를 연결하는 역접 기능의 접속사 “de.”(데)를 “그리고”로 번역하거나 생략해 버리면, 원문의 “A but B”는 저자의 원래 의도와는 다르게 “A and B”의 의미로 읽혀지고 만다. 이런 오역으로 인해 원문에서 ‘A’와 ‘B’의 대립과 반대 의미를 나타내고 있는 “A but B”는 “A and B”의 의미로 왜곡됨으로써 하나님을 반역하는 짓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한글 성경에서는 원문에 있는 “ga.r”(가르/왜냐하면)도 자주 빠뜨린다. 이것도 앞의 “de.”(데)의 경우와 동일하게 원문의 의미를 심각하게 훼손시킨다. 왜냐하면 “A ga.r(가르) B”에서 원인, 이유 등을 나타내는 접속사 ga.r(가르)를 번역하지 않으면, 원문에서 저자가 말한 ‘A’의 원인과 이유로 ‘B’를 제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번역문에서는 저자가 ‘A’ 다음에 단순히 ‘B’를 이어서 나열한 정도의 의미로밖에 읽혀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상의 경우처럼 접속사를 빠뜨리거나, 원문과 다른 의미로 오역하는 상황이 만약 중요한 교리의 근거가 되는 성경 본문에서 발생되었다면 문제는 대단히 심각해진다. 왜냐하면 오역된 성경 본문을 근거로, 그러나 성경 원문에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와는 전혀 다른 이단적인 주장을 하면서도, 번역 성경에 있기 때문에 자신이 이단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런 심각한 상황이 오역된 고전14:1-4을 중심으로 오순절주의자들의 방언에서 광범위하게 연출되고 있다.

한글 성경에서는 고전14:1-4의 원문에 있는 원인과 이유를 나타내는 “ga.r”(가르) 접속사를 빠뜨려버리고, 또 역접 기능의 접속사 “de.”(데)를 순접 기능의 접속사인 “그리고”로 잘못 번역함으로써, 바울이 경고하려는 거짓 방언이 졸지에 성령의 은사로 둔갑해 버리고 말았다. 따라서 1906년 LA 아주사 거리에서 시작된 거짓 방언으로 인한 사탄의 거짓 부흥 역사 이후 지금까지 오순절주의와 신사도주의를 비롯한 많은 불건전한 종교 집단들이 고전14:1-4의 오역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은사로 둔갑해버린 거짓 방언을 성령의 은사라고 자랑하면서, 사탄의 역사를 성령의 역사로 믿고 때로는 광란에 가까운 방언을 하고 있는 비극이 한국 교회 전반에서 광범위하게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고전14:1-4의 원문에 있는 접속사를 빠뜨리거나 오역한 한글 성경에서 거짓 방언이 성령의 은사로 둔갑해버린 비극의 현장을 살펴보자(살피기에 앞서 필자가 독자들에게 요청하고 싶은 것은 아래의 글들이 좀 복잡하고 난해할 수 있지만 성경을 펼쳐놓고 필자의 글을 전후를 따져가면서 끝까지 정독하는 것이다).

‘왜냐하면’(ga.r)을 빠뜨리고 ‘그러나’(de.)를 ‘그리고’로 오역함으로, ‘거짓 방언’이 ‘성령의 은사’로 둔갑되었다.
 

먼저 한글 성경(개역 개정)의 고전14:1-3을 살펴보자.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고전14:1-3)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난무하고 있는 거짓 방언을 지적하고 책망하기 전에, 영적으로 어린아이 같이 미숙한 고린도교회의 신자들(고전3:1-2/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에게 자신들이 자랑스럽게 하고 있는 고전14:2의 방언이 거짓 방언임을 깨닫도록, 먼저 고전12장에서 성령의 은사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

고전 12장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성령의 은사의 정의는 “성령이 교회에 은사를 주시는 목적이 교회의 유익을 위함”(고전12:7/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이라는 것과 성령의 은사는 사람이 원하는 대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그의 뜻대로 나누어 주신다는 것”(고전12:11/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등이다. 바울이 고전 12장에서 성령의 은사에 대한 정의를 명백히 밝히고 있는 이유는 고린도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는 고전14:2, 4을 특징으로 하는 방언이 “성령이 교회의 유익을 위해 주시는 은사의 목적”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거짓 방언임을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런 이유로 바울은 고전 12장에서 “성령이 교회에 은사를 주시는 목적이 교회의 유익을 위한 것”임을 말하고 난 뒤에, 고전 13장에서는 성령의 은사를 자기 자신을 위해 쓰려는 이기심으로가 아니라 교회의 유익을 위한 이타심으로 사용하려면, 반드시 교회의 지체들을 향한 사랑이 있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거짓 방언을 지적하기 위해, 고전 12-13장에서 예비 작업을 하고 난 뒤에 고전14:1에서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고린도교회에 명령한다. 그리고 바울은 2-3절에서 왜 고린도교회가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밝힌다. 바울은 2-3절이 1절의 이유를 밝히기 위한 것이므로 원문에서 2절을 “왜냐하면”(ga.r/가르)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글 번역 성경은 “왜냐하면”(ga.r/가르)을 빠뜨림으로써 원문의 의미를 심각하게 왜곡시켜 버렸다(다행스럽게 영어성경에서는 “ga.r”를 “for”로 제대로 번역했다). 이렇게 왜곡된 성경 본문을 근거로 오순절주의자들은 거짓 방언을 성령의 은사로 둔갑시켜 버렸다.

원문에서 바울이 말한 “ga.r”(가르/왜냐하면)를 생략해 버리면, 마치 2절이 정상적인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을 바울이 설명하는 것처럼 왜곡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원문의 의미가 왜곡된 한글 성경의 2절(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은 오순절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바울이 성령의 은사로서의 “영음 방언”을 설명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바울은 2절에 언급된 방언이 고전 12장에서 말한 “성령이 교회에 은사를 주시는 목적이 교회의 유익을 위함”이라는 성령의 은사의 정의에 위배되므로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이 아닌 거짓 방언임을 말하고 있다.

바울은 왜 고전 14장을 시작하면서 고린도교회를 향해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명령하고 있는가? -여기서 바울이 강조한 ‘예언’은 고린도교회의 현지인 신자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계시)을 말한다. 성령의 은사로서의 외국어 방언은 고린도 시를 방문했다가 어쩌다가 고린도교회의 예배에 들어온 외국인들(주로 청녀를 찾아 다녔던 외극인 뱃사람들이다)에게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들려주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때 예배에 참석한 현지인 신자들도 외국인들에게 들려주는 방언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을 수 있도록 통역의 은사도 주어졌던 것이다. - 바울이 고전 14장을 시작하면서 대뜸 고린도교회에 예언을 강조하는 까닭은, 어린아이 같은 수준의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믿음의 성장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예언)을 듣는 것임을 바울이 간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 당시 고린도교회의 사정은 그렇게 녹녹치 않았다. 왜냐하면 영적으로 유치한 어린아이의 수준답게 고린도교회 신자들은 ‘예언’으로 듣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싫어했으며 반대로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그래서 보기에는 자신이 대단히 신령해 보이기는 하지만 자신들에게도 교회의 다른 지체들에게도 전혀 유익이 되지 않는 거짓 방언에 푹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런 고린도교회에 꼭 필요한 것이 자신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임을 간파하고, 그들에게 “특별히 예언하려고 하라”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예언’이 왜 특별히 필요한 것인지를 “ga.r”(왜냐하면)로 시작하는 2-3절에서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한글 성경에서는 2절에서 마침표를 찍음으로써, 2절과 3절을 다른 문장처럼 단절시켰다. 그리고 3절과 4절은 마치 한 문장인 것처럼 연결해서 번역했다. 그러나 원문에서는 “ga.r”로 시작하는 2-3절이 주절인 1절의 종속절이며, 오히려 4절이 2-3절을 요약한 독립절이다. 바울은 2-3절의 내용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고린도교회의 잘못된 거짓 방언에 대하여 앞으로 길게 말하기 전에 2-3절을 다시 한 번 강조하기 위한 것이 4절이라는 사실이다).

바울은 2-3절에서 고린도교회가 “특별히 예언을 해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1절: 특별히 예언하려고 하라

2절: 왜냐하면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기 때문이며, 다시 말하면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않으므로 교회에 유익을 주지 못하는 거짓 방언을 말하기 때문이며,

3절: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예언하는 자는 예언으로 교회의 유익을 주므로 이 예언은 성령의 은사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2절과 3절을 ‘그리고’와 ‘그러나’ 중 어떤 접속사로 연결하느냐에 따라서 그 뜻이 전혀 달라진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미 고전 12장에서 성령이 교회에 은사를 주신 목적이 ‘개인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 아니라 ‘교회의 유익을 위함’임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전 12장의 성령의 은사의 정의를 전제하고 본다면 ‘A는 B이다. 그리고 C는 D이다’와 ‘A는 B이다. 그러나 C는 D이다’의 의미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커진다. 전자처럼 두 문장을 접속사 ‘그리고’로 연결하면 두 문장 모두를 앞의 전제(성령이 교회에 은사를 주신 목적이 교회의 유익을 위함)에 상응하는 긍정적인 것이 되지만, 후자처럼 ‘그러나’로 연결하면 두 문장 중 어느 하나는 앞의 전제(성령이 교회에 은사를 주신 목적이 교회의 유익을 위함)에 어긋나는 부정정적인 것이 된다.

그러므로 ‘그리고’로 연결하면, ‘A는 B이다’와 ‘C는 D이다’는 둘 다 성령의 은사에 대한 긍정적인 설명이 되지만, ‘그러나’로 연결하면, ‘A는 B이다’와 ‘C는 D이다’의 둘 중 어느 하나는 앞의 전제(성령이 교회에 은사를 주신 목적이 교회의 유익을 위함)와는 상치되는 부정적인 설명이 된다. 그렇다면 바울은 ‘그러나’로 연결된 앞과 뒤, 즉 방언을 말하는 자와 예언하는 자에 대한 언급 중 어느 것을 긍정하고 어느 것을 부정하고 있는가? 그것은 고전 12장에서 밝힌 성령이 교회에 은사를 주신 목적에 비추어 보면, 바울은 3절의 예언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은사이므로 성령의 은사가 맞다고 긍정하고 있고, 반면에 2절의 방언은 사람에게 유익을 주기는커녕 사람이 알아들을 수조차 없는 것이므로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고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또 바울은 거짓 방언이 난무하고 있는 고린도교회에 2-3절의 내용을 바르게 깨닫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하기 때문에 4절에서 다시 한 번 2-3절의 내용, 즉 성령의 은사가 아니기 때문에 교회의 유익을 주지 못하는 거짓 방언과 성령의 은사이기 때문에 교회에 유익을 주는 예언을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고전14:4)

그러나 위에서 보듯이 한글 성경에서는 불행하게도 원문의 “de.”(그러나)를 “그리고”로 오역해 버렸다(영어 성경에서는 “de.”를 “but”으로 제대로 번역했다). 이런 오역이 바울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가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와 더불어 마치 정상적인 은사를 설명하는 것처럼 되고 만 것이다.

앞에서 강조했듯이 어떤 것을 설명하는 문장에서 “A and B”와 “A but B”는 그 의미가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다르다. 왜냐하면 “A and B”는 ‘A’와 ‘B’가 동류임을 나타내지만 “A but B”는 ‘A’와 ‘B’가 서로 다름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A but B”는 ‘A’와 ‘B’ 중 하나를 부정적으로 나타내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4절에서 개인의 덕을 세운다는 방언과 교회의 덕을 세운다는 예언을 연결할 때 순접 기능의 접속사 “kai.”(그리고)로 연결하지 않고 역접 기능의 접속사 “de.”(그러나)로 연결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고전12장에서 바울이 제시한 성령의 은사의 정의를 염두에 둔다면 바울이 “그리고”가 아니라 “그러나”로 연결한 이유를 쉽게 알 수 있다.

성령의 은사는 교회의 유익을 주는데 사용하도록 성령이 주신 것이다. 그러나 고린도교회에 난무하고 있는 고전14:2, 4의 방언은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으므로 교회의 유익을 주지 못하며 개인의 덕을 위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방언은 성령이 교회에 은사를 주신 목적과는 다르게 사용되고 있는 거짓 은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예언은 3절에서처럼 사람에게 말하여 교회의 유익을 위한다. 그러므로 이 예언은 성령이 교회에 은사를 주신 목적에 맞게 사용되고 있는 성령의 은사가 틀림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순절주의자들은 고전14:2,4의 거짓 방언을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이라고 우기고 있는 것이다.
 

글을 마치며

바울은 고전14:2-4에서 고린도교회의 거짓 방언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즉 개인의 유익을 위한다는 거짓 방언(고전14:2, 4)과 교회의 유익을 위해 사용되고 있는 진짜 성령의 은사인 예언(고전14:3)과 서로 비교함으로써, 어느 것이 진짜 성령의 은사인가를 고린도교회에 묻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고전14:4이 정상적인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과 정상적인 성령의 은사로서의 예언에 대한 바울의 설명이라면,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운다. 그리고(kai./카이)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운다”로 표현해야 자연스럽다. 그럼에도 바울이 순접 기능의 접속사 “kai”(카이)가 아니라 역접 기능의 접속사 “de”(데)를 사용한 까닭은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가 “예언하는 자는 교회에 덕을 세우나니”와 반대되는, 즉 고전 12장에서 언급한 성령의 은사의 정의와는 상충되는 거짓 은사임을 설명하기 위함이었다.

이 사실을 조금 더 쉽게 이해하기를 원한다면 아래의 이야기를 보라.

어떤 반에서 담임선생님이 영수에게는 사과(예언의 은사)를, 철수에게는 토마토(방언의 은사)를 주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너희는 가서 선생님이 나누어 준 과일을 가장 연약한 반 친구에게 주어라.”(고전12:7/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런데 선생님 심부름을 제대로 잘 하려면 친구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단다.”(고전13장)

영수는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순희에게 그 사과(예언)를 주었고, 철수는 집에 가서 그 토마토(방언)를 혼자 먹어 버렸다.

담임선생님은 영수와 철수가 한 일을 놓고, 반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철수는 선생님이 준 토마토(방언)를 집에 가서 혼자 먹었다. 그러나 영수는 선생님이 준 사과(예언)를 순희에게 주었다."(고전14:4)

우리는 선생님의 마지막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사과는 친구에게 주어야 하는 과일이고, 토마토는 자기 혼자 먹어도 되는 과일이다”로 이해해야 할까? 아니면 “영수는 선생님 말씀대로 잘 순종했지만 철수는 그렇지 않았다.”로 이해해야 할까? 여기서 어느 것이 바른 해석인지를 묻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그런데도 오순절주의자들은 왜 사과(예언)는 친구에게 주어야 하는 과일이지만, 토마토(방언)는 자기 혼자 먹어도 되는 과일이라고 우기는 것일까? 도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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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