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이 믿음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 안에서 영원히 사는 하나님 백성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에덴동산의 생명나무는 아담이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을 버리지 않으면 영원히 살면서 하나님의 복락을 누리게 하신다는 처음의 언약의 상징었습니다.

에덴동산에는 또 다른 나무 선악과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하나님 섬기는 믿음을 버리고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기로 결단하면 회개도 용납되지 않는 영원한 저주와 죽음의 형벌에 처해진다는 것을 충분히 경고하셨습니다. 아담이 하나님 섬김을 배반하기로 결정하는 것이 선악과를 범하는 것으로 표현되게 하였습니다.

생명나무와 선악과는 하나님의 처음의 언약의 상징들이었습니다. 아담은 날마다 믿음으로 살면서 생명나무를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홍수의 공포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노아에게 다시 홍수로 심판하는 일은 없고, 인간이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실 것임을 언약하실 때, 하나님은 하늘의 무지개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무지개를 자기의 언약의 표시로 삼으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담은 믿음으로 살면 영원히 하나님의 복락을 누리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언약의 표시였던 생명나무를 매일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선악과는 아담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할 때, 곧 영원히 하나님 백성으로 남기로 한 언약을 파기하는 표시였습니다. 그로 인해 아담은 죽음 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에 처해졌습니다. 그때 우리 모두도 아담 안에서 같은 죄악을 범하여 같은 심판에 처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즉시 아담을 처형하시고 흙으로 다른 아담을 만들어 자기 백성으로 삼고 또 다시 언약을 체결하셨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아담을 영원히 자기 백성으로 삼기로 언약하셨으므로 하나님은 그 언약을 끝내 이루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아담을 즉시 처형하지 않으시고 다시 회복하여 내실 방법을 고안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시 5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타락한 사람과 피조세계 안에서는 아담을 다시 하나님 백성으로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이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죄가 모든 사람의 본성이 되어 버렸습니다. 스스로의 힘과 지성으로 구원을 위해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친히 사람이 되시어 아담의 죄를 다시 돌이시키려고 작정하셨습니다. 죄와 무관한 사람으로 오시어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없는 것처럼 만드는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작정하셨습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 죄와 무관한 사람을 지으시고, 하나님(성자)께서 자기의 인격을 그 사람에게 연합시키시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이었습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아담과 우리를 장차 오시어 대신 죄 값으로 죽으실 하나님의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백성으로 택하셨습니다.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씻어지게 하시려는 작정 안에서 우리를 자기 백성으로 택하신 것입니다. 영원히 저주 받은 타락한 아담도 자기의 구원을 위해 장차 오시어 죄 값으로 죽으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타락한 인간들을 다시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먼저 장차 죄 값으로 대신 죽으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을 주셨습니다. 구약의 안식일, 할례, 각종의 제사들과 음식규례들을 비롯한 많은 계명들을 지키라고 명하셨습니다. 장차 오시어 죄 값으로 대신 죽으실 그리스도를 예시하는 것들 안에서 하나님을 믿게 하신 것입니다. 특히 율법을 지키는 것을 매우 중요한 것으로 강조하셨습니다.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한 명령과 율법을 행하야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계명을 지켜 그에게 친근히 하고 너희의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그를 섬길찌니라.”(수 22:5)

지금도 어떤 사람들은 구약의 율법이 하나님의 구원의 수단이라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결코 율법은 구원을 주는 수단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은 이미 은혜로 구원 받은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특별계시였습니다.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롬 4:15)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롬 5:13)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롬 5:20)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율법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사람에게도 원죄와 모든 자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여전히 있음을 천명했습니다. 죄인이 구원을 받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지 죄가 없어 구원받은 것이 아님을 율법은 끝까지 지적하였습니다. 율법의 이 두 가지 기능, 1)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방법 계시, 2)구원 받은 사람도 여전히 죄인이므로 죄 값을 지불해야만 한다는 사실 계시는 결국 죄 없으신 그리스도의 대신 죽으심을 요구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구약의 불완전한 인간 대제사장들은 짐승의 속죄의 피를 반복하여 드렸으나 영원한 속죄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제사는 십자가에서 드려질 그리스도의 영원한 속죄의 제사에 대한 상징이었습니다. 사람이 되시어 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자기의 몸과 피를 영원하고 완전한 속죄의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구약의 대제사장들이 짐승의 피로 이루지 못한 영원한 죄 용서를 단 번에 이루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

죄와 무관하게 출생하신 완전히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피로 모든 택하신 죄인들의 죄 값을 대신 치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만년이 지나도 죄인을 용납하지 않으신다고 계시하신 율법의 요구들과 저주들을 그리스도가 대신 죽으심으로 철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

이제 대신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율법의 저주와 하나님의 진노가 다시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 값으로 피를 흘리고 죽으심으로 율법의 마침이 되셨고,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무셨기 때문입니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바른믿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