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혁 교수의 '언약신학' 2장 : 윌리엄 퍼킨스 부분에 대한 두 번째 소감

안상혁 교수(합신, 교회사)의 저서 <언약신학>을 독서하는 이유는 하나이다. 잉글랜드 청교도들의 신앙이 기독교에 해를 미치고 있고, 특히 그들의 개혁운동의 출발점인 행위계약 사상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현저하게 훼손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안 교수의 책  2장의 윌리엄 퍼킨스에 관한 부분에 관한 두 번째 소감이다. 

“과연 예정론에 대안으로서 언약 신학이 등장하였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메키논은 매우 긍정적이다. 주지하다시피 그는 밀러와 켄달의 논의를 적극 수용하며 청교도의 언약 신학이 칼뱅의 작정 신학에 대한 대안으로서 등장했다고 확신한다.”(안 교수의 말/ 110 페이지)

안 교수는 청교도의 언약 신학이 칼빈의 예정론에 대한 대안으로서 등장했다는 메키논의 말을 소개했다. 메키논이 미국의 초기 역사 연구를 위해 뉴잉글랜드에서 만개한 청교도 신학과 칼빈의 신학을 비교 연구한 역사학자 패리 밀러와 대표적인 청교도 신학 추종자 영국 회중교회의 목사 로이드 존스의 후임자였던 로버트 켄달의 주장을 수용했다고 했다. 그것은 곧 메키논이 칼빈의 신학과 청교도 신학의 불연속성을 주장했다는 의미이다.

필자는 이미 청교도의 아버지 윌리엄 퍼킨스가 본격적으로 도입한 행위계약 사상으로 말미암아 종교개혁으로 세워진 성경적 신앙이 다시 비틀어졌고, 또한 칼빈의 성경적인 신학(예정론)도 약화되었다는 사실을 여러 번 지적했다. 퍼킨스가 행위계약을 도입하여 새로운 시도를 했던 이유는 그 당시의 군주 엘리자베스 여왕의 박해로 인해 부득이 잉글랜드 국민들이 스스로 자기의 종교를 개혁하게 만드는 개혁 운동의 전략을 다시 수립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퍼킨스는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을 강조하는 칼빈의 예정 신학을 그대로 수용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각 사람이 자기의 구원을 위해 스스로 몸부림치면서 잉글랜드 종교 개혁의 추진자들이 되게 만드는데 칼빈의 신학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청교도의 언약 신학이 칼뱅의 작정 신학에 대한 대안으로서 등장했다.”(안 교수가 소개한 메키논의 말)

메키논의 이 말은 필자가 이미 여러 번 강조한 것과 정확하게 같은 내용이다. 신학이 일천하고 학벌이 미천하여 어디에 이름을 내 놓을 처지가 되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도 척하고 알아보는 것을 왜 한국에서 내 놓으라는 유수한 대학을 나오고 미국에서 손꼽히는 좋은 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얻은 사람들이 이것을 일찍 보지 못하였는지 의아하다.

“제렛에 따르면 언약 신학은 크게 일방적 언약 신학과 양방적 언약 신학으로 나뉘는데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만을 강조하는 칼뱅의 언약 신학이 전자의 전통이라면, 조건적인 언약을 강조하는 청교도의 언약 신학은 후자의 전통에 속한다.”(안 교수의 말/ 110 페이지)

안 교수는 제렛의 주장을 간접 인용하면서, 칼빈의 언약 신학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를 강조하고, 청교도 운동의 언약 신학은 하나님과 사람의 쌍방적 역할을 강조하는 신학이라고 설명했다. 안 교수에게서 청교도 언약 신학에 대한 경계심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위험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청교도 언약 신학이 구원을 위해 사람과 하나님의 쌍방적 역할을 주장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개혁신학에서 매우 경계하는 펠라기우스의 구원론, 알미니우스의 구원론, 그리고 천주교의 구원론과 같은 내용이 청교도 언약 신학에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예사롭게 넘길 일이 아니다. 청교도 언약 신학이 펠라기우스의 신학, 알미니안 신학, 천주교 신학과 같은 내용을 함의하고 있다면, 장로교 신학교의 선생인 안 교수로서는 가차 없이 청교도 언약 사상을 비판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안 교수는 장로교단의 목사로서, 그리고 장로교 신학교의 교수로서 정체성이 의심받아야만 한다. 그러나 안 교수는 청교도 언약 신학에 대해 시종일관 비판하는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안 교수 자신이 분별을 못하거나, 아니면 펠라기우스의 구원론, 알미니우스의 구원론, 그리고 천주교의 구원론에 일면 동의한다는 것이다. 가벼이 넘길 일이 아니다.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성경은 하나님이 창세전에 택하신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역사 속에서 택자를 그리스도의 복음 앞으로 인도하신다고 한다. 그리고 성령께서 불가항력적 은혜를 베푸시어 택하신 사람이 즐거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게 하신다고 한다. 택하신 사람에게 성령의 역사를 따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고백이 일어나면, 그것을 근거로 의롭다고 선언하시고 영원한 구원을 주신다고 한다. 동시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적용하시는 성령의 사역으로 그 사람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하는 일평생의 성화를 이루어 가게 하신다고 가르친다.

칼빈의 예정 신학이 가르치는 내용도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칼빈을 맹목적으로 개혁신학의 아버지로 존경하지 않는다. 그의 신학이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구원에 관하여 사람이 수행해야 할 조건이나 의무라고 할 것이 일체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사람은 자기의 구원에 대해 1도 기여하지 못한다. 칼빈의 개혁신학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고, 은혜의 시작은 창세전의 택하심이다.

퍼킨스는 칼빈의 올바른 신학이 잉글랜드 국민들이 스스로 자기의 구원을 위해 몸부림치면서 종교개혁을 이루어가는 주체가 되게 만들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예정과 불가항력적 은혜를 강조하는 칼빈의 신학은 국민들을 더 나태하게 만들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이 구원을 위해 쌍방적인 역할과 의무를 강조하는 새로운 신학 패러다임을 구축하였다. 그것이 바로 아담이 영생과 무관하게 창조되어 율법을 완전하게 지켜 스스로의 힘으로 영생을 회득했어야 했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행위계약이다.

그래서 청교도 운동이 자리 잡고 깊어질수록 성경이 무너지고, 칼빈의 성경적인 신학도 약화되었다. 청교도 운동이 만개하는 곳에서 칼빈의 <기독교강요>가 중시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책들에서 <기독교강요>의 흔적은 찾을 수 있는지 연구해 보기 바란다. 존 오웬이 <기독교강요>를 깊이 읽은 흔적이 나오는지 찾아보기 바란다. 청교도 신학과 칼빈주의 신학이 같은 신학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영적인 마약에 취하여 판단력이 실종된 사람들이다.

“퍼킨스는 하나님의 언약을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해 사람과 맺은 계약으로서 특정한 조건에 기초한다.’라고 정의한다. 곧이어 퍼킨스는 언약의 두 부분, 곧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의 조건을 이행하는 것과 관련한) 인간의 의무로 구성되어 있다고 설명한다.”(안 교수의 말/ 111 페이지)

안 교수가 퍼킨스의 언약 신학을 이와 같이 소개하면서 전혀 비판의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일이다. 하나님이 구원을 베푸실 때, 사람이 하나님에게 보이는 ‘특정한 조건’에 기초하여 구원을 주신다는 퍼킨스의 사상은 매우 비성경적이고, 성경을 파괴하는 이단적인 가르침이다. 구원 얻기에 적합한 조건을 보이는 자에게 하나님이 구원을 주신다는 가르침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 6:44)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요 6:45)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7)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 6:44)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성경은 구원의 원인이 오직 믿음이라고 한다. 사람이 믿음을 가지는 원인은 하나님의 택하심과 불가항력적 은혜 때문이라고 한다. 성경 어디에도 안 교수가 추종하는 퍼킨스의 언약 사상, 즉 사람이 구원에 합당한 조건을 보이므로 하나님이 구원을 주신다는 내용은 나타나지 않는다.

“언약은 다음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께 대한 사람의 약속이 그것이다. 사람에 대해 만일 사람이 언약의 조건을 수행할 경우 하나님은 친히 그 사람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약속하심으로 자신을 스스로 묶으신다. 한편 사람 역시 주님에 대해 충성을 서약하며 또한 언약의 조건을 수행할 것을 약속한다.”(안 교수가 인용한 퍼킨스의 말/ 111 페이지)

안 교수는 이와 같이 위험한 퍼킨스의 주장에 대해 조금도 반박의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언약의 조건을 수행할 경우에 하나님이 그 사람의 하나님이 되시고, 사람 또한 하나님께 언약의 조건을 수행하겠다고 약속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사람 사이의 대등한 입장의 계약이다. 성경 어디에 구원을 위해 하나님과 사람의 대등한 위치에서의 계약한다는 가르침이 나오는가?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할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하려 하사”(롬 9:11)

하나님이 야곱에게 찾아가서 구원을 위한 상호간의 역할과 의무에 대한 대화를 나누시고 구원 계약을 체결했었는가? 야곱이 리브가의 태중에서 작은 세포로 자라지도 않았을 때, 이미 하나님은 야곱을 택하셨다고 성경을 말씀한다. 타락한 아담의 자손으로 태어나는 그 어떤 사람이 자신의 구원을 위한 무슨 역할이나 조건을 하나님께 보일 수 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구원을 위한 조건을 보이기는커녕 구원에 대한 일점의 의식도 가질 수 없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각기 물러나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죄악을 행하는 자는 무지하뇨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하는도다.”(시 53:2-4)

성경은 모든 사람은 죽은 상태로 태어나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으면 모든 사람은 죽은 상태로 아무 불편 없이 살다가 결국 영원한 죽음으로 들어간다고 가르친다. 성경 어디에도 사람이 자기 구원에 대한 지각을 가지는 경우가 있다고 가르치는 내용이 없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나의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시 89:3)

성경은 하나님이 구원 언약을 사람에게 설명하여 구원을 위해 조건이나 역할을 하겠다고 동의하는 사람에게 주어진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노아처럼 자기 백성으로 택하신 사람에게 오직 은혜를 따라 일방적으로 언약을 주신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식언치 않으시는 하나님은 택하신 자에게 일방적으로 언약을 주심으로 그 사람이 영원히 하나님 백성되게 하려고 자신에게 의무를 지우시는 것이다.

“언약을 맺는 데 있어서 언약 당사자들의 상호 동의가 반드시 필요하다. 하나님 편에선 약속이 주어지고 또한 사람 편에서의 동의가 요구된다. 그렇지 않으면 언약은 성사되지 않는다.”(안 교수가 인용한 퍼킨스의 말/ 112 페이지)

안 교수는 퍼킨스의 이런 심각한 말에 대해 전혀 거부감을 표시하지 않았다. 어찌 장로교 신학교의 교수가 이럴 수가 있는가? 이것은 안 교수의 장로교 신학교의 교수 사역에 대한 적합성의 문제이다. 하나님께서 그 누구에게도 하나님 백성이 될 의향이 있는지 물으신 적이 없다. 그 누구에게도 구원 받고 싶은 의향이 있는지 타진하지 않으셨다. 구원 받기를 원한다고 간절히 메달리는 사람도 없었고,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은 그에게 무엇을 하라는 조건을 제시하는 분이 아니다. 지금 안 교수는 퍼킨스를 통해 기독교 신앙과 교리의 근본을 흔들고 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아브라함과 어떤 유형의 Deal(거래)을 시도하지 않았다. 단지 창세전의 택하심을 따라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뜻대로 명하셨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그 말씀을 거부하려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의 그 말씀에 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뜨거워졌다. 왜 그랬을까?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실제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부르실 때, 믿고 순종하게 만드시는 불가항력적 은혜가 함께 역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후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위해 행한 모든 것은 구원을 위한 그의 조건이나 공로가 아니었다. 그에게 임한 하나님이 은혜가 열매를 맺은 것이었다.
 

맺는 말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욕보이고 십자가를 모욕하는 책이 나와도 아무도 지적하고 책망하지 않는 것이 지금 한국 교회의 실정이다. 각자 소견대로 믿는다. 이제 한국 교회에 소망이 없다. 한국 교회에 참다운 선생이 없고 스승도 없다.

이승구 교수 같은 분이라면 목회자들이 바른 신학을 알도록 바르게 지적하고 조언을 주어야 할 것인데, 오히려 한수 더 뜨려고 한다. 안 교수의 이 책에 대해 필자가 어쩔 수 없이 비판하는 글을 시작할 때, 일부 경솔한 사람들이 안 교수의 책을 칭송하는 글을 게시하니, 이승구 교수가 그곳에 찾아가서 “정말 좋은 책입니다”라고 동조했다고 어떤 이가 사진을 찍어 보내주었다. 다 함께 망하자고 이리 노력하고 애쓰면, 달리 무슨 수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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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