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모 목사의 옥성호의 [야고보를 찾아서] 비판(4)

글을 시작하며

옥성호는 [할례 논쟁]에서 “나도 그런 사람들 중에 하나였다. 수십 년간 바울 서신서를 읽었으면서도 그 갈등을 전혀 보지 못했다”(p.50)고 스스로를 평한다. 이것은 그가 [들어가는 말]에서 자신이 쓴 책의 내용이 “성경을 수십 번 읽고 필사를 여러 번 한 기독교인이라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내용일 수 있다”(p.9)고 말하면서 다른 이들을 평한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을 아무리 많이 읽고, 아무리 많이 필사했다할지라도, 또 설령 수십 년간 바울 서신서를 열심히 읽었다할지라도 충분한 신학(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도구들을 습득하는 학문) 훈련이 없었다면 거의 대부분은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바울 서신서들은 편지이므로 1세기 당시의 수신자들이 그것을 읽고 이해하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1세기의 편지를 21세기의 사람들이 읽을 때에는 전혀 상황이 달라진다. 왜냐하면 바울 서신서들은 1세기 헬라 문화권의 사람들에게 당시의 삶의 정황을 배경으로, 지금은 사어(死語)가 된 고대 코이네 헬라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전문적인 신학 훈련 없이 바울 서신서들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전문적인 신학 훈련을 체계적으로 받은 적이 없는 옥성호는 [할례 논쟁]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한다.

“지금부터 살펴볼 내용은 조금 전 가말리엘을 분석할 때처럼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본문 속에 워낙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독교인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내용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교회가 철저하게 감추기 때문이다. 아니, 이건 교회가 감춘다고는 할 수 없다. 오늘날 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들도 열에 아홉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부터 우리가 알아보려는 내용에는 ‘비밀’이라는 단어를 붙여도 될 정도이다. 지난 이천 년간 기독교 내에서 은밀하고도 집요하게 은폐되었던 비밀은 이제야 비로소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예수의 제자들과 바울 사이에 있었던,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의 깊은 갈등이 바로 그것이다.”(p.49)

옥성호는 그 동안 “수십 년간 바울 서신서를 읽었으면서도 그 갈등을 전혀 보지 못했”지만 이제는 뭔가 비밀을 좀 알았다는 듯이 말한다. 그가 좀 알아낸 비밀은 이전까지 교회가 은폐했거나 전혀 알지 못했던 “예수의 제자들과 바울 사이에 있었던,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의 깊은 갈등”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오늘날 교회에서는 예수의 제자들과 바울이 하나 되어 각각 유대인과 이방인을 위해 사이좋게 사역했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런 ‘선입관’이 기독교 안에는 워낙 깊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갈라디아서 1장 속에 노골적으로 드러난 바울의 감정조차도 전혀 읽히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p.50)라고 말하면서 신학 훈련을 재대로 받지 않은 옥성호가 오늘날 교회들의 신학적인 무지를 질타하며 긴 한숨을 내쉰다.

그가 이렇게 긴 한숨을 내 쉰 까닭은 아마도 그 동안 유대교 신학자들과 역사적인 예수 연구자들 등의 책 몇 권을 읽으면서 신학공부를 나름대로 좀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옥성호의 긴 한숨은 과연 믿어도 될 만큼 타탕한 것일까?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 본문을 평가하고 비판할 수 있는 신학적인 능력은 책 몇 권 읽고, 몇 년 동안 고민했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야구에 깊은 관심이 생긴 어떤 사람이 야구에 관한 책 몇 권 열심히 읽고, 동네 야구 몇 년 열심히 했다고 해서 프로 야구 선수가 될 수 없는 것과 같다. 물론 성경을 읽고 이해하고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 신앙생활은 얼마간의 신앙 훈련이면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야고보를 찾아서], [신의 변명], [부활, 역사인가 믿음인가] 등에서 다루고 있는 성경의 내용들은 “수십 년간 바울 서신서를 읽었으면서도 그 갈등을 전혀 보지 못했”을 정도의 자질을 가진 옥성호가 몇 권의 신학 서적을 읽고, 몇 년 동안 고민한 정도의 신학 내공으로 다룰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그래서 옥성호의 책들을 읽노라면, 마치 구구단의 산수 실력을 가진 초등학생이 고등수학의 미적분을 비판하는 것처럼 어색하기 짝이 없다.

옥성호는 엄청난 성경(신학)적인 주제들을 다루면서, 그러나 그것을 제대로 비판할 능력은 모자라므로 억지를 부리고, 궤변을 늘어놓고, 거기에다 자신의 주장이 fact인 것처럼 독자들을 속이기 위하여 여러 가지 교활한 fake까지 동원한다. 옥성호는 마치 자신이 최초로 대단한 것을 발견하고 문제 삼고 있는 것처럼 우쭐함까지 슬쩍 드러내지만, 해 아래 새 것이 없듯이 그의 주장에는 새로운 것이 전혀 없으며, 그러므로 놀랄 것도 전혀 없다. 왜냐하면 옥성호가 문제 삼고 있는 것들은 오랫동안 기독교를 공격해 왔던 유대교 신학자들과 역사적인 예수 연구가들이 줄기차게 문제 삼아왔던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대교 신학자들과 역사적인 예수 연구가들은 그래도 조심스럽게 신약성경을 비판하면서 바울과 예수를 문제 삼고 있는 반면에, 옥성호는 그들보다 훨씬 더 무례하게 성경을 왜곡하고, 막무가내 식으로 좌충우돌하면서, 생각나는 대로 무책임하게 떠들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들보다 훨씬 더 악의적일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런 이유 때문에 일반 독자들에게는 오히려 옥성호의 주장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으며, 파괴력이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그의 책들은 버려진 쓰레기들보다도 더 쓸모가 없으며 위험하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쓰레기들은 잘 살펴보면 그래도 재활용할 것들이 더러 있지만, 그의 책들은 영혼이 오염당한 자가 다른 영혼을 오염시키기 위해 쓴 것들이기 때문에 전혀 쓸모없음을 물론이고, 대단히 위험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필자가 성경에 근거하여 비판하는 글들을 정독한다면 어렵지 않게 옥성호의 어처구니없는, 그러나 위험하기 짝이 없는 무지한 궤변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가말리엘]에서 ‘어처구니없는 독선으로 일관된, 그의 무지한 궤변을 보았듯이, 이런 어처구니없는 궤변들은 [할례 논쟁]에서도 넘쳐난다. 이제부터 전혀 fact가 아닌 fake로 일관된 옥성호의 [할례 논쟁]의 껍데기를 하나하나 벗겨 보자.
 

바울이 할례(율법)을 경멸했다는 옥성호의 주장은 성경이 말하는 fact인가?

옥성호는 [할례 논쟁]에서 예수의 제자들과 바울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있었다는 왜곡된 주장으로, 바울과 예수의 제자들 사이에 건널 수 없는 불화의 강을 만들려고 한다. 왜냐하면 그래야지 바울과 예수 사이에 불연속선이 성립되어서 바울 서신서의 기록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상관없는 것이 되며, 그렇게 되면 기독교는 바울이 독창적으로 만들어낸 종교라는 자신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옥성호는 빌3:2(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1)과 갈5:12(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을 근거로 바울이 예수의 제자들을 경멸했다고 단호하게 주장한다(p.52-53). 여기서 옥성호는 고전13장까지 언급하면서 바울이 이렇게 사랑을 강조한 자인데, 어떻게 자신의 이웃이라고 할 수 있는 유대인들에게 빌3:2과 갈5:12에서처럼 충격적이고 잔인하기까지 한 말을 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이렇게 심한 말을 한 것은 바울이 할례 받은 유대인들을 얼마나 경멸했는가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한다.

그러고 나서 옥성호는 그의 나쁜 버릇대로 “많은 기독교인에게는 충격이겠지만 바울이 ‘개’라고 지칭한 사람들은 다름 아닌 예수의 제자들이었다. 바울이 당장에라도 거세해서 환관, 고자로 만들어 버리고 싶었던 사람들은 다름 아닌 예수의 제자들이었다.”(p.54)라는 어이없는 결론을 내린다. 그의 어이없는 결론의 근거는 “그들은 다름 아닌 예루살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바울에게서 그들은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었고, 거짓 할례를 받은 사람들이었다.”(p.55) 이다. 즉 바울이 경멸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들이었기 때문에 바울이 경멸한 대상은 결국 예수의 제자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터무니없는 궤변이다(옥성호는 자신의 주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책 전반에서 이런 터무니없는 궤변을 수시로 동원한다). 그 이유를 하나하나 따져보자.

빌3:2의 “개들을 삼가라”에서, 바울이 “개”라고 지칭한 자들은 어디로부터 빌립보 교회로 들어온 자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전한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을 훼손하는 유대(율법)주의자들이라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에게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들이라는 언급은 성경 어디에도 없으며, 하물며 암시조차도 없다. 따라서 옥성호가 이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에게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단정은 아무런 근거 없는 거짓말이며, 소설을 쓰던 그의 나쁜 버릇에서 비롯된 상상에 불과하다.

또 갈5:12의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에서 바울이 냉소적인 말로 거세를 제안한 자들도 옥성호의 주장대로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에게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들이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빌3:2의 “개들을 삼가라”와 마찬가지로 갈5:12의 이들도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에게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들이라는 언급이 성경 어디에도 없으며, 하물며 암시조차도 없기 때문이다. 혹 옥성호가 바울이 안디옥에 있을 때 게바의 외식을 책망한 사건을 유발시킨 자들이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갈2:12)라는 것을 근거로 바울이 거세를 제안하며 경멸한 자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야고보에게서 온 자들이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섣부른 착각이다. 왜냐하면 안디옥에서의 베드로 외식 책망 사건과 갈5:12의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는 별개의 장소에서 별개의 시간대에 있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옥성호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바울이 ‘거세’를 제안하며 경멸한 자들이 예루살렘의 사도들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들이라고 단정하고는, 그러므로 바울이 그들에게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라는 혐오스러운 말을 거침없이 내뱉은 것은, 바울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예수의 제자들을 혐오하고 경멸했기 때문이라는 억지 주장을 기정사실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p.54).

물론 확률이 희박하기는 하지만 바울이 경멸한 자들이 예루살렘의 사도들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고 해도 바울이 이들을 책망한 것과 예수의 제자들을 경멸한 것을 동일시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억지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설령 이들이 예루살렘의 사도들로부터 보냄을 받았을지라도, 예루살렘의 사도들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말을 하며 다른 짓을 했다면 바울이 얼마든지 그들을 책망할 수 있으며, 또 이런 책망을 근거로 바울이 예루살렘의 사도들을 경멸했다고 단정하는 것은 지나친 넌센스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어떤 이가 잘못을 저지른 어린아이를 책망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그 어린아이의 아버지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고 단정할 수 있는가? 없다! 그럼에도 옥성호는 어떤 이가 어린아이를 책망하는 것은 그 사람이 어린아이의 아버지를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억지를 부리고 있다. 따라서 옥성호가 빌3:2(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과 갈5:12(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을 근거로 “바울과 예수의 제자들 사이에는 지금 우리가 차마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심각한 갈등이 있었고, 그 중심에는 토라 준수, 특히 할례가 있었다.”(p.55)는 옥성호의 주장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그래서 어설프기 짝이 없는 거짓말에 불과하다.

더 나아가 옥성호는 지금까지 궤변을 늘어놓은 심중의 목적대로 “바울 가르침의 핵심은 할례가 필요 없다는 것이다. 당시 바울의 주장은 하나님의 말씀, 토라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말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p.59)라고 결론 내린다. 그러나 이 말은 fact가 아니라 옥성호의 비겁한 fake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할례(율법)가 더 이상 필요 없다고 한 말에는 중요한 전제가 있는데도, 옥성호는 그 전제를 슬쩍 치워버림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바울의 ‘할례 무용론’을 오해하도록 유도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할례(율법)을 무시하거나 경멸한 적이 없다

바울은 어디에서도 결코 아무런 전제 없이 할례(율법)가 쓸모없다고 말한 적이 없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하나님의 율법(할례)을 경멸한 적이 없다는 말이다. 또 바울은 할례가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들에게 필요 없다고 말한 적도 없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는 자들을 경멸한 적이 없다는 말이다. 만약 옥성호의 주장대로 바울이 정말 할례를 경멸했다면, 바울은 아들같이 사랑했던 유대인인 디모데에게 자신이 그토록 경멸했던 할례를 결코 받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행16:3).

바울이 경멸한 것은 하나님의 율법(할례)이 아니라, 유대(율법)주의자들에 의해 잘못 가르쳐진 왜곡된 율법이었다. 바울이 경멸한 것은 할례 받은 유대인들이 아니라, 행15:1(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에서처럼 왜곡된 율법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조건으로 이방인들에게 가르치고 강요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즉 복음을 모독하는 유대(율법)주의자들인 유대인들이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한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온 유대(율법)주의자들은 이방인들에게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 조건으로 할례와 율법 준수를 강요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그의 은혜로 아무런 조건 없이 이방인들에게도 베푸시는 구원의 복음을 모독하는 것이다. 바울이 이방인 디도에게 할례를 베풀지 않은 까닭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갈2:3).

이스라엘의 할례는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처음 명하신 때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자신의 자녀로 삼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브라함을 자신의 자녀로 삼으신 후였다. 또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이방인들을 하나님 나라에 들이실 것을 여러 번 말씀하시면서도 그들에게 할례를 조건으로 내 거신 적은 한 번도 없으셨다. 따라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할례 명령은 하나님의 백성 됨의 표시이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조건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 되는 조건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주의자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조건으로 이방인들에게 할례와 율법 준수를 강요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독하는 무서운 범죄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개라고 지칭했던 것이다. 바울이 빌2:3에서 “개”라고 경멸한 자들은,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구원의 절대 조건으로 가르치는 자들로서, 율법을 귀중하게 여긴다고 말하면서도 자기 자신은 쉽게 율법을 범함으로써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런 바울의 시각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도 나타난다.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롬2:23-24)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롬2:27)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갈6:13)

바울은 이런 자들을 개들이라고 욕했으며, ‘너희가 주장하는 대로 할례가 그토록 대단한 것이라면 너희는 성기 껍질만 자를 것이 아니라 성기를 통째로 잘라버리지 않았느냐’는 냉소적인 말로 그들을 경멸했던 것이다.
 

글을 마치며

다시 말하지만 바울은 유대인인 예수의 제자들을 경멸한 적이 없다. 왜냐하면 바울은 유대인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할례나 율법을 경멸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증거들은 바울 서신서 도처에 널려 있다(이 부분은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다시 언급할 것이다).

생각해 보라! 만약 옥성호의 주장대로 빌3:2이 바울이 단순히 할례(율법)를 경멸한 데서 나온 말이 틀림없다면, 같은 편지 안에 있는 빌2:17(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의 바울의 말은 설명할 방법이 없다. 왜냐하면 바울이 옥성호의 주장대로 정말로 율법을 경멸했다면, 모든 율법의 중심에 있는 희생제사의 그림으로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의 절절한 심정을 표현했을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바울이 율법의 중심에 있는 희생제사의 그림으로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자신의 심정을 절절하게 표현한 것은 그가 얼마나 율법을 귀중하게 여기고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이다.

따라서 옥성호의 [할례 논쟁]은 그의 상상에서 나온 fiction을, 독자들에게 fact인 것처럼 믿게 만들기 위하여 거짓으로 꾸며낸 fake에 불과하다.

---<각 주>---

1) 개정개역의 번역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빌3:2)는 문제가 있다. 차라리 한글개역의 번역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가 원문에 더 가깝다. 참고로 원문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한 새번역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개들을 조심하십시오. 악한 일꾼들을 조심하십시오. 살을 잘라내는 할례를 주장하는 자들을 조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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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