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철 목사. 2019년 앤아버 연합 부활절 예배 때의 모습. 부활절 연합예배를 그리워하면서 ...
정이철 목사. 2019년 앤아버 연합 부활절 예배 때의 모습. 2020 부활절 연합예배를 고대하면서 ... 

 

손기철 장로는 지금 왜 가만히 계실까요? 지금 손기철 장로가 나서서 하던 대로 이렇게 해 보시면 어떨까요?

“코로나 19는 떠날갈지어다!”

대전의 장경동 목사도 솥뚜껑 같은 큰 손으로 안수하고 다니시면 좋겠습니다. 코로나 확진 받고 호흡이 힘들고 고통을 당하는 분들에게 장경동 목사가 치유의 안수를 하시면 좋겠습니다. 왜 어느 때보다 더 필요한 상황인데 가만히 계시는 것일까요?

조용기 목사도 지금 나서서 사람들에게 안수하여 주면 좋겠습니다. 혹시 이제는 너무 연로해져서 더 이상 성령과 함께 하시지 못하시는 것인가요?

자신이 치유의 성령을 부리고 사탄을 결박하는 선포기도의 능력을 가졌다는 사람들이 이전 평화의 시기에는 많은 활약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들의 능력이 더욱 필요하고 빛을 발하게 되는 지금과 같은 전염병의 시대에는 나서지 않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질병들과 마귀의 일반적인 역사에 대해서는 능력이 발휘되지만, 전염병의 때에는 안 되는 것인가요?

그런데 역사를 돌아보면 항상 이랬습니다. 평소에 질병을 고치고 사탄을 제압하는 능력을 발휘하였던 은사주의자들이 정작 자신들의 능력이 꼭 필요한 지금과 같은 상황이 되면 숨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미국의 캐더란 쿨만, 애이미 맥퍼슨, 오랄 로버츠 등과 같은 은사주의 능력자들도 그랬습니다. 남의 병을 고쳐준다고 안수하는 집회를 열었으나, 집회에서 사망자들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자연재해가 일어나서 집회에 참석자들이 다쳐서 죽어갈 때에는 전혀 안수기도 하겠다고 나서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병이 찾아오면 은밀하게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물론 지금도 병을 고치는 하나님의 역사는 있습니다. 야고보서는 우리가 병들었을 때 서로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하는 의로운 성도의 기도에는 역사하는 힘이 더 많다고 했습니다.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 5:16)』

지금 하나님의 자녀들이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지극히 성경적입니다. 그러나 손기철 장로, 장경동, 조용기 목사 등이 남의 병을 고쳐주는 능력이 자기에게 있다고 하면서 안수기도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자신들의 안수 행위가 하나님의 신적인 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안수할 때 하나님이 때를 맞추어서 함께 역사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대리하는 특별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저 사람들이 안수할 때 병이 낳았다면, 하나님이 저 사람들의 안수와 때를 맞추어 역사했다는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하나님과 저 사람들에게 동시에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저 사람들이 하는 일에 맞추어서 일하셨기 때문입니다.

신약의 사도들도 그리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을 신약의 교회설립자로, 특별계시 수납로와 기록자로 쓰셨던 하나님께서 그들이 임의로 원하는 때에 안수하면 하나님 자신이 그때에 맞추어 일하시하겠다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주도권은 100% 하나님께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언제 하나님이 자신들을 통해 초자연적인 일을 행하실 것인지에 대해 전혀 예상하거나 임의로 계획할 수 없었습니다.

성경의 병을 고치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는 오직 불신자들을 대상으로 교회를 설립하기 위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고 구세주이심을 선포하는 차원에서만 나타났습니다. 병을 고치는 것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선포하는 특별계시였습니다.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사도들의 전도 사역에서 그런 놀라운 일이 일어났으나, 자세히 보면 주도권은 100% 하나님께만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교회가 설립되고 성경이 완성된 후 더 이상 그런 역사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자신이 정한 시간과 계획을 따라서 하나님의 병 고치는 역사가 나타나도록 안수하는 집회를 엽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을 부리는 위치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능력이 가장 필요한 지금과 같은 때에는 일체 치유를 위한 안수를 하지 않고 숨어 있습니다. 치유하는 안수 사역이 거짓임을 스스로 증거하고 계십니다. 

야고보가 말한 대로 하나님의 치유의 은혜는 지금도 있습니다. 우리는 치유를 위해 서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치유를 일으키는 능력과 성령을 임의로 부리는 모든 사람들은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귀신추방의 역사도 지금 있으나, 귀신을 추방하는 전문 사역과 은사를 행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누군가 귀신에게 나가라고 명령했을 때 귀신이 나간다면, 하나님이 그 사람의 지휘와 통제를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부리는 성령의 은사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때에 맞게 일하게 하는 성령의 능력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전문적으로 귀신을 추방하고, 예배 시간에 함부로 “귀신은 떠나갈 지어다!”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단 사상으로 결국 기울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1)성경이 가르치지 않는 방언기도하는 분들은 그것을 버려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대화하실 때 아브라함의 일상 언어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으로 오시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드리신 하나님이신 사람 예수께서도 힘써 기도했으나, 한 번도 방언기도라는 것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과 다른 모든 사도들도 방언기도라는 것을 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에는 방언 기도라는 것이 없습니다.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때에 교회에 말씀하시는 특별계시와 연관된 은사였고, 교회설립과 성경이 완성된 후 그 누구도 방언의 은사를 받지 않았습니다. 방언기도는 하나님을 모조하는 거짓 신의 미혹의 수단입니다. 방언기도를 본격으로 도입한 미국의 찰스 펄햄와 윌리엄 세이모어는 이단들이었습니다. 방언기도를 하면 할 수록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쌓이기만 합니다. 

2)중보기도 사상을 버리고 회개해야 합니다. 원래 성경적 의미의 중보기도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를 중재하는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보실 때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요구를 듣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드리는 그리스도의 중보기도는 100% 효력있는 당당한 요구입니다. 거짓된 종교인 천주교가 중보기도를 교황, 마리아, 성인들에게로 확장시켰습니다. 천주교에서는 교황이 기도하면 하나님이 듣지 않을 수 없고, 마리아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듣는다고 합니다. 

이후 여러 이단들에 의해 중보기도 사상이 영적으로 특별한 능력자들의 기도로 변천했습니다. 특별한 영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기도하면 사탄이 결박되고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서 부흥이 시작된다고 가르쳤습니다. 다락방이라는 곳은 천사동원권과 사탄결박권이라는 것을 가르쳤고, 귀신론의 대표자 김기동은 자신이 특별한 능력과 권세를 가진 사도라고 하면서 방언기도와 대적기도 등을 주장했습니다. 

그런 것들이 한국에서 자생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1970년대 미국에서 오순절 교회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중보기도 운동을 통해 먼저 발전된 사상입니다. 신사도 운동은 1970년대에 미국의 오순절 교회들을 중심으로 발전된 중보기도 운동의 열매입니다. 중보기도 운동을 통해 신사도 운동이 일어난 이유는 중보기도 운동을 발전시킨 영적으로 특별한 사람들이 거짓 하나님과 친했고, 그들에게 환상 등을 통해 거짓된 계시가 임했기 때문입니다. 

중보기도 운동에 심취한 사람들은 자신에게 영적인 권세가 있다고 자부하였고, 부흥을 일으키기 위해 영적 전쟁을 선포하였습니다. 맘대로 전쟁하는 천사들을 불러서 어디에 가서 누구를 돕는 싸움을 하라고 시키기도 했습니다. 다락방이나 김기동이 잘하였던 일을 미국의 중보기도 운동가들이 더 먼저 했습니다.

마귀에게 미혹되어 자신이 마귀를 결박시키고 천사들을 호출하여 싸움을 붙이는 권세가 있다고 착각하는 그 사람들은 신으로부터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받은 계시가 신사도 운동을 탄생시켰습니다. 피터 와그너는 중보기도자들(70년대) -> 선지자들(80년대) -> 사도들(90년대)이 순차적으로 등장하여 새로운 사도들의 시대, 신사도 운동 시대가 개막되었다고 했습니다. 영적으로 특별한 사람들이 잘 하는 중보기도, 즉 기도로 영적인 전쟁을 수행하여 부흥을 일으키는 망령된 기도 사상을 버려야 합니다. 그저 겸손하게 예수님의 은혜 안에서 간절하게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3)선포하는 기도도 다시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할 지어다'라는 선포는 사람이 할 소리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대리자만이 할 수 있는 소리입니다. 사도들 가운데 기도를 그렇게 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장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소리를 들으시면 "니 맘대로 해라! 누가 하나님 놀이 하라고 시켰냐?"라고 하실 것입니다. 선포하는 기도는 피조물이 창조주 하나님 노릇하는 망령된 짓입니다.    

4)마귀를 대적하는 대적기도라는 것도 기독교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직접 마귀를 대적하면, 마귀가 얼씨구나 하면서 즉시 그 사람을 찢어서 회쳐 먹습니다. 사람은 그리스도 밖에서 직접 마귀를 상대하는 순간 마귀의 입으로 들어가서 녹는 사시미 깜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 이상의 행동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배 중에 "나가찌어다! 떠나갈찌어다!"하면 뭔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 목사의 목소리가 좋으면 무식한 신자들은 "우리 목사님이 능력 받았다!"라고 합니다.

저의 부친께서는 자신이 다니는 교회 목사님이 능력을 못 받았다고 하십니다. 윤석전의 힌돌산 기도원을 자주 드나드는 목사인데, 그 목사의 목소리는 "나갈 찌어다!" 라고 하는 것과는 잘 어울리지가 않습니다. 뒤 끝이 흐리고 힘이 딸려서 중압감이 없고, 한 번으로 마감하지 못하고 또 한번 약하게 '나갈찌어다'라고 반복하여 카리스마가 느껴지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저의 부친은 "우리 목사님은 능력을 못 받았다!"라고 평가하십니다.

예전에 하용조 목사가 한창일 때, 어느 해 송구영신 예배 때 수 많은 사람들을 향하여 "질병은 떠나갈 찌어다!"라고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쩌면 그리 잘 어울리는지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습니다. 멋지기도 하고 아름답고 감미로웠습니다. 아마 저의 부친이 그 장면을 보셨으면, "저 목사님은 신령한 능력을 넘치도록 받았구나! 정 목사야 너도 저 목사님과 같이 되어라!"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적하는 기도라는 것은 기독교에 없습니다. 사악한 사술입니다. 그렇게 해서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마귀의 큰 역사입니다.  다음의 영상을 보면 하용조 목사가 처음부터 마귀에게 속았고, 처음부터 하나님의 씨가 아닌 다른 신의 씨를 받은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도에게 기도는 언제나 겸손하고 간절한 간구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믿음으로, 성경의 말씀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고 성경대로 믿고 살아갈 수 있기를 위해 기도하여야 합니다. 기도의 내용과 개념이 성경에서 벗어나는 순간 우리 모두는 기도라는 형태의 푸닥거리를 하게 됩니다. 마귀의 입으로 들어가 사르르 녹는 사시미 깜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맥도날드에 가는 그 날을 고대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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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