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양호 선교사, 개혁주의 관점에서 본 환경문제 소고

요즘 전세계를 뒤흔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빅 뉴스 중에 특별히 예외적인 훈훈한 한가지 소식이 있다. 이웃 나라들에까지 살인적인 미세먼지를 퍼뜨리며 대기오염에 시달리던 중국은 10여년만에 가장 파란 하늘을 만끽하고 있다며 파란 하늘 영상을 비춰준다. 전문가들은 코로나 감염 확산 이후 중국의 대기 오염이 눈에 띄게 개선되는 반사 이익을 누리고 있다는 긍정적인 환경 평가를 하기도 하였다. 전염병 뿐만 아니라 기근, 지진, 산사태, 해일, 태풍, 폭염, 이상 기후 등의 자연재해가 끊임없이 발생한다.

환경문제 왜, 어디서 발생하나?

환경문제의 주요 원인으로 공업화된 환경 오염과 생태계 파괴가 주범으로 말하지만 아프리카나 아시아 개발도상국들의 상황을 보면 꼭 그런 원인만이 아니것이 분명하다.

미국의 역사학자 린 화이트(L White)는 “만일 우리가 자연환경이 인간에게 이바지하는 것 외에 아무런 존재 이유가 없다는 기독교원리를 배재하지 않는한 생태계의 위기는 계속해서 악화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기술 문명은 정통 기독교의 오만함으로 너무 물들어 있기 때문에 생태계의 위기에 대해 아무런 해결책을 기대할 수 없다”라고 비판 하였다. 동국대 오홍석 교수는 “기존의 기독교적 자연관에 대한 근본적인 수정없이 환경문제 해결 운운하는 것은 하나의 시도일뿐 동양의 고대 종교에서 지혜흫 받아들이 않으면 안된다.” 라고 하였다. 이들은 기독교 사상이 환경 오염의 주범임으로 성경 사상을 없애야만 환경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무서운 논리가 숨어 있다.
 

과연 동양 사상이 환경문제의 대안이 될 수 있는가?

불교는 모든 존재가 절대적 자기 실체가 없는 것으로 봄으로 끝없이 변화하는 과정을 전제한다. 이 논리는 윤회설, 업보설, 연기론(緣起論)을 낳고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상호 관련성이 있음을 중시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불살생(不殺生)을 으뜸으로 나뭇잎 하나도 따지 않고 곤충하나라도 밟아 죽이지 않는 것을 행동 강령으로 한다.

불교 철학에서는 존재론(存在論)과 생성론(生成論)이 같은 것으로 본다. 예를 들면 강, 산, 개, 소나무, 지렁이, 바이러스, 사람까지도 형태는 달라도 존재는 같다고 믿는다. 그리고 형태는 변해도 존재는 영원하다는 윤회설(輪廻說)을 뒷받침한다.그런 의미에서 인간이란 한갓 자연의 한 파편에 불과하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덧없는 인생에게 자연 환경을 돌보고 개발하고 가꾸는 청지기 사명을 기대하기란 힘드는 일이다.

최근 불교신문(2020.3.16)에서 “살아있는 한 공존할 바이러스를 어떻게 봐야할까 - 바이러스는 인간 이기심이 빚어낸 참사, 자연 공존이 관건” 이라는 기사에서 불교 신자인 고려대 안암병원장은 인터뷰에서 “불교적 우주론에서보면, 인간과 동물, 바이러스는 자연에 공존해 있다.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고 박쥐 같은 동물들을 공격한다면 바이러스 역습은 시작된다. 이로인해 인간은 고통 받고 있지만 바이러스 입장에서는 지금 열심히 살고 있을 뿐이다. 연기(緣起)이고 인과(仁果)이다. 일부 기독교에서처럼 과도하게 죄인에게 벌을 주는 것도 아니고 종말이 가까워져 오는 현상도 아니다.” 라고 주장하였다.

도교의 환경관은 반대되는 현상을 향해 움직이는 것으로 보고 동적인 것에서 정적인 것으로, 정적인 것은 다시 동적인 것으로 반복, 순환하는 것으로 믿는다.

유교의 환경관은 음, 양, 선, 악과 같은 사물의 대립물 또는 비교개념 속으로 인식한다. 따라서 자연과 인관, 개발과 보전 등 대립관계가 있음으로 균형이 깨질 경우 다른 한편에 결정적인 피해를 준다는 것이다. 자연(自然)이란 문자 그대로 스스로 존재하는 것으로 신(神)을 대하듯이 자연을 경외(敬畏)할 때 문제를 해결할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비교적 유불선(儒佛仙)이 융성하는 아시아권에 있는 몇몇 나라들에는 환경 문제에 초연한가? 유명한 관광지라고 직접 가보면 환경 오염의 예는 수도 없이 많음을 목격할 수있다. 두말할 필요없이 동양 사상이 결코 대안이 될 수 없다. 인간은 하나님 말씀의 불순종으로 그에게 맡겨진 아름다운 정원을 빈민굴로 만들었다고 성경은 말한다. 문제는 하나님께 있지 않고 사람에게 있다. 겉이 아닌 속이다.

항간에 제임스 러브록(James Lovelock)의 가이아 가설(Gaia Hypothesis)이 환경 문제의 대안이라고 말한다. 이 명칭이 암시하듯 “Gaea”(그리스신화, 대지의 여신)이론은 이 지구의 생태계를 하나의 신적(神的)인 실체로 본다. 생태계가 환경에 맞추어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생물들이 생태계를 능동적으로 유지하는 방향으로 환경을 조성하는데 그것 자체로 보아 지구가 살아 있다는 증거라고 한다. 지구는 그 자체가 하나의 신(神)이요, 숭배 대상이기 때문에 함부로 대해서는 안된다는 인식인데 단적으로 샤마니즘이나 범신론의 정체를 노출한다. 여기서는 자연 환경이 거대한 주체가 되고 인간은 그 사이에 끼인 힘없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상당히 낙관적인 견해 같지만 인간이 주체성을 상실한 상태에서 과연 누가 환경 문제의 책임을 질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은 “자연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길”이라고 한적인 있다. 한편으로 일리가 있지만 범신론(汎神論)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수 있다.

민중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초자연성, 인격성을 거부하고, 사랑의 한 실천 또는 한 이데올로기로서의 존재 방식을 선택한다. 하나님과 인간을 구별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구별도 거절한다. 결국 자유주의 신학은 특별계시(Special revelation)와 일반계시(General revelation)의 차이를 간과하고 혼합주의 양상을 띠므로 다른 종교와 같은 맥락을 가진다.

생태중심주의자(Biocentrist)로 널리 알려진 프란시스 쉐퍼(F.A,Schaeffer, “Pollution & The Death Of Man”)는 “기독교라고 해서 무조건 해답을 제시할 수 없다. 일종의 플라톤적 사고인 이분설에 기초하고 있는 기독교는 자연 환경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갖고 있지 않다. 칼빈주의자들은 동물에게는 영혼이 없어 천국에 들어가지 않음으로 가혹하게 다루어도 된다는 왜곡된 생각을 갖고 있다. 창조된 만물은 모두 경이로움과 경외심과 진정한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집에 우글거리는 개미떼를 없애는 것도 개미까지도 존중히 여기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을 망각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지지 않았을 뿐 창조에 관한한 인간과 동등하다” 고 주장한다. 그럴듯한 많은 주장들을 보면 도대체 우리의 입맛을 돋구어주는 각종 고기류, 온갖 생선류, 나물류는 어떻게 고상하게 다루어져 식탁을 장식해야 할 것인지, 말것인지 상당히 헷갈리게 만든다. 쉐퍼는 동양사상과는 달리 하나님과 인간과는 분리하지만 인간과 자연은 동등이라는 새로운 비성경적 관계를 설정하나 색깔은 대동소이하다고 할수 있다.

이에 창조주 하나님의 기록 계시인 성경은 자연 환경이라는 독자적인 가치보다는 인간을 위한 봉사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그 목적이 있음을 분명히 말한다.(창 1:29,9:3,시96) 일찍이 예수님은 “사람의 목숨이 천하(天下)보다 귀하다”라고 하셨고(마 86:3,16:26-27) 제자들을 위해 예수님의 직접하셨던 생선 숯불구이 요리(요21:9), 돼지 떼 몰사사건(AK8:26-34)등을 통해 인간과 자연을 동등시 하려는 그 어떤 시도에도 쐐기를 박으셨다. 이와 같이 환경문제를 빙자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깍아 내리려는 반성경적, 비복음적, 비인간적인 논리를 경계해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성화(聖化)의 과정에서 청지기 사명을 잊고 넘어지기도 하고, 무감각하게 자연환경을 남용하는 태도는 참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의 피 값으로 구속 받은 그리스도인의 가치를 평가절하(平價切下)하는 것은 성경이 용납하지 않는다. 지구촌의 환경 문제에 창조주이신 우리 주님의 공간이 없음을 개탄한다.
 

누가 이 환경 문제에 답을 줄수 있는가?

어느날 남아공 일간지에, “ One time, Good friend”라는 기사가 눈길을 끌었다. 이탈리아의 한 동물 애호가는 각종 동물을 좋아하고 가르는데 어느날 자기가 사랑하던 사자가 밥을 주던 자기 주인을 잡아 먹어버렸단다. 선교지였던 East London시(市)에서 운영하는 동물원에서 장난을 하던 한 관광객이 호랑이의 먹이가된 웃지못할 사건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해변에서 윈드써핑을 즐기는 젊은이들이 한해 몇 명씩은 상어의 밥으로 사라져가지만 파도타기 즐기기를 멈출줄 모른다. 케이프타운의 유명한 관광지인 Hot Bay물개섬에는 수천마리의 물개들이 떼를 지어 살고 있다. 물개들이 얼마나 많은 배설물을 쏟아내는지 그 특유의 냄새가 그 주변을 진동한다.

캐냐에서는 코끼리 수렵을 금지시킨 이래로 그 수가 불어나 농작물에 막대한 피해를 준다고 한다. 아프리카 모기는 막무가내로 말라리아 바이러스를 퍼뜨려 의료 방역이 많이 소홀한 아프리카 전역에 엄청난 목숨을 앗아가고 있다. 아프리카 개미떼들은 얼마나 센지 나무든 뭐든 닥치는대로 부셔버리고 자신들의 둥지 아파트를 짓는다. 남미가 원산지인 붉은 개미는 떼지어 몰려다니며 전세계로 확산되어 곡식은 물론 사람까지 위협하는 “육지발 쓰나미”라고 한다. 요즘 동아프리카에서 발생한 사막 약 4000억마리 메뚜기 떼들은 대열을 지어 이나라 저나라 인정사정 없이 파도처럼 밀려오는데 인간들은 퇴치하지도 못하고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있는 것 같다.

정원에 잡초를 깍고 있는데 몰래 들어와 살고 있던 벌떼의 공격으로 때아닌 벌침을 강제로 자주 맞는다. 인간의 피부로부터 몸 속 피까지 온통 이름도 알수 없는 병균들은 쉴사이 없이 생명을 앗아가고 가차없이 분해까지 해버린다. 맛있는 과일을 먹고 사는 새들은 허수아비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옛날 교사시절 교실 안에 실험 관찰용 화분에도 예외없이 병충해는 달려들었다.

과학자들은 21세기에 AIDS같은 것보다 더 센 병이 등장하여 인간을 괴롭힐 가능성이 많다고 예견한다. 지구촌의 자연계란 그야말로 적자생존(適者生存), 약육강식(弱肉强食)은 적절한 대명사이다. 아무리 생명의 외경을 외치는 시바이쪄 같은 사람이라도 독사에 물려 사경(死境)을 헤메이면서 “ 독사님,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말 할 사람이 있을까? 아직 배가 부르고 사지가 멀쩡하여 하나님의 은혜인지 알지 못하고 창조주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큰소리치는 인생에게는 구구하게 다른 긴 설명이 필요없다.

성경은 환경문제에 대하여 공업발전이나 에너지 사용증대 같은 피상적인 것보다,

“내가(하나님)…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것이라.”(창3:17-18)

라고 하였다. 창조주의 명령에 가氏와 엉氏는 그때 이후로 즉각 순종에 착수하여 온 산하를 덮어버릴 기세이다. 농사를 지어보면 이 말씀에 실감을 한다. 어느날 울타리를 뚫고 도망친 염소를 찾다가 이 가시나무들의 거센 항의에 두손들고 말았다. 이 가시나무들은 도적을 막는 울타리용이나 땔감으로 적격이다.

인간의 죄로 인한 하나님과의 부조화는 인간과 인간사이의 부조화, 인간과 자연 환경의 부조화를 가져왔다. 지구촌의 그 어떤 유명한 사상이나 종교에서 이 환경문제의 해답을 기대할 수 없다. 오직 ”내가!”(창3:17)라고 말씀하신 창조주 하나님 자신만이 할 수 있다고 명명백백하게 온천하에 선언 하셨다. 그분의 은혜를 통한 구속의 손길만이 이 지구촌의 환경문제를 풀수 있는 열쇄가 있다.
 

환경문제에 접근하는 세계관들은 무엇인가?

학문적으로 대개 세관점에서 환경문제에 접근한다.

첫째 생태중심주의 (Biocentrism)는 유불선이나 이방종교 등에서 흔히 볼수 있는 자연중심주의 이론으로 범신론적 셰게관이다.

둘째 인간중심주의 (Anthropocentrism)인데 하나님의 역할을 배제시키고 문예부흥과 산업혁명등 인간이 이룩한 현대 과학문명의 가능성에 무게중심을 두는 경우로 인본주의세계관이라 할수 있다. 범죄한 아담이후 피조세계는 그 어떤 화려한 이론이 등장한다해도 실제면에서 그 무능력의 한계를 드러 낼 뿐이다.

셋째 사회, 공산주의(Socialism, Communism). 말로는 그럴듯하게 항상 말을 잘한다. 

박재광교수( 윈스턴신대 건설환경공학)에 의하면, “구소련 영향권에 속해있던 공산국가들이 유럽연합에 가입했을 때 환경피해 상황은 상상 이상으로 심각했다. 유해물질로 오염된 곳이 사방에 흩어져 있고, 하천은 처리되지 않은 오폐수로 오염됐고, 식수는 유럽연합기준에 맞지 않았다. 생활수준은 물론 그나마 쾌척할 것이란 생활환경도 최악의 상황이었다. ‘사회주의가 친환경적이고 안락한 삶을 가져다준다’는 논리가 틀렸다. 사회, 공산주의가 인간과 환경을 얼마나 파괴하는지 역사적으로 검증되었지만, 사회주의를 꿈꾸는 한국의 현정부하에 ‘자연을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놓아두어야 한다’는 환경보존주의자들은 원전을 중단하고 심지어 이미 전정부에서 홍수와 가뭄등 자연재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개발완료된 4대강까지도 녹조가 발생되었다며 본래로 돌리자고 순진한 발상을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중국발 초미세먼지, 우환코로나바이러스 등 환경 유령을 불러오는 그 환경을 보면 이 사상이 얼마나 자연환경을 파괴하는지 알수 있다.

네째 하나님 중심주의(Theo centrism)로 개혁주의 세계관에서 접근하는 경우인데 성경적 환경관이다. 하나님 중심세계관은 동양사상처럼 음과 양, 또는 선과 악의 대결구조로 파악하지 않고 인격적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행사를 하시는 섭리 활동의 장(場)으로 본다. 따라서 어떤 악의 현존과 세력도 하나님의 주권에 감히 도전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이해는 필연적으로 피조물에 대한 긍정으로 연결되고 자연은 아름다운 것이며 거기에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과 신성이 드러난다. 모든 자연 환경은 하나님의 절대 소유이고 그의 선의(善意)의 결과임으로 세상에는 본질적으로 추하거나 속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활동은 가치 있고 아름다울 수 있다는 세계관의 확신이다. 이러한 긍정적인 확신은 선하게 창조된 세계를 관리해야 할 선한 청지기이라는 적극적인 태도를 일으킨다.

한편 어린 아이들이 실수하여 그릇을 깨었을 때 부모가 책임을 묻지 않는 것 처럼 성경은 택자를 위한 구속의 측별 은총외에 피조물에게 일반은총(Common grace)을 선물로 주셨다. 만약 타락후에 창조주가 이 은헤를 발동하지 않았다면 민물은 죄의 부패속성(腐敗屬性)에 의해, 또는 하나님의 진노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을 것이다. 본래 인간은 피조물을 다스리고 관리할 책임적 존재(창1:27-28)였기 때문에 인간의 타락은 곧 피조물인 자연 환경의 부패와 타락을 가져왔다. 구원문제에 있어서 인간의 공로나 의지를 완전히 부인하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만이 유일한 해결책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자연 환경의 회복, 창조 질서의 보존도 예외가 아니다. 금세기의 산업의 고도 성장과정에서 환경과 개발의 조화를 무시하고 당장 눈 앞의 물질만 추구하면서 수질, 해양, 공기가 오염되어 고통의 맛을 본 후에야 비로소 환경 윤리에 눈을 뜨게 되었다.


개혁주의 윤리관은 궁극적인 善 그 자체이신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인간의 인격적인 순종으로 믿는다. 따라서 기독교 윤리의 모든 표준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달라지는 상황윤리(狀況 倫理)가 아니라, 하나님이 내려주신 절대윤리(絶對倫理)이며 그것을 만족시키며 살 수 있는 힘도 그분이 내려 주심을 믿는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의 초점이 하나님 중심이듯 소위 환경 윤리의 초점도 역시 하나님중심이다.

언젠가 소비자 보호원에서의 100% 국산 콩으로 만든 두부에 유전자변형(GM) 성분이 검출됐다는 지적에 국내 굴지의 식품회사인 풀무원은 "성분 분석조사에 문제가 있다. 사실 무근이다."로 큰 파문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과거에 고춧가루에 톱밥을 섞어 물감을 들여 판매하다 적발된 상인도 있었고, 참기름에 물을 섞어 순참기름이라고 하여 팔기도 하고, 오징어나 쥐포에 방부제를 많이 써서 뭘 아는 사람들은 아예 먹질 않는 단다. 공장 폐수 정화 시설을 하지 않고 유독 화학 물질을 방류하여 고기 떼가 몰살을 함에도 전혀 양심에 꺼림이 없는 사람들도 있었다. 공장 굴뚝, 자동차의 매연이 새까맣게 올라가 마음대로 창밖에 빨래를 널 수 없게 되었다.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는 미세먼지의 뿌연 스모그 현상으로 태양을 거의 볼 수 없는 지경이 와도 어쩔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왜 그럴까? 환경문제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일까? 아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 눈먼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상황 속에 몰래 카메라를 설치하시고 지켜보시는 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환경문제에 사실 어떤 면에서 걱정할 자격도 없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신전(神殿,하나님 앞)사상으로 무장된 참 그리스도인 때문에 소망이 솟아오른다.


본질적으로 영적인 환경 문제가 그 뿌리이다

환경 문제의 첨예한 이슈로 등장하는 성경은 창세기 1장28절이다. 이것을 소위 문화명령(Cultural mandate)이라고 부른다. 이 말씀의 문맥적 성찰을 통해 문제에 대한 힌트를 충분히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의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 명령에 대한 인간의 절대 순종을 조건(條件)으로 한 생명과 축복의 선언임을 기억해야 한다.

박윤선은 "인간으로 말미암아 자연계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과 만물을 지배함으로 자연계에 얽매이거나 섬기지 않고 하나님께 더욱 가까워지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카일 델리취는 "하나님은 땅자체 뿐만 아니라 동식물계를 다스리는 지상권, 정복능력, 통치권을 주셨다"고 했다. 칼빈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부성적(父性的) 돌보심이 인간의 모든 필요를 준비해주시고 "그러므로 너희는 나를 너희 아버지로 인정하라. 너희를 위해 내가 마련한 것을 양육하는 것은 모두 너희의 일이다. 그러나 나 자신도 책임을 지고 있다."고 적절한 예로 표현을 하였다.

메튜헨리는 “인간의 위치와 권위의 관계로 본다. 인간이 비록 준비한 것이 없는데도 피조물을 다스릴 권세를 부여 받음으로 땅위의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었다. 하등 피조물에게는 인간을 두려워하고 섬기는 본능을 주었다. 이와 같이 인간에게 화려한 만물의 영장 면류관을 씌우신 것은 더욱더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의무를 강하게 깨닫도록 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주영흠 교수는 “생육하라”( Be fruitful)는 열매를 생산하라는 뜻인데 식물성, 동물성 열매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부모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구비한 열매를 생산하라는 말씀이다.( 창1:11,22,시127:) 그러나 축복의 열매가 심각한 인구폭발(물)로 돌변한 것은 불순종의 산물이다. “번성하라”(Become many) 는 말씀은 의인의 양적인 증가, 의인의 기도, 지식의 확대 등도 이에 해당한다.(잠29:2, 단2:4, 왕상4:30, 삼상1:12) 그러나, 불의(不義)가 증가하면 심판하신다.(신11:) 땅에 충만하라( fill)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찬송의 열매가 충만할 것을 선언하심이다.(사11:9,29:6,창3:3,단2:35, 합3:3) 그러나, 포악이 충만할 때 하나님은 심판하신다.(창6:13) “땅을 정복하라”(subdue) 하나님 앞에 순종하게 하라는 말씀이다.(슥9:15, 수18:1, 대하22:18, 미7:19, 렘34:11,16,) 그러나, 동족을 짓밟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따른다.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govern)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스리라는 뜻이다.(잠12:10, 시72:8, 민24:19, 레25:43,53) 그러나, 죄(사탄까지도)를 다스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따른다.(창3:, 4:7)”라고 좀 특이한 강해를 하였다.

요컨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에게 문화 명령을 주신 것은 땅이 인간을 위해 있는 것처럼 인간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시8:6) 인간은 스스로 개척하고 자기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확실한 청지기 명령을 받고 사는 존재이다. 그 이유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여호와의 것이기 때문이다.(시24:1) 그분의 땅에서, 그분의 뜻을 따라, 그분의 청지기로 살아간다는 이런 원칙에서만 참된 문화가 꽃이 피게 된다. 자연 환경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영적인 환경에서 그 뿌리를 찾아내어 처방 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은 죄요, 죄에 대한 그분의 심판은 우리가 깨닫든지, 알지 못하든지 역사 속에서 지금도 여러 양태로 계속 진행되고 있다.

오늘의 환경 문제가 아무리 시끄러워도 창조 시에 주셨던 하나님의 명령은 취소하거나 철회(撤回)를 선언한 적이 없으시므로 청지기로서 소명(召命)과 사명(使命)도 여전히 유효하다. 하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구체적으로 그분 자신이 직접 책임을 짊어지셨다. 실로 문화적인 사명은 하나님이 마련하신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재창조(再創造) 위에서 비로소 밝은 빛을 보게 된다.
 

환경문제는 하나님의 구속사 성취의 한 수단이다

최근 코로나바이러스(COVID-19)의 쓰나미 사태로 그 존재감을 펼치면서 전세계가 비상사태 공포로 몰려가고 있다. 이곳 저곳에서 지진이 일어나 많은 피해가 일어나고 있다. 우리 나라는 매년 태풍으로 많은 손실을 가져온다. 태풍이 인간 편에서 보면 대개 부정적인 일면만 보기 쉽다. 청소기로 청소를 하면서 하나님의 진공 청소기인 태풍을 생각해본다. 그 엄청난 위력으로 휘젓지 아니하면 지구촌의 어마어마한 오물 쓰레기, 유조선에서 흘린 기름 덩어리 등 청소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데 하나님 자신이 그의 전체 지구를 관리하시는 도구로 그런 것들을 사용하시는지 모른다.

과학자들은 동•서남아시아의 쓰나미에 대해 "지진 해일은 싱싱하고 살기 좋은 지구를 만들기 위해 쉼 없이 계속되는 지각의 재생 작업에서 파생되는 불가피한 부작용이다. 이 결과 강의 풍부한 퇴적물을 해변 평야로 운반해 토양을 비옥하게 한다. 앞으로 수십 년간 최대 피해 지역인 해안 지방에 환경적인 혜택을 줄 수 있다." 고 평가를 하고 있다. 영국의 옥스포드대 연구진은 지구 온난화가 예상보다 훨씬 심각해 온실가스 방출량이 줄어들지 않으면 금세기 중반까지 지구 기온이 최저 섭씨 1.9도에서 최고 섭씨 11.5도나 높아질 수 있는 것이라는 대규모 컴퓨터 모델 실험 결과가 ‘네이처’ 2005년 최신호에 발표됐다.

21세기에 들어 본격적으로 자연재해, 기상이변, 그리고 해수면 상승 등 여러 형태의 환경적 위협들이 증폭되거나 현실화되면서, 기후변화에 대한 정치적 경각심이나 보다 적극적인 대응 협력에 대한 국제사회의 요구는 커지고 있다. 2019년 한 해 동안 온난화로 인해 스위스 알프스의 몽블랑 만년설의 붕괴 위험 경고가 내려졌고, 해수면 상승으로 세계문화유산인 베네치아의 80% 이상이 물에 잠기면서 이탈리아 정부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는 등 역사상 유례없는 기후변화의 피해를 경험했다. 그 외에도 파키스탄 남부 타르 사막에는 폭우가 쏟아졌고, 중국 서북지역의 고비사막에서는 강우량의 증가로 풀들이 자라기 시작했으며, 역대 최고의 피해를 남겼던 강력한 태풍들이 연속으로 일본을 강타하는 등 기후변화에 따른 기상이변과 자연재해는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과학자들은 지구종말시계(Doomsday Clock)를 “인류종말 2분전”이라 선언하며, 기후변화를 핵무기 확산 및 통제 실패와 더불어 제2차 세계대전 이래 인류 최대의 위협으로 규정했다.1 현재의 국제협력(UNFCCC)체제가 기후변화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 하고 있음은 청년 세대의 정치적 불만으로 표출되기 시작해서, “기후를 위한 등교거부 운동” 기후를 위한 청년 시위” “기후시위(Climate Strike)” 등의 이름으로 대규모 시위로 국제사회에 주목을 받고 있다. 결국 총체적인 위기 상황에 놓인 지구촌의 환경문제는 지구의 종말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신학적인 입장에 따라 관점이 다르나 아무튼 환경문제가 결국은 지구촌 환경의 종말을 향해 달리고 있음에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 같다.

결론적으로, 성경의 환경관은 창조(創造),타락(墮落),구속(救贖)이라는 세계관에 입각하여 구약의 문화명령(Cultural Mandate)과 신약의 복음위임령(Gospel Mandate,마28:19-20)의 두 수레바퀴가 동일선상에서 종말의 완전 회복과 성취를 향해 달리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일반은총으로 허락하신 자연 환경을 악용(惡用) 내지는 남용(Abuse)은 죄요, 그 결과는 여러 형태의 자연재앙이라는 이름표를 단 하나님의 징계, 섭리의 현재 진행으로 통찰해야 한다.

자연 환경 파괴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영적인 모습이 얼마나 일그러져 있는지 보여주는 거울일 수 있다. 영적으로 눈이 먼 세상 사람들의 관심거리가 보이는 자연환경이라면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자연환경과 함께 영적 환경문제까지도 동시에 읽어야 한다는 것이 복음위임령(great commission)이다. 환경문제의 진행도, 해결도 하나님의 처방(Guidebook)인 성경 앞에 솔직하고 겸손하게 설 때만 바로 볼 수 있다. 따라서 환경 문제는 구속사(救贖史) 성취의 한 수단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인간-자연이라고 하는 구별과 질서를 자리 매김하고 있다. 이 순서가 뒤바뀌게 되면 그것이 곧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우상숭배(偶像崇拜)가 된다. 그런 면에서 요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이 각종 논리로 기독교의 실패한 하나님이라고 아무리 난도질해도 여전히 우리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창조, 질서, 보존의 주체자로 전혀 이상 없이 일하고 계심을 믿는다.(사40:28,계21:)
 

결론적으로,

환경 문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현실 참여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그리스도인이 영적인 환경이든, 자연 환경이든 정치환경, 사회, 교육환경이든 삶의 전 영역에서 청지기 사명완수 여부는 신자의 상급에 관계한다. 그리스도인이 가진 윤리는 최고 최상의 윤리인데 불신자에게 손가락질 당한다면 회개해야 한다. 자연보호운동이니 국토대청소, 쓰레기분리수거, 음식 쓰레기 분리배출 등 환경 보호를 위한 정부의 불편 감수 운동이나 재난의 충격 속에 터전을 잃어버린 이웃을 향해 긴급구호활동 같은 현실참여에서도 솔선 수범하여 적극 수용, 참여, 선도(先導) 해야 한다. 그런 사랑의 필드를 통해 복음전도의 문을 열고 영적 환경을 효과적으로 정화 할 수 있는 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계속해서 인간의 죄로 인해 모든 자연환경이 부패조직(腐敗組織)에 연결되어 고통하고 있다고 말한다.

성령의 영감으로 자연환경을 본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를 향해 외치기를,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에 이르는 것이라."(롬8:18-30)라고 하였다. “참그리스도인, 비록 세상에서 힘없고 매력 없는 자들일지라도 환경 문제의 최상의 해결책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라는목표를 향해 달려라.”라고 절규하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쓰나미의 신음 소리에 우리는 자못 흥분해야 한다. 참 그리스도인이 더욱 그리운 시대이다.

*인용한 부분은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으며 참고문헌을 참조하시기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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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호 선교사는 고신에서 공부하고 안수받았으며, 현재 KPM(고신총회세계선교회)와 NGO Good Partners(김인중 목사, 이사장)의 파송을 받아 우간다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 천주교와 오순절 운동 신학 류에 오염되지 않은 순결한 성경적 복음을 우간다의 원주민들에게 전하고자 애쓴다. 우간다의 낙후된 여러 지역들을 순회하면서 복음과 함께 의료 봉사로 영혼들을 섬기고 있고, 늘 기독교의 세계적 동향을 살피고 연구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