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혁 교수의 '언약신학' 2장 : 그린햄 부분에 대한 소감

안상혁 교수(합신, 교회사)의 저서 <언약신학>을 독서하는 이유는 하나이다. 잉글랜드 청교도들의 신앙이 기독교에 해를 미치고 있고, 특히 회중파 청교도 신앙의 출발점인 행위계약 사상이 복음을 훼손하기 때문이다. 안 교수의 책 1장에 대한 소감 “내 사랑​​ 웨민고백속의 행위계약 다루는 안상혁 교수 책”에서는 행위계약의 성경적 근거는 빈약하고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라는 추론으로 나온 교리에 의존하고 있음을 보았다. 그리고 안상혁 교수에게 그리스도의 능동순종 교리에 대한 문제 의식이 없음을 확인했다.

오늘은 안 교수의 책 2장의 리처드 그린햄(Richard Greenham, 1535-1594) 부분을 살펴보도록 하자. 그린햄은 청교도 신학의 창시자 윌리엄 퍼킨스(1558-1602)와 동시대의 인물이다. 두 사람이 비슷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나, 퍼킨스는 청교도 신학을 발전시키는데 주력했고 그린햄은 목회의 현장에서 신자들을 가르치고 상담하는데 전념했다. 안 교수는 그린햄에게 상담하고자 찾아온 신자들의 주요 관심사가 하나님의 구원과 예정이었다고 한다.

“케런 브륀의 지적한 바에 따르면, 그린 햄을 찾은 교구민들은 대부분 선택과 구원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었다.”(안 교수의 말/ 97 페이지)

그린햄은 불안한 마음으로 상담받고자 찾아온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선택은 선행을 유도하는 거다란 자극제이다.”(99 페이지)

“당신이 선택받은 것이 사실이라면 당신은 또한 믿음에 이르는 수단에 대해서도 선택받은 것이며, 또한 그 열매에 대해서도 선택된 것이다. 만일 후자가 결여되었으면 당신은 택자가 아닌 것이다.”(99 페이지)

그린햄에게 찾아가서 신앙 상담을 했던 사람들은 불신자들이었는가? 거듭난 성도들이 목사에게 찾아가서 “저는 구원 받았을까요? 하나님이 저를 선택하셨을까요?”라고 물었던 것일까? 뭔가 좀 이상해 보인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서 하나님의 죄용서와 구원을 확신할 수 없을 수 있을까? 마귀의 흑암의 권세 아래 살던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어 죄용서와 하나님의 자녀 됨의 은혜를 받았는데, 그 자신이 그것을 몰라서 목사에게 찾아가 물어본다는 것이 정상적 신앙에서 있을 수 있는가?

성경을 보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못한다. 어부 베드로가 일하는 현장으로 그리스도께서 찾아가셨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만난 베드로는 그 앞에 엎드려서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절규하듯 고백했다.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라고 말씀했다. 그때 베드로에게 구원이 임했고, 이후 베드로는 자신의 구원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베드로는 영원히 그리스도와 떨어지지 않는 그리스도의 제자, 성도, 사도가 되었다.

왜 그리스도께서 어부 베드로가 일하는 곳으로 찾아가셨을까? 베드로에게 구원의 복음을 주시기 위해서였다.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구원하기 위해 주어야 할 복음은 그리스도 자신이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친히 베드로에게 가셨다. 사람이 되어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눈으로 본다고 모든 사람들이 믿고 죄용서와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다. 자연인의 눈과 이성으로는 그리스도가 앞에 있어도 보지 못하고 듣지 깨닫지 못한다.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소집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너희의 목전에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온 땅에 행하신 모든 일을 너희가 보았나니 곧 그 큰 시험과 이적과 큰 기사를 네 눈으로 보았느니라.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신 29:2-4)

요즘 신명기를 읽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홍해, 만나, 반석의 생수 등의 하나님의 큰 이적들을 체험하였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다 알지 못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아직 주시지 않았다”고 설교했다. 자연인의 이성과 눈과 귀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고 듣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를 주셔야만 한다.

베드로는 어떻게 그리스도를 알아보았고, 자신이 그 앞에서 더러운 죄인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깨달았을까?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에 빛을 비추어 주신 것이다. 은혜를 입어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순간 자신이 그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임을 알게 되었다. 그 순간 베드로에게 죄용서와 구원이 임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굳이 “너는 지금 구원 받았다!”라고 말씀하지 않았다.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라고 더 고차원적으로 말씀하셨다.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이 남을 구원할 수는 없다. 베드로가 구원 받았고, 남의 영혼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큰 종이 될 것임을 말해주신 것이다.

이날 이후 단 한번이라도 베드로가 자신의 구원을 의심하였었는가? 한번이라도 그리스도에게 또는 다른 누구에게 찾아가서 “저는 구원받았을까요? 하나님이 저를 구원하여 주시려고 택하셨을까요?”라고 질문했었는가? 십자가를 지기 위해 끌려가신 그리스도를 끝까지 따르지 못하고 잠시 부끄러운 일을 했을지라도, 베드로는 자신의 구원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스도를 만나 구원을 얻은 후 자신의 구원에 대해 회의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사례를 성경에서 일체 찾을 수 없다.

예수님 때부터 지금까지 구원의 원리는 동일하다. 베드로에게 예수님 자신이 친히 찾아가셨던 것처럼, 지금은 성령께서 택하신 자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보내신다. 성령께서 구원받도록 선택되어진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 증거할 사람을 보내신다. 사도행전을 보면 전부 그런 이야기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되면 성령께서 택자의 마음에 은혜를 베푸시어 그리스도를 믿게 하신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형성되고 입으로 고백되는 순간 그 사람은 구원 받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적용받아 죄 용서를 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이 사실을 성경은 이렇게 설명하였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고백이 이루어지는 순간 영혼이 살아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적용하시는 성령이 그 사람 안에 내주하기를 시작하신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동거하기를 시작하시는 것, 즉 성령세례가 이루어진다. 그 순간부터는 그 사람은 이전의 그 사람이 아니다. 이때부터 그 사람에게 “나는 구원 받은 사람인가?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려고 택하셨을까?”라는 고민이나 근심은 있을 수 없다.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이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고 성령이 깨닫게 하시는 빛을 비추시면 땅에서 경험할 수 없는 하늘의 기쁨과 감격에 사로잡히게 된다. 오직 그 은혜를 주신 하나님과 그것을 받는 그 사람만이 아는 기쁨이다. 다르게 말하면 성령의 내적 증거이다. 성령의 은혜 가운데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 죄용서와 구원에 이르게 된 사람이 자신의 구원과 하나님의 택하심을 확신하지 못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눅 24:32)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고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깨닫고 믿어질 때에는 반드시 초자연적 은혜가 마음과 영혼 속에서 함께 일한다. 그러므로 그 사람이 자기의 구원과 하나님의 택하심을 확신하지 못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은혜를 주신 분과 받는 사람만이 아는 기쁨이고 감사이고 행복이고 찬송이다.

대체 잉글랜드 청교도 목사 그린햄이 무슨 목회를 어찌 했기에 그의 교인들이 그의 집을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목사님, 나는 구원을 받도록 예정되었을까요?”라는 한심한 소리를 날마다 했을까? 그린햄은 무슨 연유로 그것이 중요한 목회상담이라고 여기면서 일생을 허비하였을까? 근본적인 원인은 그가 하나님과 복음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담과 하나님의 행위계약이라는 것 자체가 하나님과 복음에 대한 오해이고, 더 많은 사람들을 오해에 빠지게 만드는 그릇된 사변이기 때문이다.

안상혁 교수의 <언약신학>은 청교도 신학의 아버지 윌리엄 퍼킨스가 만든 아담과 하나님 사이의 행위계약이라는 거짓 신학을 옹호하려고 쓰여진 책이다. 이 책의 2장의 앞 부분은 행위계약 사상에 충실하게 목회하였던 그린햄이라는 청교도 목사의 사례를 소개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청교도 행위계약 사상에 충실한 목회를 했던 그린햄의 신자들이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청교도의 행위계약-은혜계약 구조에 함몰되면 필연적으로 회심준비론 목회를 하게 된다는 사실을 바로 전의 글 “웨신의 행위계약 대요리문답의 생명언약, 하나는 거짓 신학입니다”(크릭)에서 설명하였다. 율법을 지켜서 스스로의 힘으로 영생을 쟁취하기로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아담이 그렇지 못하여 회개도 허용되지 않는 영원한 죽음에 처해졌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대로 두시지 않고 그리스도가 아담 대신 완전하게 율법을 지켜서 구원에 필요한 의를 얻게 하시고, 그것을 우리에게 전가시켜 우리를 구원했다는 것이 청교도들의 가르침이다.

청교도들의 목회는 행위계약에 묶여 있는 사람을 그리스도의 은혜계약으로 넘어가게 하는 과정이다. 회심준비론은 청교도들의 목회의 실천신학이다. 사람이 아담처럼 율법을 지키지 못해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저주받은 자신의 운명을 깨닫고 스스로 예수를 통해 구원을 얻는 길을 찾아 나서게 만드는 것이 회심준비론이다. 아담처럼 율법 앞에 서서 한 없이 초라한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의 비참한 운명을 깨닫고 슬퍼함으로서 구원의 여정이 시작된다는 가르침이다. 그래서 복음을 처방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먼저 율법을 처방한다. 율법을 지키면서, 예배도 드리면서, 기도도 하면서, 회개도 하면서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혜가 임하는 날을 고대하고 사모하게 만든다. 안상혁 교수는 찾아오는 신자들에게 그린햄이 다음과 같이 상담했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담자에게 적용할 때, 율법과 복음을 신중하게 구분하여 효과적으로 적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기에는 순서가 중요하다. 그린햄은 먼저 ‘죽이는 문자’로서의 율법을 사용했다. 이것은 신자들의 마음을 잘 준비시켜 ‘치료하는 복음’을 효과적으로 적용하기 위한 예비적, 그러나 필수적 단계였다.”(안 교수의 말/ 103,104 페이지)

그린햄이 청교도 회심준비론을 정확하게 시행한 것이다. 청교도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전에 예비적 단계로서, 또한 필수적 단계로서 구약의 율법의 저주와 하나님의 진노를 먼저 가르쳤다. 지금도 청교도 회심준비론 목회하는 사람들은 같은 방식으로 정상적 신자들의 신앙을 뒤엎고 있다. 다른 교회에서 예수 믿어 구원받고, 권사가 되고 장로까지 된 사람들에게도 다시 율법의 저주와 하나님의 진노를 가르친다. 철저하게 회개하면서 율법도 지키면서 자신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날마다 복창하면서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성령의 회심 체험을 하나님이 하나님의 때에 베푸시기를 사모하고 고대하라고 가르친다. 청교도 신학의 구원론과 정상적 개혁신학의 중생에 대한 가르침은 확연하게 다르다. 서철원 박사의 중생의 원리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복음선포를 들은 사람들에게 성령이 역사하셔서 거듭나게 하신다. 거듭남과 동시적으로 성령의 권면을 따라 주 예수를 믿는다는 믿음고백을 하게 된다. 믿음고백과 함께 회개한다. 믿음고백과 회개는 언제든지 같이 가기 때문이다.”(구원론, 66)

“사람으로 회개하게 하려면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복음을 선포하므로 자기가 하나님 앞에 큰 죄인인 줄을 깨닫고 회개하여 믿고 의에 이른다(롬 4:13-16). 율법은 이미 믿는 자들에게 죄를 알게 하고 피하게 하기 위해서 선포된다.”(교회론, 98)

“성령의 역사로 그리스도인들을 죄의식을 가지며 죄를 벗기 위해 늘 죄와 투쟁한다. 죄와의 투쟁은 성령의 역사 없이는 불가능하다. 성령의 역사 없이 죄가 지적되고 죄가 폭로되면 반감과 적대 행위만 나타나고, 그로 인해 그렇게 지적한 자를 죽이려 한다. 성령의 역사만이 죄의 지적과 폭로가 회개에 이르고 죄와 투쟁하게 한다. 성령은 언제든지 좌와 투쟁하시고 죄를 책망하신다(요 16:8). 그러므로 성령의 인도를 받고 있는 자는 자기 안의 죄와 밖의 죄와 투쟁한다. 죄와 투쟁하고 있는 자는 성령의 인도아래 있는 자들이고(롬 8:12-14) 성령을 받은 자들이다. 성령 받은 자만이 죄와 투쟁하기 때문이다.”(성령신학, 207)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지 않고 율법의 저주와 하나님의 심판을 먼저 전한다는 것은 목회와 설교를 망치는 일이다. 안 교수가 그린햄에 대한 자료를 잠시 보고 바로 문제를 알아보았어야 했는데, 전혀 그렇지 못했다. 성경의 가르침과 복음을 왜곡하는 사람의 사상을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다음과 같이 칭송하였다.

“그림햄은 복음의 말씀을 가지고 고뇌하는 심령을 치료하기 전에 율법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그 사람의 죄악과 부패성, 그리고 그것이 초래하는 형벌의 심각성을 생동감있게 각인시키는데 매우 능숙했다. 피터 카우프만에 따르면, 그린햄은 동일한 성경을 가지고 신자들의 심령 속에 ‘가장 큰 절망’감과 ‘가장 큰 위로’를 창조해내는 달인이었다. 비단 자신뿐 아니라 모든 말씀의 사역자들 역시 이러한 방식으로 율법과 복음을 능하게 다루는 말씀의 전문가들이 되어야 한다고 그린햄은 주장했다.”(안 교수의 말/ 104 페이지)

“그림햄은 각 개인의 형편에 따라 율법과 복음의 치료법이 다소 달라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목회자를 찾아온 내담자가 본인의 죄 문제로 인해 이미 충분히 슬퍼하고 있으면 또한 겸손한 상태라면, 그들에게는 좀 더 빠르게 하나님의 말씀을 처방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만일 교구민들 가운데 양심이 무뎌져서 죄악에 대한 자각이 없거나 ... 곧 복음보다 율법의 소독제가 우선적으로 강도 높게 적용되어야 한다.”(안 교수의 말/ 105)

안 교수는 말씀을 전하는 목회사역에 대해 큰 오해에 빠져 있는 것 같다. 목회자는 사람의 영혼을 위해 율법과 복음을 배합하거나 골라서 쓰는 재주를 부리는 사람이 아니다. 목사는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 구원의 은혜를 전하는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이다. 사람을 구원하고 고치는 것은 오직 복음과 성령이다. 영혼을 구원하고 치료하기 위해 율법과 복음을 구별하고, 때에 따라 잘 섞거나 골라서 처방하라는 가르침이 성경 어디에 있는가?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 새”(행 8:4)

“두 사도가 주의 말씀을 증거하여 ... 여러 촌에서 복음을 전하니라”(행 8:25)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행 8:35)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행 8:40)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행 10:36)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행 14:7)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행 14:21)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행 16:10)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행 20:24)

그린햄은 성령을 의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르게 전하는 목회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의 설교를 오래 들었던 사람들이 상담이 필요하다면서 그의 집을 뻔질나게 들며 이렇게 고민을 토로했던 것이다.

“목사님, 저는 구원 받도록 예정된 사람일까요?”

그린햄의 근본 문제는 그릇된 복음전파, 즉 청교도의 회심준비론 목회를 했다는 것이다. 그 원인은 영생도 없이 창조된 아담이 영생을 얻기 위해 하나님과 행위계약을 맺었다는 청교도 언약 사상이다. 올바른 개혁신학으로 목회하면 신자들은 절대로 그런 이상한 상담을 하겠다고 목회자에게 찾아오지 않는다. 칼빈이 하나님의 택하심의 증거를 무엇이라고 가르쳤는지 보자.
 

“곧 선택된 사람들의 믿음이 아무리 부족하고 약하더라도 하나님의 영이 그들을 위해 그들이 양자가 되었다고 하는 확실한 보증과 날인을 해주심으로써(엡 1:14, 고후 1:22) 그분이 새겨두신 표징은 그들의 마음속에서 결코 말소되지 않지만 ... 그 씨를 영원히 썩지 않게 만들지 않으신다.”(기독교강요, 3.2.12)

“선택받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선택의 증거라고 인정한다. 그리고 선택받은 자들이 선택의 완성인 영광으로 들어갈 때까지, 칭의도 선택을 나타내는 한 표징이라고 생각한다.”(기독교강요, 3.22.7)

“부르심은 선택의 ‘증거’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롬 8:29).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롬 8:30). 이것은 그들을 후에 영화롭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주께서는 그들을 선택하실 때에 이미 자녀로 정하셨으나, 그들이 부르심을 받지 않으면, 그 위대한 복을 소유하지 못한다.”(기독교강요, 3.24.1)

칼빈은 하나님의 선택의 증거는 그 사람이 복음을 듣고 믿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복음을 믿고 난 후 조금이라면 삶의 변화가 일어나면 구원이 임한 것이라고 칼빈은 진단하였다. 칼빈과 서철원 교수와 같은 정통 개혁신학의 가르침을 받는 교회에서는 예수 믿음이 가장 강력한 하나님의 선택의 증거이고, 믿음이 연약할지라도 결코 그 믿음이 소멸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선택의 증거이다.
 

맺는 말

안상혁 교수의 <안약신학> 2장 그린햄 부분을 통해 청교도 신학의 출발점인 아담과 하나님의 행위계약을 믿으면, 청교도 목회의 실천신학인 회심준비론을 시행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청교도들의 회심준비론은 성령의 도우심이라는 미명하에 사람이 자신의 구원의 길을 준비하게 만드는 천주교의 신인협동구원론이다. 구원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과 칼빈의 <기독교강요>, 그리고 정통 칼빈주의자 서철원 박사 등은 오직 하나님의 택하심과 택하신 자를 오직 은혜로 구원하는 불가항력적 은혜가 신학의 기둥이다. 그러나 행위계약으로부터 출발하여 회심준비론으로 이어지는 청교도 목회에는 택하심-불가항력적 은혜가 없다. 그래서 신자들이 목회자의 집을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이렇게 상담하게 된다.

“목사님, 저는 구원받도록 예정된 사람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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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