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섭 교수의 '개혁주의 전가교리' 독서(17): 4부 1장 - 역사적인 반론 부분

신호섭 교수의 <개혁주의 전가교리>를 주의 깊게 살펴보는 이유는 하나이다. 비성경적인 청교도 사상이 최고의 엘리트 개혁신학이라고 포장되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고, 하루 속히 바로 잡아야 우리 모두의 신앙이 살기 때문이다. 오늘은 신호섭 교수의 책 4부(제목: ‘신학적 발전과 그리스도인의 삶’)의 1장을 살펴보려고 한다. 4부의 서론에서 신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미 서론에서 몇 몇 현대 신학자들이 종교개혁자들과 이어지는 세기의 청교도들이 개혁주의 신학으로부터 이탈한 것처럼 주장했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따라서 이번 장에서는 현대 신학자들의 이러한 주장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밝힐 것이다. 오히려 청교도들은 칭의 교리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교리에 관한 한, 16세기의 개혁주의 신학자들과 전적으로 견해를 같이 한다.”(171 페이지)

종교개혁자들과 17세기 청교도들의 신학이 같다는 신 교수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청교도 신학의 행위언약 하나로만 이야기 해 보자. 하나님이 영생이 없는 아담을 창조하시고 율법을 지키면 영생을 줄 것이라고, 그리고 아담도 그리하겠다고 쌍방간에 계약했다는 행위언약이라는 것은 전적으로 허구이다. ‘행위언약’, ‘소똥언약’, ‘개똥언약’ ... 명칭이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영생을 매개로 쌍방적인 조건의 계약을 맺었다고 하니 전적으로 거짓말이다. 신 교수가 17세기 청교도들의 신학과 칼빈의 신학이 같다고 주장하니, 조금 자세하게 칼빈의 태초의 아담에 대한 이해를 살표보도록 하자!
 

“그러므로 아담이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하여 벌을 받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참으로 교만이 모든 악의 처음이었다는 어거스틴의 단정은 옳다. 사람이 자기의 처지에 만족하고 바른 한계를 넘으려고 하지 않았더라면, 태초의 상태에 머무를 수 있었을 것이다.”(기독교강요, 2.1.4)

아담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려는 교만을 행하지 않았다면, 태초의 상태에 머물렀을 것이라고 한다. 태초의 상태란 하나님 백성으로서 영생을 누리는 상태를 뜻하지 않는가? 다른 뜻이 있을까? 아담과 하나님이 영생을 매개로 쌍무적인 계약, 즉 아담이 율법을 지켜면 앞으로 영생을 줄 것이라는 계약을 맺었다고 칼빈이 이해했다면, 이런 말을 하였을까?

“그러나 그 후로 야심과 교만이 배은망덕과 함께 생겨났으니, 아담은 받은 것 이상을 원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아낌없이 주신 그 위대하고 풍성한 은혜를 파렴치하게 경멸했기 때문이다. 흙의 아들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고도 또한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지 않는 것을 사소한 일로 보았으니 이 얼마나 해괴하고 흉악한 태도였는가!”(기독교강요, 2.1.4)

아담이 영생을 잃고 망한 이유는 교만하여 하나님 섬김을 거부하였기 때문이라고 칼빈은 해석했다. 칼빈이 청교도들처럼 영생 없이 창조된 아담이 영생을 위해 하나님이 제시한 율법을 지키지 않은 것이 원죄라고 이해했다면, 이렇게 말했을까?

“아담이 그의 창조주와 연결되어 있던 것이 그에게 영적 생명이 되었던 것과 같이, 창조주에게서 멀어진 것은 곧 영혼의 죽음을 말한다. 아담이 하늘과 땅의 전체적인 자연 질서에 위배했을 때, 그 반역으로 인해서 인류를 파멸에 다다르게 한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기독교강요, 2.1.5)

아담의 창조주와 연결됨이 영적인 생명이었다는 말은 곧 하나님을 섬기면 영원한 생명을 유지했다는 뜻이다. 영생없이 창조된 아담이 율법을 지켜 영생을 얻어야 하는 입장이었다고 이해했다면, 칼빈이 이런 말을 했을까?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을 풍성하게 받았을 때에 그 은혜를 감사하지 못했으며, 받은 축복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모든 영광을 잃어버린 지금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하나님을 인정하며 적어도 자기의 부족함을 고백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기독교강요, 2.2.1)

아담이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 백성의 신분을 처음부터 은혜로 받았다고 이해하지 않았다면, 이런 말을 했을까? 아담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은 것이 원죄의 근본이라고 칼빈이 말했는데, 아담이 영생이 없는 상태에서 율법을 지켜 앞으로 영생을 얻어야 하는 입장이었다고 이해했다면 이렇게 말했을까?

“성례는 우리의 믿음을 더욱더 강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주께서는 어떤 때에는 성례로 약속하신 일을 우리가 믿지 못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성례 자체를 우리에게서 빼앗으신다. 아담에게서 영생의 은사를 빼앗고 주지 않으셨을 때에 주께서는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고 하셨다(창 3:22). 이것은 무슨 뜻인가? 아담이 잃어버린 불멸성을 그 과실이 회복할 수 있었을까?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여호와의 이 말씀을 다른 말로 옮긴다면, "나의 약속의 상징에 집착해서 헛된 확신을 즐기지 못하도록 불멸에 대한 소망을 그에게 줄 수 있는 것을 그에게서 빼앗으리라"는 말이 될 것이다.(기독교강요, 4.14.12)

칼빈은 에덴동산의 생명나무를 오늘 날의 성찬식과 같은 것으로 설명했다. 그리스도의 안에서 영생이 주어졌음을 확인하고 기념하는 차원에서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상징하는 성찬을 받는다. 아담에게 생명나무는 하나님 섬김에서 벗어나지만 않으면 영생과 하나님 백성의 신분을 영구하게 누린다는 언약이었다고 해석했다.

‘아담에게서 영생의 은사를 빼앗고 주지 않으셨을 때’(존 칼빈)

칼빈은 분명히 하나님이 범죄하고 반역한 아담에게서 이미 주였던 영생의 은사를 거두시고 다시 돌려주지 않았다고 이해하였다. 그러나 타락하여 영생을 잃어버린 아담이 어리석게도 생명나무로 접근하면, 다시 영생을 얻을 것으로 생각하고 미신적인 행동을 하지 못하게 막으셨다고 가르쳤다. 이런 성경 해석을 가졌던 칼빈이 ‘행위언약’이건 ‘소똥언약’이건 영생이 없었던 아담이 율법을 지켜 영생을 얻었어야 한다는 언약을 하나님과 맺었다고 이해하였다고 할 수 있는가? 아담과 선악과에 대한 서철원 박사의 설명도 들어보자.

“그리고 언약을 체결하시어 사람을 하나님 백성으로 삼아 창조 주 하나님만을 섬기게 정하셨다 ... 이렇게 큰 호의를 입어 하나님의 백성 된 자가 하나님처럼 되겠다고 손을 들어 하나님을 대적하였다. 이렇게 하나님은 그의 인격과 엄위와 영광을 짓밟힘 당하고 무시당하셨다. 사람이 반역하여 하나님을 섬기지 않기로 결행하므로 그의 인격과 엄위를 무시하였다. 하나님 섬김의 명령을 어기어 창조주 하나님의 위엄과 엄위를 무시하였다. 언약백성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자주자가 되기로 하였다.”(그리스도론, 195)

“언약을 체결하심으로 하나님은 언약 당사자인 인간이 백성으로 남아 하나님을 모시고 섬김에 대한 보상으로 영생을 주시고, 하나님을 모시고 섬기는 것을 거부할 경우 사망으로 벌하시기로 하셨다. 이렇게 언약을 체결하심으로 하나님은 자기가 지으신 인류를 자기의 백성으로 삼으셨다. 하나님은 인류를 백성 삼으셨으므로 그들에게 오사 그들과 교제하시고 그들 가운데 거하시기를 기뻐하셨다.”(성령신학, 166)

“선악과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으로 인정하고 사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대한 표현이다. 하나님의 말씀에의 순종 여부가 선과 악이다. 이 순종 여부를 하나님은 한 나무에 결부시켰다. 그 나무에 결부된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 전부를 순종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살 수 있는 권리 곧 의를 획득하는 것이다.”(성령신학, 165)

칼빈과 칼빈의 종교개혁 신학을 계승하는 올바른 신학자들은 영생 없이 창조된 아담이 율법을 지켜서 영생을 얻기로 하나님과 쌍방의 조건적인 계약을 맺었다는 행위언약 사상을 거부한다. 비성경적인 행위언약에 자동으로 수반되는 능동순종 교리, 즉 그리스도가 아담 대신 행위언약을 성취하여 우리에게 구원을 주었다는 또 다른 거짓 사상이 수반되었다.

성경은 아담의 원죄를 영생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창조된 아담이 하나님께 반역한 사건으로, 그리고 성육신하신 하나님-사람이신 그리스도가 자기의 피로 아담의 반역죄를 무효화하여 다시 아담과 우리들을 하나님 백성으로 회복하였다고 가르친다.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호 6:7)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 5:9)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청교도 신학의 회심준비론

청교도 신학의 복음전도에 대한 주장인 회심준비론도 성경과 전적으로 다르다. 원죄-언약-칭의 속에 율법주의를 정착시킨 청교도들은 복음전도에도 율법주의를 고수했다. 그리스도의 복음보다 율법의 저주를 먼저 전해야 사람이 자기의 죄와 지옥의 운명을 깨닫고 복음을 스스로 찾으며 구원을 준비한다는 청교도 회심준비론은 치밀한 율법주의이다. 성경은 율법이 이미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에게 주어졌다고 말씀한다. 역사적으로 시내산에서 처음 율법을 받은 사람들은 불신자들이 아니었다.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세례와 성찬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기 전에 이미 세례와 성찬을 먹은 하나님 백성들이었다고 설명했다.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1-4).

그런데 (회)청교도들은 사람이 먼저 율법의 저주를 접해야 스스로 자신의 구원을 준비하게 된다는 회심준비론에 집착했다. 구약 시대에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으라고 강요한 적이없다. 아브라함, 라합, 다윗, 노아 ... 누구도 율법을 지켜 의를 얻고 난 후 하나님 백성이 되라는 요구를 받지 않았다. 하물며 신약의 백성들이 먼저 율법에 복종하면서 자기를 구원의 길로 자신을 인도하라는 요구를 받겠는가? 사도행전의 사도들과 제자들의 행적을 보면,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먼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지, 율법의 저주를 먼저 전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 바로 보인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 새”(행 8:4)

“두 사도가 주의 말씀을 증거하여 ... 여러 촌에서 복음을 전하니라”(행 8:25)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행 8:35)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행 8:40)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행 10:36)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행 14:7)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행 14:21)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행 16:10)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행 20:24)

청교도들의 신학은 원죄-언약-칭의-복음전도에서 기독교와 유사한 길을 열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의 피 위에 세워진 교회를 다시 넘어지게 만들었다. 많은 학자들이 칼빈의 신학과 청교도들의 신학이 다르다고 평가하였다. 패리 밀러(Perry Miller, 1895-1963)는 Errand into the Wilderness에서 뉴잉랜드의 청교도들의 회심준비론은 칼빈주의 신학이라고 할 수 없다고 평가했다. 대표적인 청교도주의자 로이드 존스의 후임자였던 로버트 켄달도 청교도 신학이 칼빈의 신학과 매우 다르다고 평가했다. 국내의 황대우 교수(고신)도 '개혁파의 선택론과 언약론'이라는 소논문에서 “칼빈의 신학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창조언약, 행위언약'과 같은, 후기 개혁파의 언약신학을 특징 지우는 개념들은 어떤 의미에서 바로 이러한 불링거의 언약사상에 의존한 것이라 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부족한 필자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우려하는데, 청교도를 추종하는 다른 목회자들과 교수들의 눈에는 이것이 안 보이는 걸까?


이제 4부 1장에서 신호섭 교수가 하는 말들을 살펴보자!

“청교도들은 종교개혁의 신학을 따라, 그리스도 밖에는 의롭다함을 받기 위해 율법 전체를 성취하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전혀 없기 때문에 죄인을 구원하는데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가 필수 불가결하다고 간주했다.”(신호섭 교수/173페이지)

여기서도 신 교수는 청교도 신학이 종교개혁 신학을 따른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원숭이가 사람의 유전자를 그대로 물려받았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원숭이는 사람과 매우 유사한 유전자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유전자 배열에 있어서 원숭이와 사람의 차이는 많아 보이지 않는데, 신비하게도 바로 조금 다른 부분에서 원숭이와 사람이 갈라진다고 한다. 청교도 신학이 종교개혁 신학과 비슷해 보이면서도 원죄, 언약, 칭의, 복음전파, 성화에서 매우 달라지는 것이 그 같은 이치일 것이다.

“죄인을 구원하는데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가 필수 불가결하다고 간주했다”(신호섭 교수)

신 교수의 이 말은 표면적으로 맞으나 실제 내용에서는 거짓 사상이다. 청교도들과 신 교수가 시종일과 그리스도가 율법을 지켜서 의를 얻어 우리에게 전가했다고 하기 때문이다. 성경에 의하면 율법을 아무리 잘 지켜도 구원에 필요한 의는 나오지 않는다. 구약 때에는 앞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믿었고, 신약에서는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믿어 칭의를 얻는다. 그런데 청교도 신학은 구약의 사람들이 앞으로 오셔서 율법을 지키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약의 사람들은 이미 오셔서 율법을 지키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믿어 의를 얻는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롬 4:1-3)

기독교에서 의를 얻는 것과 율법은 아무 관련이 없다. 청교도들은 율법을 칭의를 얻는 수단으로 삼는 새로운 율법종교를 종교를 만들었다. 청교도들이 날마다 그리스도가 사람을 대신하여 율법을 완전하게 지켜서 의를 얻고 전가했다고 떠들었는데, 신 교수는 지겹지도 않은지 4부 1장에서도 또 그 이야기를 이어갔다.

“모든 믿는 자들의 의를 위해 율법의 마침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의 의의 전가 이 외에 본래적 율법, 즉 하나님의 불변하는 율법이 확고히 수립되고 성취될 수 있는 다른 길은 전혀 없다.”(존 오웬의 말/ 173 페이지)

성경은 율법이 지적한 우리의 죄와 허물을 짊어지고 대신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심이 율법의 마침(롬 10:4)이라고 가르친다. 그리스도가 모든 율법 조항들을 다 지키심이 그리스도의 율법의 마침이라고 한 존 오웬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성경에서 그리스도가 모세의 계명들을 지키려고 노력하신 흔적들이 많이 나와야 할 것이다. 성경에서 그런 내용을 찾을 수 있는가? 오웬은 그리스도가 율법을 지키지 않고 죽기만 하셨으면 우리가 죄 용서는 받았어도 천국에는 가지 못할 것이라고 가르쳤다.

“율법의 주된 목적은 그것을 준행하는 자를 의롭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자신은 율법을 성취할 수 할 수 없다 ... 우리를 위해 율법을 성취하시는 일은 그리스도께서 하신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의 의가 우리 안에서 성취된다.”(오바댜 그류의 말/ 174 페이지)

하나님께서 율법을 지키는 사람에게 의를 주시려고 율법을 보내셨다는 이런 주장은 성경의 가르침과 다르다. 율법을 지킴으로 의를 얻는 것이 하나님의 원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레위기 18:5절과 로마서 10:5절을 제시한다.

“너희는 내 규례와 내 법도를 지켜라. 사람이 이것을 행하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나는 여호와이다.”(레 18:5, 바른성경)

“모세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두고 기록하기를 ‘율법을 행하는 사람은 그것으로 살 것이다.’ 하였으나”(롬 10:5, 바른성경)

모세의 그 말의 전후 맥락을 보아야 한다. 친족간의 성행위, 생리중인 여성과의 성행위, 타인의 아내와의 성행위, 우상에게 자식을 바치는 행위, 동성간의 성행위, 짐승과의 성행위를 범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전 원주민들처럼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에서 쫓아내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래서 모세를 다음과 같은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너희는 이런 모든 일로 자신을 더럽히지 마라. 이는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민족들이 이런 모든 일로 더러워졌고,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땅의 불법을 벌하였고, 그 땅도 그 주민들을 토해 내었다.”(레 18:24,25)

가나안 원주민들의 죄악을 따라하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것이라 경고했던 모세의 말을 바울이 신약 백성들이 칭의를 얻는 방법으로 제시하였을까? 만일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를 얻었다고 선언한 로마서 4:1-3절의 내용은 무엇인가? 바울이 레위기 18:5절에서 신약 백성의 칭의의 원리를 찾아낸 것이 아니다. 로마서 10장 5절 이후를 보면 명백해 진다.

“모세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두고 기록하기를 ‘율법을 행하는 사람은 그것으로 살 것이다.’ 하였으나 ... 이것은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또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에 이른다.”(롬 10:5-10, 바른성경)

결국 바울이 강조한 내용은 율법준수의 의가 아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로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율법을 잘 지키면 (영생에는 이르지 못하지만) 이생에서 하나님의 저주를 안 받을 수는 있다고 했다. 그러나 영생에 이르는 길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라고 바울은 설명했다. 그런데 청교도 추종자들은 뒤를 잘라버리고 바울이 율법을 지킬 수 있으면 그것으로 영생의 의를 얻는다고 가르쳤다고 한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율법에 완전하고도 충분하게 응답하는 의가 아니고서는 그 어떤 의도 충분하지 않다. 그리고 신적인 인간이 아니고서는 결코 그러한 의를 수행할 수 없다.”(로버트 트레일의 말/ 174-175 페이지)

로버크 트레일의 이 말도 기독교 신앙을 매우 왜곡하는 거짓 주장이다.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의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면 영생에 필요한 의를 얻는다는 가르침이 없다.
 

맺는 말

신 교수는 참으로 오랜 만에 성경을 인용하면서 마쳤다.

“그러하기에 사도 바울은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엡 2:8)라고 외친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함과 같으니라’(롬 4:3-8).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칭의도 없고, 구원도 없고, 중생도 없다. 은혜가 아니라면 죄인이 서지 못하고 영원한 멸망에 빠지고 말 것이다.”(176, 177페이지)

늘 유명한 사람들의 어록에 집착하였던 신 교수가 모처럼 성경을 인용하였다. 그런데 아전인수격으로 인용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은혜는 십자가에서 피 흘리실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은혜였다. 결코 아브라함을 대신하여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은혜가 아니었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에서 바울이 가르친 믿음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절대로 우리 대신 율법을 지키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아니다. 신 교수가 모처럼 성경을 인용하는 것은 반가운 일이나, 성경을 자신의 거짓 신학을 보강하는데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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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