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섭 교수의 '개혁주의 전가교리' 독서(15): 2부 3장의 스펄전, 머레이, 로이드 존스 부분

신호섭 교수의 <개혁주의 전가교리>를 주의 깊게 살펴보는 이유는 하나이다. 비성경적인 청교도 사상이 최고의 엘리트 개혁신학이라고 포장되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고, 하루 속히 바로 잡아야 우리 모두의 신앙이 살기 때문이다. 오늘은 신호섭 교수의 책 2부의 3장의 찰스 스펄전, 존 머레이, 로이드 존스의 능동순종 주장 부분을 살펴보도록 하자. (신 교수가 제임스 부캐넌, 윌리엄 쉐드의 능동순종 주장도 소개하였으나 지면을 아끼기 위해 이 두 사람을 제외하였다.)
 

찰스 스펄전(Charles H. Spurgeon)

스펄전은 대표적인 청교도 신학자 리차드 십스의 책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인물이다. 신 교수의 책에는 스펄전이 능동순종 개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 것으로 나온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심(능동적 순종)과 죽으심(수동적 순종)이 우리 자신의 인간적 공로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영광스러운 혼인 예복을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찰스 스펄전의 말/ 신 교수의 책 126)

그리스도의 율법적 선행과 십자가의 죽으심이 곧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 입어야 할 예복이라고 스펄전이 가르쳤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낲으로 나아가기 위해 입어야 할 예복이 있다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마 22:12)

과연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입어야 할 예복은 무엇일까? 성경 어디에도 완전하게 율법을 지키신 그리스도가 우리의 예복이라고 가르치는 내용이 없다. 성경은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우리의 예복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 6:14)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 5:9)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빌 3:9)
 

존 머레이(John Murray,1898-1975)

존 머레이는 프린스턴 대학에 자유주의 신학이 유입되자 기독교 신앙을 지키기 위해 필라델피아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1929년)를 개교하는데 앞장선 인물이다. 

“우리는 결코 우리 주님이 이 땅에서 살아가신 삶의 특정한 단계나 행위를 그 분의 능동적 순종으로 규정하고 또 다른 특정한 단계나 행위를 그 분의 수동적 순종으로 규정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은 시간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리스도의 모든 순종은 능동적이며 수동적인 순종으로 묘사되고, 모든 시간 동안 모든 국면에서 우리 주님이 보이신 순종의 사역이다.”(존 머레이의 말/ 신 교수의 책 129)

신 교수가 찾아낸 능동순종 개념과 관련된 머레이의 말은 이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머레이의 이 말은 칼빈과 서철원 박사의 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에게 의를 주었다는 가르침과 다른 내용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복종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셨고, 그는 이를 위해 평생 동안 복종을 실행하셨다(소제목). 그런데 어떤 사람은 묻기를 그리스도는 어떻게 죄를 없애 버리며,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간격을 없애며, 의를 얻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하여 은혜와 친절을 품으시게 만드셨느냐고 한다. 이에 대해 우리는 일반적으로 대답할 수 있는데 곧 그의 복종 생활 전체에 의하여 우리를 위해 이 일을 성취하셨다는 것이다.”(기독교강요, 2.16.5)

“그는 죽기까지 순종하므로 아담의 불순종을 속상하여 많은 사람들을 의롭게 만들었다 (롬 5:17-19) 그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사망에서 돌이켜 생명 곧 영생에 이르렀다 (롬 5:21). 하나님의 뜻을 순종함이 의이기 때문이다.”(서철원, 그리스도론, 165)

신 교수가 머레이의 말을 소개한 후 “머레이가 지나치게 신중했다고 여겨진다”(128-129페이지)라고 평가했다는 것은 머레이를 청교도 신학의 능동적 순종 교리와 연관시키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마틴 로이드-존스(David Martyn Lloyd-Jones, 1899-1981)

로이드 존스는 청교도 신학을 미화하는데 가장 탁월한 공헌을 했던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목회하였던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교회에서 매년 12월에 청교도 신학 세미나를 개최하였고, 자신이 연구한 청교도 사상을 발표하였다. 그 내용을 묶어서 출판한 책 <청교도 신앙, 그 기원과 계승자들>이 한국 교회에서도 크게 호평 받았고, 많은 목회자들이 청교도 신학에 대해 그릇된 동경심을 가지게 되는데 크게 일조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바로 필자이다. 필자는 이 책을 읽으면서 청교도 신앙과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그릇된 경외심을 가지게 되었다.

로이드 존스의 신학을 평가할 때, 우리가 감안해야 할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사실은 그가 잉글랜드 회중파 청교도들의 신학을 그대로 계승한 회중교회의 목회자였다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웨일즈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 헨리는 16,17세의 회중교회(회중파 청교도) 신앙을 깊이 사랑했던 사람이고 그의 어머니는 영국 국교회 신자였다. 14세 때에 가족들과 함께 런던으로 이주하였고 의학 공부를 시작하여 25세에 의사가 되었다. 의학 박사 학위를 얻었으므로 이후 평생 박사로 호칭되었으며 공식적인 루트를 통해 신학을 공부한 적은 없었다. 설교의 재능이 탁월하여 웨스트민스터 채플의 유명한 설교가 캠벨 몰간의 후임으로 청빙되어 30년 동안 목회하였다.

한국의 장로교회의 성령 신학이 로이드 존스 때문에 버렸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과 무관하게 빈번하게 하늘로부터 강림하여 부흥의 불을 지피고 다시 종적을 감추는 에드워즈의 거짓 성령을 로이드 존스도 사랑하면서 답습하였기 때문이다. 에드워즈와 청교도 신학을 맹목적으로 추종했던 로이드 존스는 특별한 성령의 부흥이 시작되면 사람들에게서 괴상한 신체적인 현상들도 나타난다고 주장했고, 하늘로부터 성령이 더 부어짐으로 부흥이 일어난다는 오순절 운동의 성령론을 동일하게 펼쳤다. 자신이 사랑했던 에드워즈의 거짓 성령론을 맹목적으로 추종하였기 때문이다.
 

청교도 신학의 능동순종 교리에 대한 로이드 존스의 입장이 궁금했는데, 신호섭 교수가 알려주었다.

“칭의와 죄 용서는 동일하지 않다 ... 그들은 속죄의 한 부분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율법에 수동적으로 순종하시기 이전에 이미 능동적으로 순종하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다시 말해 칭의에는 두 번째 요소로서 능동적 요소가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나의 죄가 용서받은 것 외에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적극적인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고 우리의 것으로 인정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율법을 준행하고 높이셨으며, 그 결과 율법의 모든 요구에 직면하신 의로운 분이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바로 그런 그리스도의 의가 나의 것이 되게 하였다.”(로이드 존스의 말/ 신 교수의 책 130)

로이드 존스의 위의 주장은 매우 비성경적이다. 로이드 존스의 주장을 분석해 보자!

“칭의와 죄 용서는 동일하지 않다”(로이드 존스)

로이드 존스의 이 말을 사도 바울을 이상한 신학자라고 정죄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인한 죄의 용서가 곧 칭의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 5:9)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칼빈도 칭의는 곧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인한 죄의 용서라고 가르쳤다.

“이것은 바울이 다른 곳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고 한 것과 똑같은 뜻이다. 그뿐 아니라, 로마서 4장에서 그는 처음으로 칭의를 ‘의의 전가’라고 부르며 칭의를 죄의 용서에 포함시키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사함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6-7, 시 32:1)고 말하였다.”(기독교강요, 3.11.4)

서철원 박사도 그리스도의 죄의 용서가 곧 칭의라고 설명한다.

“의롭다 하심의 중요한 점은 바로 죄책을 제거하심이다. 죄책 혹은 죄과의 제거는 죄인을 의인으로 확정하는 것이다. 무죄하다고 선언하는 것은 죄에 대한 책임이 제거되었음을 뜻한다. 그래서 범죄하였지만 죄책이 제거되었으므로 죄에 대해서 책임질 일이 없어진다. 곧 완전한 의로 인정되는 것이다.”(구원론, 124)
 

로이드 존스의 다음의 주장에도 문제가 많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율법에 수동적으로 순종하시기 이전에 이미 능동적으로 순종하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로이드 존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모세의 계명들을 부지런히 지키심으로 의를 얻으셨다는 로이드 존스의 이 주장이 맞다면, 우리는 사복음서에 그리스도가 모세의 계명들을 적극적으로 찾아다시면서 준수하시려는 의지와 행동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과연 그런 내용들을 사복음서에서 찾을 수 있는가? 사복음서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관심이 ‘천국복음 전파’와 ‘십자가의 죽으심 준비’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의지로 모세의 계명들을 지키려고 신경 쓰셨던 흔적들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나의 죄가 용서받은 것 외에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적극적인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고 우리의 것으로 인정되었음을 의미한다.”(로이드 존스)

로이드 존스가 말한 ‘그리스도 자신의 적극적인 의’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안에 처음부터 있었던 본질적인 의가 아닌, 인간으로 사시면서 율법을 지켜서 얻으신 의를 의미한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율법을 지키려고 애쓰신 흔적을 성경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로이드 존스가 우리보다 성경을 더 잘 알고 많이 읽었던 사람이었는데, 이런 주장을 하는 이유를 이해하기 어렵다. 그의 신앙이 처음부터 회중교회 안에서 형성되었으므로 성경과 성경에 대한 인간의 추론 사이의 혼동을 극복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칼빈은 우리에게 전가된 의는 그리스도의 본래의 의, 죄 없이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안에 처음부터 본질로서 존재했던 의라고 가르쳤다.

“그(바울)가 이후에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고 말할 때 ... 의가 그리스도 안에 본질로서 존재하는데 바로 이 그리스도께 본질로 속한 의가 우리에게로 전가된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칼빈의 로마서 주석/ 신 교수의 책 68 페이지)

아담의 죄 안에서 태어난 사람은 그 무슨 방법으로도 의로워질 수 없으므로 죽어야만 한다.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은 친히 우리를 살리는 의가 되시려고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완전히 거룩하고 의로우신 사람으로 성육신하셨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께서 죄 없으신 자기의 피로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배상하시었다. 그리고 우리가 자기를 믿게 하시었고 연합되게 하시고, 자기의 본래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시었다. 그래서 우리가 의인이 된 것이다.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우리에게 주실 적극적인 의를 얻으시기 위해 율법을 지켜다는 로이드 존스의 주장은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났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율법을 제정하셨고,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 스스로 율법의 저주 아래 처하셨다. 하나님의 율법은 반드시 만족되어야 한다. 그것은 반드시 높여져야 하고 지켜져야 한다. 따라서 인간을 ‘율법의 저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율법을 향해 능동적 순종을 나타내 보이셨다.”(로이드 존스의 말/ 신 교수의 책 130-131)

로이드 존스의 위의 말 속에도 거짓이 들어있다.

“하나님의 율법은 반드시 만족되어야 한다. 그것은 반드시 높여져야 하고 지켜져야 한다.”(로이드 존스)

하나님의 율법이 만족을 얻는 방식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율법이 높여지고 지켜지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청교도 신학의 능동순종 주장자들은 죄 없이 성육신하신 구세주께서 모든 율법을 지키심으로 율법이 높아졌다고 한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그 방식으로 율법을 율법을 높이셨다는 흔적이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율법의 저주를 짊어지고 우리 대신 죽으셨다고 가르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서철원 박사도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사 율법대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인을 구원하셨다고 한다. 

내 죄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었다. 창조주에 대한 반역은 영원한 멸망과 죽음과 영원한 고통에 처하도록 되어있다. 그러므로 반역이 무효화되기 전에는 다른 길이 없다. 그러나 나는 그 반역죄를 무효화할 길이나 방도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나에게는 영원한 멸망과 고통밖에 다른 것이 없다. 너무도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 한 번 범함으로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졌다. 나는 죽고 멸망하고 영원한 고통을 당해야 한다 ... 주 예수께서 피 흘려 나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셨다. 내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성육신하사 사람이 되셨다. 그리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셨다. 그 피로 내 죗값을 다 지불하사 내 죄와 반역을 무효화하였다. 이렇게 나를 내 죄와 죽음에서 해방하셨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해설, 46)

하나님만이 나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고 해방하실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으로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고 사람이 되사 그렇게 하셨다. 사람이 되사 신인으로서 일하사 나를 구원하셨다. 하나님이 신인이 되사 나를 위해 십자가에 대신 죽어 피 흘리심으로 나를 구원하셨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심만으로 나를 구원하셨어도 말로 할 수 없는 감사와 감격이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신인으로서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고 피 흘리심으로 구원하셨다. 이것은 말로 할 수 없는 신비이고, 감사와 감격을 다 표현할 수 없는 진리이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해설, 47)

조금 만 깊이 생각하면 로이드 존스의 복음과 율법의 관계 이해가 엉터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못하는 일, 즉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의 조항들을 모두 지키는 방식으로 율법을 높이셨다면,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도 그리 해 보라고 명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라합, 노아 등에게 그렇게 율법을 높여서 의를 얻으라고 전혀 요구하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를 얻게 하셨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롬 4:2,3)

이렇게 엉성한 로이드 존스의 신학이 어째서 한국에서 이렇게 엄청난 대접을 받는 것일까? 이제라도 로이드 존스가 회중파 청교도들의 신학을 그대로 물려받은 회중교회의 목사였고, 뉴잉글랜드에서 화려하게 핀 이단의 꽃 조나단 에드워즈의 사상을 그대로 추종했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프란시스 쉐퍼(Francis A. Schaffer, 1912-1984)

기독교 철학자였고 장로교 목사였고 기독교 신앙을 변증하는데 탁월한 재능을 보였던 프란시스 쉐퍼도 청교도 신학의 능동순종 개념을 가졌다고 신 교수는 소개했다.

“예수님의 수동적 사역, 즉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을 친히 담당하신 그 분의 수동적 순종에 기초한다. 그러나 또한 이것은 우리를 위해 율법을 완전하게 준행하신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기초한다 ... 우리의 죄책이 십자가에서 종결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즉 그분의 수동적 순종을 근거로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근거한 그분의 완전한 의로 옷 입게 된다.”(프란시스 쉐퍼의 말/ 신 교수의 책 132-133)

프란시스 쉐퍼의 말도 우리의 죄 문제가 십자가로 해결되고, 우리의 칭의는 그리스도가 율법을 지키심으로 가능했다는 비성경적인 주장이다.
 

맺는 말

신호섭 교수의 연구로 우리는 복음을 훼손하는 거짓 신학의 거대한 강물을 보게 되었다. 그릇된 신앙으로 헛된 명성을 누렸던 유명한 사람들의 실상을 알게 되었다. 성경은 규모나 외적인 화려함이 아니라 어떤 터 위에 집을 지었는가만을 중요시한다.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 3:10,11)

그리스도 위에 세운 집이 아니면 하나님의 심판의 때가 다 불살라지고 없어진다고 사도 바울은 말했다. 칼빈신학교에서 박사를 얻으면 무엇하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박사를 했으면 뭐하겠는가? 거짓 신학으로 하나님을 괴롭게 하였다면 상급은 고사하고 저주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전 3: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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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