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추수감사절을 보내며

여호와께 감사하라

시편 136편의 기자는 성도들에게 ‘여호와께 감사하라’고 요청한다. 그 이유는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 한 분만 선하시다(막 10:18). 그 분과 그 분이 행하시는 모든 것이 선하시다. 또한 그 분은 인자하시다. 뿐만 아니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시다.

‘인자’란 ‘은혜’, ‘친절’, ‘호의’, ‘사랑’, ‘자비’, ‘긍휼히 여김’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다. 하나님께서는 그 피조물, 특히 그 백성들에게 영원히 인자하실 것이다. 그것이 백성들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 이유다. 감사란 ‘은혜나 호의를 받은 자들이 느끼는 기쁘고 흐뭇한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선하신 그 분이 홀로 하나님이시다. 홀로 주권자가 되신다. 선하신 창조주께서 창조를 하셨다. 홀로 하나님이시면 주권자이시며 창조주이신 그 분이 악하다면 피조물들에게는 저주요 재앙이다. 그 분은 그 선하신 권능으로 백성들에게 ‘좋은 것’으로만 주실 것이다. 그 분이 백성들에게 주시는 모든 것은 절대적으로 선한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징계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한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히 12:11)

슬퍼 보이는 징계조차도 그 선하심에 기인한다. 징계는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아들이라는 증거다(히 12:6). 따라서 우리가 감사치 못할 조건은 없다. 하나님의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 때문에 그 백성들은 어떤 상황,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감사해야 한다.
 

패역한 인간

그런데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거의 대부분 ‘은혜’나 ‘호의’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오히려 ‘악’이나 ‘학대’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감사하기 보다는 오히려 원망하고 불평한다. 시편 136편 10절부터 16절까지는 출애굽과 광야여정에 관해 말씀한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대로 약 사백 년이 지나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신다. 백성들은 열 가지 재앙과 홍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권능과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보았다. 홍해를 건넌 후 그들은 춤을 추며 찬양했다. 인간의 어떠한 말로도 표현되지 않는 감격이었고 어떠한 감사로도 다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도 때도 없이 출애굽과 광야 여정을 저주한다.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민 21:5)

시편 기자는 선하심과 인자하심의 은혜이기에 감사하라고 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실상 이스라엘 백성들은 진저리를 친다. 우리는 대부분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이렇게 반응한다. 백성들이 원망한 이유를 바로 전 절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백성이 호르산에서 진행하여 홍해 길로 좇아 에돔 땅을 둘러 행하려 하였다가 길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길이 불편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마음이 상했다. 그러자 그 엄청난 은혜가 원망거리로 바뀐 것이다. 그런데 ‘은혜’로 다가오는 섭리들이 우리를 불편하게 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마음을 상하게 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히브리서 기자는 ‘징계’가 ‘사랑’이라고 했다. 징계가 사랑이며 은혜인 이유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때문이다. 그리고 의의 평강한 열매는 이 세상에서는 맛보지 못할 수도 있다. 저 천국까지 열려진 시각이 있어야 그 ‘의의 평강한 열매’의 가치를 알 수 있다. 그래서 징계는 이 세상의 관점으로는 슬프고 불편하고 마음 상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그 백성이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는 것이다. 믿음의 선진들의 삶을 보아도 이것은 잘 알 수 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다윗, 솔로몬, 다니엘과 같은 분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대표자들로 기록된다. 그런데 그들의 삶이 평안하고 행복했는가?

"우리의 년 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 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2:23)

시편 90편은 모세의 시편으로 알려져 있다. 전도서는 우리가 알다시피 솔로몬이 지었다. 이스라엘 최고의 지도자요 선지자로 존경받는 모세이다. 솔로몬은 역사상 가장 영화로웠던 왕이다. 그들이 인생을 그렇게 노래한다. 다윗의 일생은 인간적인 기준으로 행복했는가? 다니엘은 총리를 지냈기에 그 일생은 행복했는가? 험악한 인생의 대표격(창 47:9)인 야곱은 벧엘에서 돌 베개를 하고 자다가 하나님을 만난다. 하나님께서 틀림없이 그에게 복을 주셨다. 그 이후 약 4-50년의 야곱의 인생이 바로 ‘험악한 세월’이다. 벧엘 이전 칠십 수년의 인생은 성경의 기록은 없지만 부유한 아버지 슬하에서 어머니의 편애를 받으며 평탄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복이 선포된 이후의 삶이 야곱에게는 끔찍한 삶이었다. 하나님의 은혜요 복이 야곱이 피부로 느끼기에는 ‘험악’했다는 것이다.

야곱이 그 ‘험악한 세월’을 보낸 이유가 무엇인가?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기 위함이다. 그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단 한 가지다. 타락한 죄성을 제거해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것이다. 그래야 거룩하신 하나님과 천국에서 영원한 지복을 누리며 살 수 있다.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백성의 삶의 유일한 목적은 바로 이것이다. 징계도 그래서 필요하다. 고난도 그래서 필요하다. 어려움과 고난을 당하는 그 상황에서는 그 이유와 의미를 모를 수 있다. 아니, 대부분 모른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당시에는 … 슬퍼 보인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답게 만드시기 위해 허락하시는 ‘선하심과 인자하심’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감사할 일이다.

 

우상숭배적 감사

이스라엘 백성들도 길이 편안하고 시절마다 과일과 고기와 포도주가 종류를 바꾸어서 나왔다면 소고치고 춤추며 하나님을 찬양했을 것이다. 그것은 은혜로 느껴졌을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심신의 필요가 채워지는 것을 은혜요 복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우상에게 바라는 것도 심신의 욕구이다. 그래서 그것들이 채워지면 감사한다. 그런 경우 누구나 감사할 수 있다. 기독교의 감사는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물론 어려운 일이 해결되고 필요가 채워졌을 때 기독교인도 감사한다. 그러나 우상 숭배자들은 전혀 감사할 수 없는 조건 속에서 감사할 수 있어야 참된 기독교적 감사가 된다.

 

기독교의 감사

메이플라워를 타고 신대륙으로 온 믿음의 선배들(이하 메이플라워호)이 겪었던 일들은 여기서 자세히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함께 온 많은 사람들이 죽고 극심한 추위와 식량난으로 고통당했다. 죽은 사람들은 아내요, 남편이요 자식이요 친구들이다. 그들이 신대륙으로 온 이유는 단지 하나님을 바로 섬기기 위해서였다. 유럽의 모든 생활기반을 다 버리고 오직 신앙을 찾아왔다. 그랬다면, 오늘날의 변질된 복음의 관점으로는 하나님께서 무언가를 해주셨어야 한다. 그러나 이들은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혔다. 그것도 아주 깊이.

그런데 이들은 다음 해를 보장할 수도 없는 조촐한 수확물을 하나님 앞에 올리며 진정한 감사를 드렸다. 이것이 추수감사절의 기원인 것을 우리는 다 안다. 어떻게 감사할 수 있었을까?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의 영원하심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자신들이 느끼는 ‘표피적 감각’에 따라 반응하지 않았다.

필자는 깊이 자문해본다. 과연 메이플라워호의 상황이라면 감사할 수 있었을까? 도저히 자신이 없다. 아내가 굶주림에 죽어가고 아이들이 풍토병에 죽어가고 먹을 것도 없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 그것도 오직 신앙만을 위해서 찾아온 신대륙에서 그런 일을 당했다면 배신감에 몸을 떨며 하나님을 저주하지 않았을까?

목사로서 필자는 또 자문을 해본다. 메이플라워호의 감사는 과연 어디서 기인한 것인가? 그들이 들었던 복음은 어떤 것인가? 그들은 어떤 신앙의 훈련을 받았는가? 필자를 비롯한 우리가 들은 복음과 받은 훈련에는 그런 경우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이 없다. 아주 짧은 순간 고통을 당하다가 순교하는 일이라면 혹시 또 모르겠다(이것도 깊이 생각해보면 진정한 믿음에 의한 것은 아니겠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메이플라워호의 상황은 이야기가 다르다.

목사로서 메이플라워호의 복음을 회복하고 싶다. 그 믿음을 회복하고 싶다. 우리 성도들에게 어떤 상황과 어떤 환경 속에서도 저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진정한 감사를 할 수 있는 복음의 능력을 가르치고 싶다. 그런데 목사 자신이 그런 믿음과 능력이 없다.

70년대 이후 여의도의 초대형 교회에서 흘러나온 이상한 복음(?)에 한국 교회는 메이플라워호의 복음을 잃어버렸다. 복음의 능력도 사라졌다. 강단에는 우상 숭배적 가르침이 넘쳐나고 교인들은 우상에게 절하면서도 그것이 우상인지도 모른다. 각자의 마음속에는 ‘금송아지’가 한 마리씩 들어있다. 물론 그것은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처음부터 들은 것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한다.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요1 2:24)

다시 돌아가야 한다. ‘처음부터 들은 것’을 회복해야 한다. 그다지 희망은 없다. 성경은 마지막 때에 대해서 그리 희망적으로 말씀하지 않는다. ‘대추수의 때’, ‘대 부흥의 때’는 거짓 선지자의 선동일 뿐이다. 오히려 예수님은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8)고 말씀하신다. 성경의 기조가 그렇다. 그러나 언제나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한 칠천 인’은 남겨두신다. 이 칠천 인에게 바른 복음이 전해지기를 소망해본다.

 

한모세 목사(thdhan@gmail.com) / 그루터기 장로교회(아리조나)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바른믿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