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는 은혜의 방식으로 왔다. 특히 특별계시는 하나님의 호의로 왔다. 그러므로 은혜는 죄의 상해를 치료하고 구원하기 위해서 왔다. 은혜는 자연의 완성과 양양을 위해서 온 것이 아니다.

그러나 로마교회에 의하면 본래 자연은 고유한 존재로 있고 그 후 은혜가 추가적으로 와서 자연을 보충한다. 처음에 인간이 가졌던 원시의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고 추가적 은사로서 초자연적이다. 이 추가적 은사에 의해 처음 창조된 인간의 본성이 완전해졌다. 이처럼 은혜는 자연을 보충한다. 그러므로 자연은 처음부터 완전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은 처음 창조되었을 때에는 아직 불완전하고 본래적 존재보다 저급한 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자연은 그 본성대로 되기 위해 은혜를 필수적으로 요구한다. 자연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실체이고, 은혜가 추가적으로 와서 자연을 보충한다. 부족한 자연을 보충할 뿐만 아니라 앙양한다. 로마교회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은혜는 자연을 찢는 것이 아니가 자연을 완성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자연에 추가적으로 온 은혜는 자연을 앙양하고 피조 상태를 넘어서서 진적 존재에까지 동참하게 한다. 이렇게 보면 은혜가 자연보다 더 높은 차원이다. 따라서 로마교회에 위하면 은혜는 죄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대립한다.

개혁신학에 의하면 은혜는 자연을 보충하고 앙양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회복한다. 은혜가 와서 자연을 억압하거나 능가하는 것이 아니라 회복한다. 로마교회에 의하면 원시의는 추가적인 은사이다. 따라서 초자연적 은사이다. 그러나 개혁신학에 의하면 원시의는 자연적 은사이다. 창조와 함께 왔으므로 자연적이고 동시적이지 추가적이 아니다. 그러므로 은혜는 자연을 보충하고 앙양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회복한다.

은혜가 오면 초자연적인 것이 오기 때문에 자연의 질서를 억압해도 되고 능가해도 되는 줄 아는 것은 잘못이다. 초자연적 은혜를 강조하는 곳에서는 자연의 법질서를 넘어설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은혜는 본래의 자연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고 새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은혜는 구속한다. 즉 창조를 회복한다. 구속은 이미 있는 것을 회복하는 것을 뜻한다. 구속은 기존의 자리에 새것을 세우는 새 창조가 아니라 재창조이다.

은혜가 다 해결해줄 줄로 알고 자연을 능가하려고 하는 것은 자연을 파괴하여 생명을 끝나게 한다. 그러므로 은혜가 있는 곳에 자연이 회복되므로 법질서가 바로 지켜진다 은혜는 죄를 제거하여 자연을 회복한다.

로마교회에 의하면 은혜의 역사는 자연의 회복이 아니라 보총과 앙양이기 때문에 구원 과정의 종국이 피조물의 수준을 넘어서서 신화하는 것이다. 이 신 되기가 구원 과정의 종국이다. 은혜는 본래 이 목적을 위해 주어졌다. 그러므로 은혜 혹은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의 통보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피조물의 한계를 넘어서서 신화한다. 종말에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을 직관할 때, 특별한 빛 곧 영광의 빛을 받아 영혼의 지성적 부분이 신화하여 하나님의 본질을 직관한다. 하나님을 직관할 때 신 되기가 일어난다.
 

 

현대신학도 동일하다. 로마교회나 개신교회의 일부 신학자들은 구원과정의 종국을 신화하는 데에 둔다. 칼 라아너(Larl Rahner)는 전통적인 전통적인 로마교회 신학에 칼 발트(Karl Barth)의 견해를 종합하여 신화를 모든 구원과정의 종국으로 본다. 이 목적을 위해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자기의 존재를 통보하여 피조물의 존재를 끌어올리되 현생에서부터 그렇게 하신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존재에 동참케 한다.

발트는 신학 논의를 회복에서 앙양으로 바꾸었다. 곧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서 자기의 생을 사신다. 계시와 성육신을 통하여 신인 연합을 이루어 자기의 존재에까지 인양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피조물의 한계선을 벗고 신의 존재에 동참하게 된다. 하나님은 피조물을 자기 존재에까지 인양함으로 자기가 사랑이심을 증명한다. 이것이 발트의 신학논의의 핵심이다. 다른 현대 자유주의자들도 동일한 입장을 취한다.

개혁신학에 의하면 은혜는 신 되기가 아니라 창조의 회복을 위해서 주어졌다. 은혜는 피조물을 돌이켜 하나님 섬김의 본래 자리에 이르게 한다. 그러므로 은혜를 입어 영화되어도 피조물의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다. 피조물의 한계선 안에 남는다. 회복된 피조물로 남는다. 은혜는 창조의 회복을 목표한다. 따라서 구속에 이른다.

종말에 구속된 상태가 영화에 이르므로 낙원 상태보다 앙양되었으나 피조물의 한계 안에 머무른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체처럼 영화되어도 피조물로 남으므로 피조물의 한계선을 벗어나서 더 높은 존재 곧 하나님의 존재에까지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로마교회의 가르침에 의하면 앙양은 회복된 피조물이 아니라 신 되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이 원죄로 정죄한 것을 구원과정의 종국으로 삼는 것이므로 성경적 진리로 받을 수 없고 배척된다. 그러므로 신학함에 있어서 은혜와 자연의 관계가 바르게 이해되어야 한다. (신학서론, 206-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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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철원 박사는 서울대학, 총신대 신학대학원(M.Div), 미국의 웨스트민스터 신학원(Th.M), 화란의 자유대학교(Ph.D)에서 연구하였다. 화란의 자유대학에서 칼 발트의 신학을 지지하는 지도교수 베인호프와 다른 발트의 제자 신학자들과의 토론에서 칼 발트의 신학의 부당성을 증명하였다. 발트의 사상을 반박하는 내용을 담은 논문 '그리스도 창조-중보자직'을 관철하여 박사학위를 얻었고, 이 논문이 독일 튀빙겐대학이 선정한 20세기의 대표적인 신학 논문 100편에 수록되어 한국 교회의 위상을 드높였다. 총신대 신대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수 십년 동안 목회자들을 길러내는 교수사역에 헌신하다 영예롭게 은퇴한 후에도 여전히 쉬지 않고 연구하시며 <바른믿음>의 신학자문 역을 맡아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