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모 목사의 성경 오역(誤譯), 오석(誤釋) 바로잡기(8)

글을 시작하며

소위 “떡 강청의 비유”로 잘 알려진 눅11:5-8의 예수님의 비유는 특히 한국교회에서 인기가 높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 비유를 통해 “기도는 하나님께 끈질기게 매달리면 아무리 뻔뻔한 기도 제목이라도 응답하신다”고 가르치신다고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에서, 물론 다른 예수님의 비유들도 다수 오해하고 있지만, 이 비유만큼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는 비유도 없을 것이며, 그러므로 이로 인한 영적 피해도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매우 심각하다. 왜냐하면 이 비유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기도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오래 전부터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이 본문을 소제로 “이 비유는 제목부터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면서 이 비유의 전통적인 해석의 문제점들을 비판했었다. 필자의 주장대로 이 비유의 제목이 정말 잘못되었다면, 잘못된 제목처럼 이 비유의 내용도 오해하고 있을 것은 불을 본 듯 분명한 일이다. 그래서 필자는 종종 “떡 강청의 비유”(‘강청’이 치명적인 오역이다. 따라서 앞으로는 단순히 “떡 세 덩이의 비유”라고 명명할 것이다)는 “악한 재판장의 비유”와 함께 한국교회의 기도를 망쳐놓은 슬픈 비유라고 말하면서 슬퍼하곤 한다.
 

본문 속으로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5-6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는가를 실감나게 설명하시기 위해서 “너희 중에 누가”라는 표현으로 듣고 있는 제자들을 비유의 주인공으로 초대하신다. 비유의 주인공은 밤중에 친구에게 찾아가서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고 부탁한다. 왜냐하면 그에게 갑자기 밤중에 여행 중에 있는 친구가 찾아 왔는데 대접할 음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6절).

그런데 여기서 “밤중에”라는 시간은 예수께서 의도적으로 설정하신 시간이라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웃을 귀중히 여기는 유대인들에게 다 자고 있는 “밤중에” 친구의 집에 찾아가는 일은 사실상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애매한 시간대인 “밤중에”를 의도적으로 설정하신 이유는 아무리 부탁하기 곤란한 시간과 처지라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녀는 주저하지 말고 하나님께 나아가 필요한 것을 구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나중에 상세히 언급하겠지만, 여기서 “밤중에”의 시간이 친구에게 가서 부탁하기 곤란한 시간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그 시간에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서 친구에게 찾아간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뻔뻔한 행동은 결코 아니다).

어떤 이들은 중동의 날씨를 염두에 두고, 뜨거운 낮에는 여행하지 않고 밤에 여행한다고 생각하지만,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밤에 여행하지 않는다. 중동 지역에서 밤에 여행하는 경우는 넓은 사막을 가로지르는 베두인들에게나 있는 일이다. 이들은 보통 낙타 행렬에 물건들을 싣고 다니는 상인들이다. 넓은 사막에서는 강렬한 태양빛이 내리쬐는 낮 시간에는 여행하기에 부적당하다. 그래서 보통 해가 진 뒤부터 밤에 사막을 가로지르는 여행을 한다. 물론 이때에도 혼자 여행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사막에서도 강도들이 자주 출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넓은 사막이 없는 이스라엘 지경에서는 특별하게 긴급한 상황이 아닌 이상 유대인들은 결코 밤에 여행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밤에 여행해야 한다면 여러 명이 함께 무리지어서 여행한다. 물론 이때에도 강도의 위험은 있다. 함께 가는 무리보다 더 많은 강도떼가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유대인들은 멀리 여행을 해야 한다면 해가 뜰 무렵, 사물을 구별할 수 있을 즈음에 집을 떠난다. 그리고 한 낮에는 그늘에서 적당히 쉬다가 해가 기울기 시작하면 길을 나서서 해가 질 때까지 여행을 한다. 만약 노숙 대신 동네에 들어갈 계획이 있다면 해가 지기 전에 동네에 들어간다. 왜냐하면 해가 진 후 어두울 때 동네에 들어가면 도둑이나 강도로 오해되어 공격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해가 지면 조명이 없어서 사람들은 거의 옥외에 나가지 않는다. 따라서 이런저런 이유들로 인해 당시 유대인들에게 밤에 다른 집을 방문하는 것은 거의 금기에 해당하는 사항이다.

유대인의 문화가 이런데도 예수님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떡을 빌리러 친구에게 찾아간 시간을 굳이 “밤중에”로 의도적으로 설정하신 이유는, 다시 말하지만, 비유의 주인공이 친구에게 빵을 빌리러 가야하는 시간이 ‘가서는 안 될 만큼, 그러나 그럼에도 꼭 가야만 하는’ 가장 곤란한 상황임을 제자들에게 인식시키기 위함일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렇게 극단적으로 곤란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 원하셨다. 7절을 보라.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7절)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가옥 구조는 한 건물의 실내 전체가 ‘하나’로 통해 있는 구조이다. 겨울이 되면 가축들도 ‘한 지붕 한 가족’이 된다. 그래서 한 밤중에 어떤 사람이 와서 집 문을 두드린다면 가족들은 물론이고 가축들까지도 일어나야 하는 상황이 되고 만다. 그러니 한 밤중에 남의 집을 찾아가는 것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거의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에게 “밤중에” 옆집을 방문해야 할 일이 생긴다면, 그 사람은 정말 곤란한 일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에 의하면 어느 날 갑자기 비유의 주인공의 집에 여행 중의 친구가 불쑥 찾아왔다. 그것도 모두 가 잠든 한밤중에 말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관습상 비록 친구가 한밤중에 자신의 집을 방문했다할지라도 그 친구는 자신의 동네와 자신의 집을 방문한 귀한 손님이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극진히 대접하는 것은 가장 귀한 덕목 중 하나였다. 그런데 밤중에 찾아온 친구가 저녁 식사를 하지 못한 것이 분명해서 음식을 대접해야 한다면 당연히 음식을 장만해서 대접해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비유의 주인공의 집에는 친구를 대접할 떡이 없었다. 유대인들은 손님을 대접할 때 반드시 새 떡을 제공해야 한다. 비유의 주인공이 이웃집에 떡을 빌리러 간 것으로 보아 비유의 주인공의 집에는 저녁에 먹고 남았던 떡은 많이 있었을지 몰라도 새 떡을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아무튼 비유의 주인공은 자기 집에 찾아온 친구를 잘 대접해야 하는데 지금(밤중에) 그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는 것이다.
 

떡 세 덩이의 비유는 유대인의 수치 문화를 알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유대인의 수치 문화에 비추어 보면, 비유의 주인공에게 “밤중에” 갑자기 생긴 상황은 유대인들에게는 자신 뿐 아니라 가족 전체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한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만약에 이 상황을 잘못 처리하기라도 한다면, 어쩌면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동네에서 쫓겨나거나 그렇지는 않더라도 죽음보다 더 싫은 수치를 동네 사람들에게 당해야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의 유대인의 관습을 모르는 21세기의 우리들은 이런 상황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교회들이 이 비유를 엉터리로 해석하고, 그것을 그대로 ‘기도’에 적용시키므로 기도를 망쳐버리는 비극을 만들어 내고 말았다.

유대인들에게 낮이든 밤이든 상관없이 자신의 집에 찾아온 손님을 극진히 대접하는 것은 집안의 명예와 자신이 속해 있는 마을의 명예가 걸려있는 대단히 중대한 일이었다. 그래서 당사자는 자신의 집에 찾아온 손님을 최선을 다해 극진히 대접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과 자신의 동네의 명예가 동시에 걸려있는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의 집에 손님이 방문했는데도 대접할 새 떡이 없다는 이유로 만약 그 손님을 그냥 방치한다면 큰 문제가 생기게 된다. 왜냐하면 다음날 이 사실이 동네에 알려지게 될 것이며(고대 사회의 개방된 마을의 구조로 볼 때 동네 사람들은 반드시 이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마을의 명예를 손상시킨 중대한 이유 때문에 그 집은 동네에서 쫓겨나거나 설령 쫓겨남을 면한다할지라도 수치를 모르는 뻔뻔한 집안으로 손가락질 당하므로 비유의 주인공과 그 가족들은 죽음보다 싫은 수치를 당해야 한다.

따라서 비유의 주인공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 그리고 더 나아가 마을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밤중에 불쑥 찾아온 친구를 잘 대접하기 위하여, 가기에는 곤란한 시간인 “밤중에”라도 옆집 친구 집에 떡 세 덩이를 빌리러 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비유의 의미를 오해하지 않으려면 비유의 주인공이 “밤중에” 떡을 빌리려고 친구 집에 간 것은 유대인의 관습으로 볼 때, 예의에 벗어난 뻔뻔한 행동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하며, 오히려 떡 세 덩이를 빌리러 온 자의 청을 7절(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의 이유로 거절한 자가 뻔뻔한 자, 수치를 모르는 자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손님을 잘 대접하여 동네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자신에게 떡 세 덩이를 빌리러 온 자의 청을 거절함으로써 동네의 명예를 더럽혔기 때문이다.

비유의 주인공이 밤중에 친구의 집을 찾은 것은 수치를 모르는 뻔뻔한 짓이 아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5-6절)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신다.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7절)

예수님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신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8절)

이렇게 예수님의 비유는 끝이 난다. 그러나 교회들이 지금까지 예수께서 말씀하신 이 비유의 결론(8절)을 엉터리로 해석하고 적용하는 바람에 한국교회의 기도는 비극 그 자체가 되고 말았다.

이 비극은 헬라어 원문의 “avnai,deian”(아나이데이안/“avnai,deia”의 목적격)를 “간청함”(한글개역에서는 개역개정의 “간청함”보다 더 강압적인 의미를 가진 “강청함”으로 번역했다)으로 오역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런 해석은 잠을 자고 있던 친구가 그 시간에 떡을 빌리러온 친구에게 떡을 빌려주려면 밤중에 식구들을 다 깨워야하는 상황이므로, 친구라는 관계 때문이라면 모른척했을 텐데, 그럼에도 비유의 주인공이 너무나도 간절하게 간청(강청)했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라도 어쩔 수 없이 떡을 빌려주었다는 의미로 오해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 비유의 제목이 “떡 강청의 비유”로 불려 질 수 있었으며, 또 이 비유의 교훈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는 간절히 간청(강청)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하신다. 그러므로 중간에 포기하지 말고 응답될 때까지 끝까지 끈질기게 하나님께 매달려라“가 되고 만 것이다. 그런데 이 비유에 대한 오해가 여느 다른 말씀에 대한 오해보다 더욱 심각한 이유는 다시 말하지만 이 비유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기도에 관한 비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해된 비유의 교훈대로 기도한다면, 기도하는 모든 자가 망할 수밖에 없을 만큼 심각하다.
 

“avnai,deia”(아나이데이아)를 왜 “간청(강청)함”으로 오역했을까

“avnai,deia”(아나이데이아)를 “간청(강청)함”으로 오역할 수밖에 없었던 첫 번째 이유는 해석자들이 유대인이 아닌 서구인의 관점에서 이 비유를 해석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비유의 주인공이 밤중에 친구 집에 찾아간 행동은 서구인의 관점에서 보면 예의에 벗어난, 뻔뻔한 짓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해석자는 ‘뻔뻔함’, ‘수치를 모름’을 떡 세 덩이를 빌리러 친구의 집에 간 비유의 주인공에게 적용하는 실수를 범하고 만 것이다. 그런데 ‘뻔뻔함’, ‘수치를 모름’의 의미를 가진 “avnai,deia”(아나이데이아)를 “간청(강청)함”으로 의역한 이유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 뻔뻔함으로 기도한다는 것이 아무래도 어색하니까 해석자는 좀 더 자연스럽게 하기 위해 ‘뻔뻔함’을 “간청(강청)함”으로 의역했을 것이다.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뻔뻔함’을 “간청(강청)함”으로 의역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2세기 중세교회 시대의 수도승 유미티우스(Euthymius)가 눅11:8의 “avnai,deia”(아나데이아)를 “끈덕진 간구”로 해석하고 가르친 것이다. 유미티우스(Euthymius)도 “수치(부끄러움)를 모름, 뻔뻔함, 주제넘음”의 의미를 가진 “avnai,deia”(아나데이아)를 “강청함”(간청함)으로 이해하고 가르친 것은 그도 자신이 살아온 서구 문화에 비추어 볼 때, 본문 7절(....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의 상태에 있는 친구에게 찾아가서 문을 두드리는 것을 ‘예의가 없는 뻔뻔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유미티우스(Euthymius)가 “avnai,deia”(아나데이아)를 “뻔뻔함, 수치를 모름”으로 해석하지 않은 이유는 앞에서 언급한대로 이 단어를 기도에 적용시켜 ‘뻔뻔하게 기도하라’라고 가르치기에는 적절치 않다고 보고, 조금 순화시켜 “끈덕지게 기도하라”고 의역해서 가르친 것처럼 보인다.

아무튼 슬프게도 “기도가 하나님의 뜻을 바꿀 수 있는 수단”인 것처럼 가르친 타락한 중세교회의 비극적인 기도 교훈이 지금 우리에게까지 전해져 온 셈이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기도 많이 한다는, 소위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은 자신의 소원을 정해 놓고, 그것을 관철시키기 위해 특새, 금식 기도, 철야기도, 또는 왕의 기도, 방언 기도 등으로 하나님을 설득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비유를 통해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교훈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 참이나 멀다.
 

그러면 이제 예수님이 말씀하신 “avnai,deia”(아나이데이아)가 결코 “간청(강청)함”(끈질긴 간구)의 의미가 아닌 이유들을 살펴보자.

먼저 참고로 알아야 할 것은 “강청함”으로 번역된 “avnai,deia”(아나이데이아)가 신약성경에서 여기에만 쓰였기 때문에 사실상 이 단어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어원적으로 “avnai,deia”(아나데이아)의 의미를 추정하는데는 별 어려움이 없다. “avn”의 부정 접두어와 “예의 바름, 뻔뻔하지 않음, 수치를 앎”의 의미를 가진 “avvidw,j”(아이도스)의 합성어가 거의 틀림없으므로, “avnai,deia”(아나데이아)의 의미를 “수치(부끄러움)를 모름, 뻔뻔함, 주제넘음” 등으로 본다(바우어 헬라어 사전, p.101).

첫째, 성경 밖의 다른 어떤 고대 헬라어 문헌에서도 ‘뻔뻔함, 수치를 모름’ 등 의미를 가진 “avnai,deia”(아나이데이아)가 “강청함”의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다.

둘째, 예수님의 비유 속에서 떡을 빌리러 간 비유의 주인공은 한 번 그의 친구에게 떡을 빌려달라고 했을 뿐이지 결코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부탁하며 강청하지 않았다.

셋째, 예수께서 7절에서 질문하신 “~네게 줄 수 없노라 하겠느냐”는 “ouv”(우)를 동반한 의문문이라는 사실이다. 헬라어에서 “mh,”(메)를 동반한 의문문은 부정의 답을 원하는 질문이지만, “ouv(ouvc)”(우/우크)를 동반한 의문문은 긍정의 답을 원하는 질문이다. 예를 들면 요9:40에서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는 질문은 “mh,”(메)를 동반한 의문문이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우리는 소경이 아니다”라는 부정의 답을 요구한다. 반면에 마13:55의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는 질문은 “ouvc”(우크)를 동반한 의문문이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맞다. 그리고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맞다”는 긍정의 답을 요구한다.

따라서 “~네게 줄 수 없노라 하겠느냐”는 “ouv”(우)를 동반한 예수님의 질문은 “~네게 줄 수 있다”의 긍정의 답을 요구하시는 질문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이 질문을 통해서, 떡을 빌려달라는 부탁을 받은 친구가 자신이 아무리 귀찮고 어려운 처지에 있다 할지라도, 부탁한 친구에게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는 거절은 결코 할 수 없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다. 또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이 질문은 그 친구가 아무리 사정이 힘들어도 반드시 떡을 빌려준다는 말씀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8절(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이 바로 그 말씀이다.

다시 말하지만 유대인의 수치 문화에서 보면 “밤중에” 떡을 빌리려고 친구 집에 간 것은 예의에 벗어난 뻔뻔한 행동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떡 세 덩이를 빌리러 온 자의 청을 7절(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의 이유로 거절한 자가 뻔뻔한 자, 수치를 모르는 자이다. 왜냐하면 그는 손님을 잘 대접하여 동네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자신에게 떡 세 덩이를 빌리러 온 자의 청을 거절함으로써 동네의 명예를 더럽혔기 때문이다.
 

비유의 주인공은 그 친구 집에 새 떡 세 덩이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먼저 살필 것은 왜 하필이면 “떡 세 덩이인가?”이다. 혹자는 “떡 세 덩이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의미하며, 기도는 전능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구하는 것이며, 그러면 삼위일체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다 주신다”는 둥 자신 있게 헛소리를 한다. 또 유대인의 삶의 정황을 어느 정도 아는 이들은 “떡 세 덩이”는 당시 성인 한 사람의 한 끼 식사량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이 추측은 떡 세 덩이를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이해하는 것과 비교하면 나름대로 사실에 입각한 괜찮은 접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추측은 유대인의 식사 관습 하나를 빠뜨렸으므로 정밀한 추측이라고는 볼 수 없다.

보통 한국 식사 관습을 보면 손님에게 밥 한 그릇 듬뿍 퍼드리고 나서, 보통은 ‘이것 다 드시고 더 드시고 싶으시면 말씀하세요. 더 드릴게요’라고 말한다. 이런 면에서 당시 유대인들도 우리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르다. 그들은 한 끼의 식사를 상에 올리고 혹시 손님이 더 먹고 싶을지도 모른다는 계산까지 해서 여분의 음식을 더 올린다. 그렇다면 떡 세 덩이는 성인 한 끼의 식사 분량에 여분의 음식까지 포함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보통 유대인 성인의 한 끼 식사량은 떡 두 개인데, 여분의 음식으로 떡 한 개를 더 생각하고, 비유의 주인공은 옆집 친구에게 떡 세 덩이를 빌리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비유의 주인공이 떡 세 덩이를 빌리려고 간 집이 하필이면 그 친구의 집일까? 다시 말하면 비유의 주인공은 떡 세 덩이를 빌리러 간 그 집에 새(new) 떡 세 덩이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이것도 당시의 유대인의 삶의 정황을 알면 쉽게 답을 찾을 수 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보통 아침 일찍 가족들이 먹을 하루 분량의 떡을 굽는다. 그래서 저녁 식사 시간이 훌쩍 지난 “한밤중에” 새 떡이 있는 집은 거의 없다.

그러므로 그 시간에 어떤 집에 새 떡이 있다는 것은 그리 흔한 상황이 아니다. 그러나 아무튼 이 비유의 주인공은 자신의 친구인 그 집에 새 떡 세 덩이 이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갔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알았을까? 아마도 그의 아내가 비유의 주인공에게 정보를 주었을 것이라는 합리적인 추측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대단히 부자가 아닌, 서민들은 여러 가구들이 모여 함께 떡을 굽는다. 그래서 이웃들은 오늘 누구 집에 떡을 몇 개 굽는지 대강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아비가일’네 집은 가족이 5명이이서 그날 필요한 떡이 10~12개 정도이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아비가일’네 집에서는 떡을 20개 이상 구웠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니, 내일 아침은 사정이 있어서 떡 구울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오늘 내일 필요한 떡까지 굽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비유의 주인공은, 아마 그의 아내가 일러주었겠지만, 오늘 밤 ‘아비가일’네 집에 새 빵이 적어도 세 개 이상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비유의 주인공은 자신의 친구인 그 집에 새 떡 세 덩이를 빌리러 간 것이다. 물론 그는 밤중에 가더라도 그 친구는 나의 둘도 없는 친구이니까 틀림없이 새 떡 세 덩이를 빌려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 친구 집에 갔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기도의 교훈을 만나야 한다. 비유의 주인공은 친구에게 새 떡을 빌려달라고 부탁하면 친구가 자신의 부탁을 들어줄 것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그 친구 집에 떡을 빌리러 갔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찾아간 친구에게 빌려줄 새 빵이 없었다면 그는 분명이 허탕을 쳤을 것이며, 그랬다면 자신과 가족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비유의 주인공은 그 친구 집에는 나에게 빌려줄 새 빵이 세 덩이 이상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며, 또 내가 이 밤중에 찾아가 부탁을 해도 그 친구는 나의 부탁을 들어줄 것을 믿었기 때문에, 그 밤중에 친구에게 찾아가서 사정을 이야기하고 떡을 빌려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글을 마치며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는 하나님의 자녀의 당연한 태도이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응답을 이끌어 내는 조건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기도 응답의 조건은 비유의 주인공처럼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공의 하나님이줄 알고, 정욕으로가 아니라 정당한 기도 제목으로 기도하는 것이며, 또 기도하는 자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시며, 나의 아버지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굳게 믿고, 아무리 곤란하고 어려운 문제라할지라도, 주저하지 아니하고 “밤중에”라도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기도 응답의 조건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의 열심, 간절함 등은 기도하는 자의 믿음의 다양한 표현일 따름이다. 기도응답의 조건을 굳이 언급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녀이기 때문이며, 자녀에게 언제나 거저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특별한 기도응답의 방법(방언기도 등....)을 가르치거나 특별한 기도응답의 방법을 수단으로 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기도응답을 위해 내편에서 무엇인가의 조건을 동원하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을, 은혜의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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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