쯔빙글리와 함께 예배당 안의 상들을 제거한 취리히 교회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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쯔빙글리와 함께 예배당 안의 상들을 제거한 취리히 교회 공동체
  • 이승구
  • 승인 2019.12.23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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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구 박사
이승구 박사

넷째로,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자신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그 건물을 둘러보았을 때, 앞자리에 있는 십자가에 예수의 상(像)을 비롯해서 수많은 상(像)들이 예배당 안 밖에 있음을 보고서, 그것이 하나님을 어떤 형상으로 만들어 그 앞에 절하지 말라는 십계명의 조항을 위반한 것이 된다는 것을 제시하는 설교자 쯔빙글리와 그 말씀을 듣고서 성도들과 온 시 전체가 우리에게 잘못된 것이 있음을 깨닫고 고치는 일들이 있게 된 것은 말씀에 의해 교회 공동체가 개혁된 매우 가시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 예다.
 

여기 중요한 세 사람들이 있다.

첫째는 하나님 말씀의 뜻을 제대로 해석하여 가르치는 목회자이다. 그가 십계명에 있는 상(像) 금지 조항을 당시의 교회와 관련하여 가르치지 않았으면 사람들은 천년 이상의 관습 속에서 무엇이 잘못된 것일 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둘째는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깨닫고 교회가 그 말씀에 근거한 모습을 가지도록 하려고 애쓰는 백성들이 있다. 이런 분들이 없었으면 설교자의 목소리는 공허한 메아리만 울리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말씀을 듣고 바로 실천하려는 민중들이 중요하다. 말씀은 말씀이고 우리의 삶은 우리의 삶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런 획시기적인(ephocal) 역사를 이루지 못한다.

셋째는 이것이 폭도들에 의한 파괴처럼 보이지 않고,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것이 되도록 질서를 잡아 취리히 시 전체의 예배당에서 체계적으로 상을 제거하도록 결의하고 이 일을 이룬 취리히 시의 경건한 정치 지도자들이 있다.

물론 취리히에서 처음부터 이렇게 질서 있게 상 제거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1523년 9월에 성도들이 사적(私的)으로 상들을 파괴하는 일이 있었다. 이 문제와 다른 곳에서 일어난 비슷한 문제들 때문에 시의회는 1523년 9월 29일에 예배당의 장식과 다른 문제들을 다룰 위원회를 만들었으니, 이 위원회는 8명의 지도적인 시의회 의원들과 세 명의 시민 사제들(쯔빙글리, 하인리히 엥겔하르트, 그리고 이런 문제에 대해서 늘 앞장서서 작업하고 설교하던 레오 유드)로 구성되었다.

이 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대의회는 이 문제를 논의하는 모임(disputation)을 가지기로 하고, 1523년 10월 26-28일에 “10월 논쟁”이 있게 된다. 주로 취리히와 그 인근의 성직자들을 초대하였지만 일반 시민들도 참석하였고, 콘스탄츠 대주교와 츄르(Chur) 교구 주교와 바젤의 주교, 바젤 대학교의 대표자들도 초대하고 12개의 스위스 연방 주들의 대표자들도 초대하였다. 그러므로 취리히 시의회의 의도는 이 논의(disputation)가 스위스 연방의 문제가 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는 개블러의 말은 매우 의미 있다. 그러나 결국 콘스탄츠 주교나 다른 연방 대표자들이나 다른 주교들도 참석하지 않아서 결국 취리히 시만의 논의가 되었다. 그래도 아마도 250명의 사제들을 포함하여 900명 쯤 모여서 성경에 근거해서 예배당 안의 장식 문제를 논의하는 것을 들었으니, 이 논의가 “커다란 주해적 회합”(large exegetical congress)이었다는 에밀 엥글리의 표현은 매우 적절하다.

그 후 1523년 11월에 시의회는 먼저 성경으로부터 상들은 없애야 한다는 것을 잘 가르치고서 천천히 상들을 제거하라는 규례를 통과시켜서, 쯔빙글리, 콤투르 쉬미트(Komtur Schmid), 그리고 (카펠에 있는 시스테리안 수도원 원장인) 볼프강 요너(Wolfgang Joner) 등이 순회하면서 왜 예배당 안에 상(像)들이 있어서는 안 되는 지를 잘 가르치고, 1523년 11월 17일에 작성된 “‘작은 기독교 입문”(Kurze, christliche Einleitung, A Short Christian Introduction)이 이런 목적을 위해 배포되었으니, 이는 아우구스트 바우어가 잘 표현한 바와 같이, “취리히 종교개혁의 공적신앙고백적 문서”라고 할만하다.

이 모든 개혁적 문제에 대해서 늘 반대하던 당시 취리히에서 가장 존중되던 참사회원인 호프만(그래서 그는 아예 Canon Hofmann이라고 불렸다, 1454-1525)은 1524년 1월 13, 14일에 있었던 소위 “3차 논쟁” 이후에 취리히를 떠났고, 그 이후에 취리히에서는 종교개혁에 반대하는 적극적 운동이 수그러들었다.

그리하여 1523년 10월 논쟁 이후 8개월이 지난 1524년 6월 15일에서야 “취리히 예배당으로부터 상들을 질서 있게 제거하는 일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6월 20일부터 7월 2일까지 상들의 제거가 이루어졌고, 그 중 성 안나의 성화가 제거되고 불태워지는 일은 6월 24일에 일어났다고 한다. 쯔빙글리는 “시의회와 백성들의 결정으로 성화들이 제거되자마자 경건한 삶과 도덕적 열정이 새롭게 엄청 꽃을 피웠다”고 쓰고 있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서 취리히 시에서 일어난 일이 후에 뮨스터에서 재세례파에 의해서 일어난 것과 같은 소요로 기억되지 않고, 취리히 시 전체의 종교 개혁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 세 종류의 사람들이 각기 자신들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할 때 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이 땅에 드러낼 수 있었다. 여기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묘한 방식이 나타난다. 세 종류의 사람들이 각기 자신들에게 주어진 은사에 따라 최선을 다한다. 설교자는 부지런히 순전한 말씀을 가르치고, 백성들은 그 말씀이 과연 하나님의 뜻인가 하고 듣고 성경적임을 확인하였으면 그것대로 하려고 하고, 경건한 정치 지도자들이 가장 질서 있는 방식으로 그 일이 구현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고 실천하였다. 그런데 결국 하나님께서 그 배후에서 일하여 취리히에 개혁된 교회가 있게 된 것이다.

1528년 1월의 베른 논쟁 후에는 베른에서도 예배당 안에 상과 제단화, 그리고 제단이 제거되었다. 이 논쟁이 마쳐지고 바로 그 다음 날인 1528년 1월 27일 베른 시 의회는 “오래된 잘못을 바꾼다”고 공시하고, 그 다음 날 베른 시 예배당의 성상과 제단과 제단화 등을 제거했다. 이즈음에 베른을 떠나기 전에 행한 설교에서 쯔빙글리는 “진리가 승리한다고 확신한 여러분은 여러 가지 성화와 제대, 그리고 그 밖의 물건들을 없앤 예배당 안에 지금 이렇게 모였습니다”라는 말로 설교를 시작한다. 이 설교에서도 쯔빙글리는 오래 참음을 강조한다. “이 오래 참음이라는 덕목이 없으면 정의를 세울 수도 없고 그리고 그 정의를 끝까지 이룰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루고자 하는 것은 아주 분명하게 강하게 말한다. 그의 설교의 한 부분을 들어 보라:

진심으로 존경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성상을 만드는 일과 돈을 받고 미사를 진행하는 일, 그리고 그 밖의 것들을 비판하기 위해 여기 와 있습니다.... 나는 모든 개인의 양심에 호소합니다. 그동안 얼마나 우리가 십자고상(十字苦像)을 좋아했습니까? 예전에는 모든 사람이 다 그 십자고상(十字苦像)을 쓰다듬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이제 우리가 그 십자고상을 불쏘시개로 태워 버리는 것에 대해서 전혀 어려워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제야 비로소 그 성상들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닌 물건이 되었다는 표시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고상들이 (우리)들의 마음에서 제거된 것입니다!

[그것들을 떼어 낼 때] 어떤 성상은 목이 떨어져 나갔고, 어떤 성상은 팔이 비틀어져 나갔어도 아무 반응이 없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하나님과 함께 있는 성인들’이라면 또한 하나님에 의해서 봉헌된 성인이라며, 우리가 그런 일을 할 때, 그 성상들은 실제로 우리가 인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승구 교수는 총신대학(B.A), 서울대학교 대학원(M.Ed), 합동신학원(M.Div), The University of St. Andrews(M.Phil., Ph.D), Yale Universty Dvinity School(Research Fellow)에서 신학연구를 하였고, 현재는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의 조직신학 교수로 일하고 있다. <톰 라이트에 대한 개혁신학적 반응>(합신대학원출판부, 2013), <우리 이웃의 신학들>(나눔과 섬김, 2015) 등 약 15권의 귀중한 저서들과 다른 수 많은 역서들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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