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섭 교수의 '개혁주의 전가교리' 독서(3): 들어가는 말 부분

신호섭 교수의 <개혁주의 전가교리>를 주의 깊게 살펴보는 이유는 오직 하나이다. 비성경적인 사상이 개혁신학이라고 포장되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고, 하루 속히 바로 잡아야 우리 모두가 살기 때문이다. 오늘은 신호섭 교수의 책의 <들어가는 말> 부분을 살펴보고자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종교개혁자들의 칭의에 대한 이해에서,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에 나타난 순종의 전가 교리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롭다고 칭해 주시는 칭의 교리의 중대한 토대가 되어 왔다 ... 우리는 이러한 개혁주의 전통을 프랑스의 존 칼빈과 테오도르 베자(Theodore Beza), 영국의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 그리고 휴 라티머(Hugh Latimer)와 윌리엄 에임스(William Ames),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 존 오웬(John Owen) 등과 같은 청교도 신학자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신호섭 교수, 23 페이지)

신호섭 교수가 테오도르 베자, 토마스 크랜머, 휴 라티머, 윌리엄 퍼킨스, 윌리엄 에임스, 존 오웬을 같은 그룹으로 묶은 것은 잘 한 일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칼빈까지 그 속에 집어 넣는 것은 억지이다. 베자는 칼빈의 제자였으나 칼빈의 종교개혁 신학을 바르게 습득하지 못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알미니우스가 그에게 신학을 배우는 시간을 가졌으나 결국 행위구원론의 대장이 되고 말았다는 사실은 베자에게 스승 칼빈의 종교개혁 이신칭의 신학이 확고하게 자리잡았었는지 의심하게 만든다.

토마스 크랜머는 원래 천주교 사제였으나 헨리 8세의 결혼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 앞장서 천주교와 결별하고 잉글랜드 국교회를 만들었고 캔터베리의 초대 대주교가 된 인물이다. 헨리 8세의 뒤를 이은 나이 어린 에드워드 6세를 보좌하여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을 추진했으나, 얼마 후 천주교 신봉자 메리 여왕의 박해로 순교하였다. 토마스 크랜머가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에 크게 공헌한 것은 사실이나, 칼빈의 종교개혁 신학과  이신칭의 신학을 확실하게 붙잡았다는 분명한 증거는 없다. 휴 라티머도 잉글랜드 국교회의 주교였고 토마스 크랜머와 함께 순교한 인물인데, 그에게 종교개혁 이신칭의 신학이 분명했었는지에 대한 분명한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다. 

잉글랜드 청교도의 조상 윌리엄 퍼킨스와 윌리엄 에임스는 칼빈을 만난 적이 없었고,  베자를 만나 배운적이 있다고 한다. 이들의 신학의 핵심적 특징 하나는 '회심준비론'이다. 회중파 청교도의 회심준비론을 시작한 이들의 신학의 핵심은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에 속한 것이기는 해도, 구원을 얻기 위해 인간은 필요한 조건과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의 신학이 겉으로는 이신칭의를 당연시하는 것 같으나, 구원을 위한 인간의 조건, 역할, 동의를 가르쳤으므로 사실상 종교개혁 이신칭의를 부정하는 신학이었다.

종교개혁을 통해 다시 회복된 성경의 ‘이신칭의’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하면, 반드시 ‘그리스도의 십자가 Only’ 신앙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리고 교묘하게 그리스도의 율법의 선행과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의 율법의 선행을 구원의 조건과 자격으로 부상시키게 된다. 따라서 기독교가 하나님의 은혜의 종교에서 벗어나 율법의 종교로 전락한다. 윌리엄 퍼킨스와 윌리엄 에임스는 구원이 그리스도의 복음선포로 시작되지 않고 하나님의 죄인에 대한 저주와 진노, 율법선포로부터 시작되고, 율법준수를 통해 구원의 가능성이 더욱 높아진다고 가르치는 청교도 회심준비론의 대장들이다. 영생이 없이 창조된 아담이 영생을 취득하기 위해 지켰어야 할 율법을 지키지 못하여 죽음에 처해졌고, 그리스도가 아담과 모두를 대신하여 율법을 지켜 영생의 자격인 ‘의’를 회득하였다는 능동적 순종의 교리의 출발이 되는 행위언약도 이들이 도입했다.

존 오웬에게서도 똑 같은 모습이 나타났다. 오웬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피로 우리에게 '칭의'와 '죄용서'를 동시에 주실 수 있었다면 더 일찍 죽으셨을 것인데, 십자가만으로 불가능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율법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시간을 가지시기 위해 더 오래 사셨다고 했다. 청교도 신학의 ‘이중전가’(Double Imputation), 즉 십자가로 죄용서를, 율법준수로 의를 이중적으로 전가하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일찍 죽으시지 않고 지상에서 오래 사셨다고 주장했던 사람이 모두가 칭송하고 존경하는 존 오웬이다.

“완전히 의로운 그리스도는 그의 (율법에 대한) 적극적인 순종이 없어도 죄를 위한 희생 제물과 화목 제물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러므로 그가 적극적인 순종의 삶을 산 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 그의 (율법에 대한) 순종은 순수한 순종의 행위로서 우리의 칭의의 원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그 (율법에 대한 적극적) 순종이 우리에게 전가되지 않는다면,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모든 법에 순종을 할 이유가 없었다. 그가 훨씬 일찍 죽었어도 우리의 죄를 대속하는 데 충분했다.” (John Owen, 『성도와 하나님과의 교제』, 151)

테오도르 베자, 토마스 크랜머, 휴 라티머, 윌리엄 퍼킨스, 윌리엄 에임스, 존 오웬의 공통적인 특징은 성경과 종교개혁의 핵심 신앙, ‘그리스도의 십자가 Only’ 위에 서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Only' 신앙을 가르친다. 신약의 사도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십자가 Only’ 신앙을 부여잡았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18)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벧전 1:2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벧전 1:19)


신호섭 교수가 열거한 위의 사람들은 사도들처럼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만을 강조하였던 사람들인가? 그들이 사도들처럼 ‘그리스도의 피 Only’를 설교하였던가? 위 사람들과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은 신호섭 교수가 강의를 통역하기도 했던 미국 청교도 신학교의 선생 프롱크이다.

프롱크 교수(미국,  청교도 신학교)와 통역하는 신호섭 교수
프롱크 교수(미국, 청교도 신학교)와 통역하는 신호섭 교수

 

프롱크의 책 '도르트신조강해'
프롱크의 책 '도르트신조강해'

“오직 율법에 완벽히 순종할 때에만 우리는 영생을 얻습니다. 이것은 아담이 행위언약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하나님께 순종하면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프롱크, 도르트신조강해, 259)

“죄인은 자신의 대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히 순종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그 죄인에게 전가됩니다.” (프롱크, 도르트신조강해, 236)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을 위한 모든 계명에 완전히 순종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자신의 죄의 짐을 느끼는 죄인들에게 기쁜 소식입니다.” (프롱크, 도르트신조강해, 268)
 

신 교수가 칼빈을 저런 사람들 속에 넣어 도매금으로 넘기려 했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순종을 성육신부터 십자가까지의 전 생애의 순종으로 가르쳤다. 칼빈은 칭의를 주는 그리스도의 율법에 대한 능동적 순종, 죄용서를 주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수동적 순종을 마음에 품지 않았다. 칼빈은 칭의의 원인을 그리스도의 율법준수로 설명했던 적이 없다. 칼빈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용서 받음이 곧 의로워지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의롭게 한다’는 뜻은 고소를 당한 사람에 대해서 마치 그의 무죄가 확정된 것같이, 그 죄책이 없다고 무죄 석방을 선고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 사도행전 13장에 있는 바울의 설교에 이런 말이 있다.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8-39). 여기에 보면 죄의 용서를 말한 후에, 그에 대한 해석으로 의롭다고 인정한다는 말을 한다. 의롭다고 인정하는 것을 분명히 죄의 사면으로 해석하며, 의롭다함을 율법의 행위에서 분리시키고 있다.” (기독교강요, 3.11.3)
 

정통 개혁신학자 서철원 박사도 칭의를 율법의 선행과 연관시키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피 뿌리심을 받는 것으로 설명한다.

 

“의롭다 하심의 중요한 점은 바로 죄책을 제거하심이다. 죄책 혹은 죄과의 제거는 죄인을 의인으로 확정하는 것이다. 무죄하다고 선언하는 것은 죄에 대한 책임이 제거되었음을 뜻한다. 그래서 범죄하였지만 죄책이 제거되었으므로 죄에 대해서 책임질 일이 없어진다. 곧 완전한 의로 인정되는 것이다.” (서철원, 교의신학전집 5: 구원론, 124)

계속해서 신 교수의 말을 살펴보자.

“1990년 영국의 신학자 알란 클리포드(Alan Clifford)는 존 오웬과 같은 후기 개혁주의 인물들이 대륙의 종교개혁자들뿐만 아니라 영국 국교회의 종교개혁자들까지도 잘못 해석했다고 주장하였다 ... 클리포드에 따르면, ‘칭의가 죄의 사면(forgiveness of sins)을 뛰어 넘는 것이라고 주장한 사람은 다른 아닌 테오도르 베자와 존 오웬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클리포드는 ‘오웬 시대의 고-칼빈주의자들이 종교개혁자들로부터 심각하게 이탈했다’고 결론지었다 ... 켄달과 마찬가지로 클리포드 역시 ‘칭의에 대한 칼빈의 해석을 이해하면서 전가와 죄의 사면을 동의어로 제시하는 오류를 범함으로써 새로운 칼빈을’을 고안해 냈다. 그러나 칼빈은 절대로 칭의와 죄의 용서를 동의어로 간주하지 않았다.” (신호섭 교수, 24 페이지)

여기서도 신호섭 교수는 칼빈의 신학에 대한 중대한 왜곡을 드러냈다. 베자, 존 오웬에 의해 칭의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부터 유래한다는 성경의 가르침이 왜곡되었다고 진단한 알란 크릴포드는 옳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오웬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피로 칭의와 죄용서를 동시에 전가할 수 없으므로 칭의를 얻기 위해 율법준수하시려고 지상에서 오래 사셨다고 했던 이상한 사람이다. 잉글랜드 청교도 신학의 황태자 존 오웬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는 이신칭의를 몰랐거나 부정했으므로 결코 성경의 진리 위에 바로 섰던 사람이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저러나 오웬은 이미 한국에서는 영원한 영의정 자리에 오른 사람이니 아무도 건드리지 못한다.

신 교수는 존 오웬처럼 존 칼빈도 죄 용서 받는 것과 칭의 얻는 것이 동일한 일이 아니라고 가르쳤다고 왜곡하였다. 정말 칼빈이 ‘죄 용서 받는 것’과 ‘칭의 얻는 것’이 같은 일이 아니라고 가르쳤을까? 다음의 칼빈의 말을 읽어보기 바란다.

“그는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사함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6-7, 시 32:1)고 말하였다. 여기서 바울은 칭의의 일부분이 아니라, 그 전체를 논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다윗이 죄를 값없이 용서받은 사람들은 행복하다고(시 32:1-2) 그 선언한 그 정의에 찬성한다. 이것을 보면 바울이 말하는 의는 단순히 죄책의 반대 개념인 것이 분명하다.” (기독교강요, 3.11.4)

정통 개혁신학자 서철원 교수의 다음의 말도 읽어보기 바란다.

“의롭다 하심은 예수 믿음에 근거해서 죄를 용서하여 무죄하다고 선언하심이다. 믿음고백에 죄용서와 의롭다하심이 온다. 칭의는 단지 주 예수를 믿는다는 믿음고백에 대한 하나님의 무죄 선언이다.” (서철원, 교의신학전집 5: 구원론, 29)

 

신 교수는 또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16세기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 같은 후기 개혁주의 신학자들 사이에는 실제로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 교리를 가르치지 말아야 하는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교리는 과연 법정적 허구인가? 그렇다면 16세기 종교개혁은 과연 잘못된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순종의 전가 교리를, 그것이 능동적 순종의 전가이든 수동적 순종의 전가이든 관계없이, 반드시 폐기 처분해야 할 것이다.”(신호섭 교수, 30 페이지)

신 교수는 성경을 더 읽어야 하고, 신학 작업을 할 때 반드시 근거되는 성경 구절을 찾는 습관을 가져야 할 것 같다. 신 교수의 책에서 주장의 근거가 되는 성경 구절이 나열되는 것을 많이 보지 못했다. 성경 구절에서 떠나면 결국 인간의 이론과 사변으로 치우치게 될 수밖에 없다. 성경의 칭의 사상과 칼빈의 칭의 사상은 동일하다.

칭의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보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 3:24)

사도 바울은 사람이 예수 믿고 죄용서 받으면 저절로 의로워진다고 가르쳤다.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롬 5:9)

사도 바울은 예수의 피가 우리를 의롭게 만들고 죄 용서 받게 한다고 가르쳤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5:21)

사도 바울은 대신 죽으신 예수 때문에 우리가 의로워졌다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히 10:19)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의 피가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만든다고 가르쳤다.

칭의에 대한 칼빈의 사상을 한번 더 보도록 하자!

“그는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사함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6-7, 시 32:1)고 말하였다. 여기서 바울은 칭의의 일부분이 아니라, 그 전체를 논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다윗이 죄를 값없이 용서받은 사람들은 행복하다고(시 32:1-2) 그 선언한 그 정의에 찬성한다. 이것을 보면 바울이 말하는 의는 단순히 죄책의 반대 개념인 것이 분명하다.” (기독교강요, 3.11.4)


칼빈의 칭의 사상과 성경의 칭의론의 내용은 동일하다. 성경의 어디에 예수의 율법준수(능동순종)가 의를 전가하고, 예수의 십자가의 피(수동순종)가 죄용서를 전가한다는 쪼개진 돼지 족발 같은 칭의론이 있는가? 성경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Only’를 말한다. 칼빈이나 서철원 등의 정통 개혁신학자들은 칭의와 죄용서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유래했다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Only'를 주장한다. 그런데 왜 신 교수는 복잡한 소리를 하는가? 모두 인간의 사변이고 철학일 뿐이다. 

“그렇다면 16세기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 같은 후기 개혁주의 신학자들 사이에는 실제로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 교리를 가르치지 말아야 하는가?” (신호섭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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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